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
김운찬 번역, 열린책들, 2003

-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세계적인 석학인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움베르토 에코 교수는 기호학, 역사학, 종교사학, 철학, 언어학 등등 드넓은 학문 분야를 섭렵하는 지적인 소설들의 저자로도 유명합니다. 개인적으로, 에코 교수의 지적 섭렵은 비정상적으로 방대하다고, 따라서 존경의 염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고 봅니다. 이는 그의




 

대표적 소설인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 등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책은, 그가 1990년대에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한 글들의 모음집입니다. 그 중 한 글이 마치 저의 개인적인 신앙추구 방식에 관하여 날카롭고도 이성적인 해부의 메스를 들이대는 듯이 느껴져 이곳에 소개합니다. 저 자신의 구도의 애매모호한 부분들에 메스가 가해지는 당혹감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에코 교수의 인본주의적(humanistic) 종교관이 저와 같은 종교다원적 자세를 옹호해준다고 믿기 때문에 이곳에 그의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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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위의 책의 "영원한 파시즘"이라는 챕터에서 필자가 '원형 파시즘'의 증상으로 열거한 것들입니다. 각 증상에 대한 저의 반응을 [회색 글씨]로 적어둡니다. (이 책, pp. 50-54 에서 인용)

1. 원형 파시즘의 첫 번째 특징은 <전통의 숭배>입니다. 전통주의는 파시즘보다 더 오래되었지요.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톨릭적 반혁명 사상의 전형이었을 뿐만 아니라, 후기 헬레니즘 시대에 고전적 그리스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탄생하였습니다.

[전통 파괴자인 양 지껄이는 저 역시 전통을 숭배합니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유교, 도교 등등의 전통 말이죠.]

지중해 근방에서 종교가 서로 다른(모든 종교들은 너그럽게 로마의 판테온(萬神殿)에 받아들여졌지요) 민족들은 인류 역사의 여명기에 받았던 하나의 계시를 꿈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계시는 이제는 이미 잊어버린 언어들의 베일 속에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지요. 그것은 이집트의 상형 문자들, 켈트 족의 룬 문자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종교들의 성스러운 텍스트에 위탁되어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여명기'의 계시에 대한 꿈.... 글쎄, 많은 종교다원론자들의 동경이 아닐런지...]

이 새로운 문화는 틀림없이 <혼합주의적>이었을 것입니다. <혼합주의 sincretismo>란 일반 사전들이 말하듯이 단지 서로 다른 믿음들이나 실천들의 통합이 아닙니다. 그런 통합은 <모순들을 관대하게 용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독창적 메시지들이 현명함의 싹을 간직하고 있으며, 상이하거나 모순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것들 모두가 어떤 원초적인 진리를 우의적(寓意的)으로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다원론이라는 것 자체가 이런 혼합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결과 <지식의 진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이미 결정적으로 예고되었으며, 우리는 단지 그 모호한 메시지를 계속하여 해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파시즘 운동의 강령을 살펴보기만 해도, 주요 전통주의 사상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치의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is)는 전통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에서 영양분을 섭취하였지요 ....

['내 눈'에는 자비롭고 이해심 깊기 그지없는 종교적 다원론의 특색들이 나치의 특색과 유사하다니!]

만약 여러분이 미국의 서점에서 <뉴 에이지>라는 팻말이 붙은 서가들을 뒤져 본다면, 심지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까지 발견할 텐데, 내가 알기로는 그는 전혀 파시스트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스톤헨지를 함께 모아 놓고 있다는 사실 자체, <그것>이 바로 원형 파시즘의 증상입니다.

[카톨릭 성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켈트족 '원시' 신전 스톤헨지. 이 상이한 두 개념의 결합이 원형 파시즘의 증상이라는 진단의 예리함에 경탄합니다. 실은 저 역시, 인터넷에 퍼져 있는 '뉴 에이지' 계통 싸이트들을 써핑하면서, 무차별적인 '혼합주의' 속에 깃들어 있는 지독한 권위주의적 독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일이 적지 않습니다.]

2. 전통주의는 <현대성의 거부>를 함축합니다. 파시스트나 나치 모두 테크놀로지를 숭상하였습니다. 반면 전통주의 사상가들은 대개 테크놀로지를 전통적인 정신 가치의 부정으로 간주하여 거부하지요. 어쨌든 비록 나치즘이 자신의 산업적 성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을지라도, 현대성에 대한 그들의 찬양은 <피와 땅 Blut und Boden>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의 피상적인 양상에 불과하였습니다.

