어린
시절의 추억 (2008/8/12)
©
Suk Hoon Han
순천
선교부는 매곡동의 매산학교 뒤편에 있었고, 그 옆에 주택을 지어서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다. 우리 집도 거기였다. 학교 뒤편은 기도산이라
불리우는 산이었고 그 산 중턱에 운동장의 절반만한 넓고 평평한 풀밭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에덴동산'이라 불렀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에덴동산에 올라가 동네 친구들과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놀았다.
물론
그곳에서만 놀았던 것은 아니었다. 금곡동, 옥천동, 행동 등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여름이면 순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동천(東川)의
물속에서 텀벙텀벙 물장구를 치고, 고기를 잡는다고 천변 물을 온통
휘젓고 다녔다. 동네 어른들은 천방지축 날뛰는 나에게 "그렇게
밖에서 놀다가는 문둥이들이 눈에 고춧가루 뿌리고 잡아가 간을 빼 묵는다"며
겁을 주곤 했다. 사실 그 무렵엔 한센병 환자들의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다. 고흥 소록도가 순천의 지척이었다.
여름과 가을이면
앵두며 감이며 수박을 서리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리할 목록이
정해져 있었다. 늘 배가 고팠지만, 어찌 보면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때이기도 했다. 지금은 도시 한복판에서 빨간 앵두나 감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그때만해도 골목마다 지천이었다. 앵두를 서리해서 때가 꼬질꼬질한
검정 고무신에 담아 선교부 창고 뒤편 외진 곳에 숨어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겨울이면 쥐불을 놓고 연을 날리며 낮 시간을 보내고 대보름에는
다른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돌을 던지며 놀았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설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설날 아침이면 나는 신문지 두 장을 들고 길을
나섰다. 어른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을 어슬렁거리다, 동네 어르신이
지나가면 그 앞에 신문지를 깔고 엎드려 넙죽 엉터리 세배를 하고는
"세뱃돈 좀 많이 주쇼~잉"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때의
겨울은 지금보다 더 추웠고 눈도 더 많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웅덩이가 꽁꽁 얼어있고 대나무만큼이나 큰 고드름이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고드름을 따먹기도 하고 친구들과 칼싸움을 벌였다.
지금처럼
잘살지 못한 시절이니 옷도 변변한 것이 없었고 또 난방도 시원찮았는데,
추위를 모르고 한겨울을 보냈다. 얼굴이 발갛게 터지고 손등은 가뭄을
맞은 논 바닥처럼 늘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래도 양지바른 돌담에 기대
오징어를 구워 먹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중략]
한국말을
하며 한국 친구들과 지내면서 나는 스스로 외국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친구들 역시 어떤 차별대우도 하지 않았다. 물안개처럼
아련한 그 시절의 추억은 나의 정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웬만한 전라도
사람 못지 않은 '징글징글한 전라도 기질'도 그때 다 몸에 배었다. 그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어린아이였고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왕자였다.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배우고, 느끼고 체득한
소중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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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pp. 69-71
지금
세상에 이렇게 "소중한 시절"을 보내며 자라나는 건강한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모르겠군요. 저의 이런 회한을 이번 주 수행일상에 올려보았습니다.
인선생의
어린 시절 추억을 읽다보니 제가 고만했던 때가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물질적으로 결핍됐고, 불편했으며, 어렵게 살았던 시절,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고 느끼게 되는 건 감상주의적 착각에 불과할까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져옵니다. 이런 느낌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묵직한 역할을 요즘 자식 키우는 부모들이 알 턱이 없을 듯
합니다. 인선생 덕분에 옛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보는 즐거운 경험을
해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