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 (2013/9/29)
 



 © Suk Hoon Han                                                                                                                                        
 
 

내가 나의 환상을 적을 무렵 나는 한 번 이렇게 자문하였다."도대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내가 하는 일이 학문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 그것은 무엇이냐? 이에 내 속에서 하나의 소리가 말했다. "이것은 예술이다." 나는 무척 놀랐다. 나의 환상이 예술과 무슨 관계가 된다고는 생각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아마 나의 무의식이 내가 아닌 어떤 하나의 인격을 형성했고 그것이 그 자신의 고유의 의견을 표명하고자 하는가 보다." 나는 그 소리가 한 부인의 목소리에서 유래함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한 여자환자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다 ....

내 속에 있는 여인이 나의 생각에 간섭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었다. 아마 원시적인 의미의 "넋"이 여기에 관계하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넋"이 왜 "아니마(anima)"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 뒤에 나는 내 속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원혁적 상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Anima"라고 불렀다.

나의 마음속의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그 여자환자는 현실에서는 남성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동료 중의 한 사람에게 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못 이해된 예술가라고 설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가 그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좌절의 원인은? 그는 자기 자신의 평가에 의하여 살지 않고 남의 평가로 살았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그의 확신을 흔들어 놓았으며 아니마의 속삭임에 솔깃해지게 만들었다. 아니마의 말은 흔히 유혹적인 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간교함을 지니고 있다 ....

아니마는 또한 나에게 내가 잘못 이해된 예술가라고 믿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고, 나의 이른바 예술성이 나에게 현실을 소홀히 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고 설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녀의 소리에 따랐다면 그녀는 나에게 어느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네가 하는 무의미한 일이 무슨 예술이나 되는 줄 믿고 있느냐? 천만에."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의 이중성은 한 남자를 철저하게 파멸시킬 수 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마는 또한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의 상을 의식에 전달하는 것이 바로 아니마이다.


- 같은 책, pp. 210-213.


융처럼 자문해봅니다. "도대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젊은 시절, 학문의 본원에서 수련을 받았으나 학문 자체가 나의 열정이었던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언제나 나 자신이었고, 자신을 잘 파악하고 토닥여서 세상과 잘 사귀고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학문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내가 해온 일이 예술이라는 유혹의 음성을 들어본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알량한 피아노 연주를 나의 교육·저술 활동에 접목시켜보는 건 어떨까 하는 유치한 망상을 품어보기도 했습니다.

내면의 진정한 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실로 아니마라는 개념의 이해는 중년기의 실제 체험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내게 다가온 아니마는 융의 경우처럼 치명적이고 "간교한" 유혹의 메시지를 흘리기도 했더랬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진정한 메신저로서 아니마를 존중하고 있습니다. 아니마의 유혹은 기독교의 시험, 불교의 마와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융 말씀대로 중요한 건 나의 의식이겠습니다.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나의 의지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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