[종교다원론적 성향을 띈 일부 뉴 에이지 단체들이 '현대성'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현대'에는 분명 거부할 점들이 꽤 있습니다. 대량 인명살상 무기 제조, 환경 파괴, 빈부 격차의 극심화 등등. 그러나 이런 '현대'에는 긍정적인 점들 역시 아직 많습니다. 인권 신장, 여성의 권리 확대, 민주적 논의의 지평 확대, 인도주의의 확산, 이성을 기반으로 한 판단 등등. 현대화 폐기의 논쟁에서 하버마스가 아직 현대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러한 연유에서이지요. 저도 그에게 동의합니다만. 여기서 문제는, 현대성을 우리가 비판적으로 재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반면에, 현대성의 일괄적 폐기는 위험하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역량 그 자체를 폐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광신적 파시즘과 만나게 될테니까요.]

현대 세계의 거부는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에 대한 비난으로 위장되어 있지만, 주로 1789년[주: 프랑스 대혁명 발발년도] (또는 분명히 1776년[주: 미국 독립전쟁 발발년도])의 정신의 거부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 그리고 이성의 시대는 근대적 퇴락의 시초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형 파시즘은 <비합리주의>로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코 교수는 여기에서 그의 파시즘 증상 포착의 핵심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성과 이성의 거부가 자유주의의 거부로 이어지는 현상 말입니다.]

3. 비합리주의는 또한 <행동을 위한 행동>의 찬양에도 의존합니다. 행동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우며, 따라서 어떠한 성찰도 없이 또한 성찰 이전에 실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생각한다는 것은 무기력함의 한 형태이며, 그러므로 문화가 비판적 행위와 동일시되는 한 <문화는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나치의] 괴벨스의 말로 간주되는 선언(<나는 문화에 대한 말을 들을 때마다 내 권총을 뽑아 든다>)에서, <지식인 돼지들>, <지식인 나부랭이들>, <급진적 속물들>, <대학은 공산주의자들의 소굴이다> 등과 같은 표현들의 빈번한 사용에 이르기까지, 지식인 세계에 대한 의혹의 눈길은 언제나 원형 파시즘의 한 증상이었습니다. 공식적인 파시스트 지식인들은 주로 현대 문화와 자유주의적 인텔리겐치아가 전통적 가치들을 내버렸다고 비난하는 데 몰두하였지요.

['행동을 위한 행동'의 찬양이라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순간'만의 찬양과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로 하여금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 지적입니다. 기적처럼 건져낸 진실의 한 조각이 인간의 이지적인 성찰 기능 그 자체를 부정하는 파시즘으로 변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고 저는 구도는 끊임없는 긴장이어야 할 수밖에 없으며, 모든 진리는 매 순간 재생(또는 '갱신'; renewal)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습니다.]

4. 그 어떠한 형태의 혼합주의도 비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비판 정신은 구별 작업을 하며, 구별한다는 것은 현대성의 표시이지요. 현대 문화에서 과학의 공동체는 불일치를 지식 진보의 도구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원형 파시즘에서 <불일치는 바로 배반입니다>.

[나의 종교다원론적 구도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내적인 논리의 모순이 현상계에서의 나의 신앙의 균열을 유발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불일치를 끌어안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비판을 거부함은 이성을 거부함이고, 이는 나를 형성하는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을 폐기처분함에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이 싸이트에 내용을 정리하여 올릴 정도의 조사나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과학과 신앙의 만남에 대한 내용을 올릴 계획입니다.]

5. 그 이외에도 불일치는 다양성의 표시입니다. 원형 파시즘은 천성적인 <차이에 대한 두려움>을 과장하고 이용함으로써 일치를 찾고 증대시키려고 하지요. 파시즘 운동 또는 파시즘을 예고하는 운동의 첫 번째 호소는 침입자들에 대한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원형 파시즘은 그 정의상 인종 차별적입니다.

[에코 교수의 글은, 모든 종교적 실천들로부터 공통점을 찾아내보고 싶은 저의 개인적 구도가 모든 종교들이 갖고 있는 '차이'를 배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을 충고해주고 있는 다정한 스승의 말씀처럼 와닿습니다. 종교들 간의 차이를 축복으로 볼 수 있는 지혜를 달라이 라마와 같은 스승들도 요청하고 있지요.]

(2003.4.16)

 

    '책의 지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