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호미, 2001

- 이 아무개


"이 아무개"라는 필명으로 여러 양서들을 번역하고, 종파에 얽매이지 않는 지혜를 전하는 책들을 집필하시는 이현주 목사님이 불교의 금강경을 풀이한 자그마한 책입니다. 책이 한 손에 쏙 들어가는 콤팩트 싸이즈인데다 하드 바운드라, 들고 다니며 읽기엔 참 좋습니다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깊고도 어려워 웬만큼 정신 집중하지 않고 건성으로 읽었다간 아무 것도 못 건질 책입니다. 책 서두의 정토회 법륜스님이 쓰신 추천사와 이현주 목사님의 서문을 부분 발췌해 봅니다.

"성경 공부를 마쳤다는 이가 불경을 보고 그 뜻을 모른다면 어찌 성경을 제대로 안다 하겠으며, 불경 공부를 해서 깨쳤다는 이가 성경을 보고 그 뜻을 모른다면 어찌 그가 진리를 깨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금강경'이 일체 중생을 깨닫게 하여 저 언덕에 이



 

르게 하는 가르침이라면, 어찌 승려는 깨치고 목사는 못 깨치겠습니까? 옛적에는 스님들도 유학에 밝은 이가 많았고, 유학자 중에도 불경에 밝은 이가 많아 서로 만나 의견을 나누며 서로 배우고 교류하며 사이 좋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인들보다도 못해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 다투고 미워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법륜)

"저는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믿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아울러 모든 사람 속에 여래님이 계시다는 불교의 가르침도 믿습니다. 제 속에는 예수님과 여래님이 나란히 계시거니와, 이 두 분 사이가 저와 저의 사이보다 더 가까우신 것은 분명합니다. 저와 제가 하나이듯이 두 분도 그렇게 한 분이신데 저는 저하고 자주 갈등을 빚지만 두 분 사이에는 도무지 그런 일이 없으시니까요. 아니, 없으신 것 같으니까요. (제가 어찌 감히 두 분에 대해 단정지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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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보려면 하루하루 앉고 서고 줍고 걷고 움직이고 가만 있음을 살피라 했거니와, 때가 되어 고요함을 깨고 일어나 잠시 움직임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때가 되어 움직임을 그치고 고요함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인생의 모든 것이 들어 있거늘 이보다 자세하고 친절한 가르침이 어디 있으랴? (pp. 15-16)


세상 사람들은 진기한 보물을 중(重)하게 여기지만 나는 찰나의 고요함을 귀하게 여긴다. 금(金)이 많으면 사람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고요하면 진여(眞如)의 성(性)을 본다. (p. 21)


열반이란 가서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요 중생이 자성(自性)으로 돌아가는 것일 따름이다. (p. 27)


나에게 아름다운 보물이 있다. 언제부터 내게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보물이 내게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날마다 만지작거리면서도 보물인 줄을 몰랐다. 그러니 나에게는 보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있지만 없는 보물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스승을 만나 그것이 보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보물을 지니게 되었다. 있지만 없던 보물이 있으면서 있는 보물로 되었다. 스승이 내게 그 보물을 준 셈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나 또한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p. 30)


주는 것과 받는 것은 하나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요 받는 것이 주는 것이다. 보살은 그렇게 끝없이 주고받음으로써 영원히 산다. 있는 것은 다만 '주고받음' 그것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다. 천상천하에 오직 사랑만이 존귀할 따름이다. 보살의 삶은 사랑의 구현이다. 참된 사랑은 아무데도 집착하지 않는다. 바람처럼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데 과거도 미래도 없다. (p. 33)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미 지니고 있던 것을 지니게 되는 것이 '얻음'이다. 부처가 부처로 되는 것이 '성불'(成佛)이다. (p. 49)


거듭 말하거니와 향선배악(向善背惡)을 하지 않고서 선악을 함께 버리는 길로 곧장 가는, 그런 중생은 없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이웃과 나누는 일조차 못하면서 어찌 경(經)을 지녀 그것을 남에게 설할 것인가? 다만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에 닿아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잊지 말고, 보이고 잡히는 것에 머물러 안주하지 말라는 그런 얘기겠다. (p. 57)


'입류'(入流)란 성스런 흐름[聖流]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한 방울 물이 바다로 이어지는 '흐름'에 들어가면 이제 그가 '바다'로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모든 개울이 강에 이어지고 강은 또한 바다에 이어진다. 그러므로 개울과 바다는 둘이 아니다(不二). 낮은 곳으로 흐르기 시작한 물은 결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입류한 사람은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의 몸으로 환생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개울은 아직 바다가 아니다(非一). 이 점을 놓치고 보니, 보살도 못 된 것이 부처 행세를 하고 다니는 꼴불견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p. 60)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자 명상하지 않는다. 깨달음이 이미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목적도 목표도 없다. 어떤 높은 경지에 오르고자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무위(無爲)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루고 싶은 것을 이미 이루었음을 본다. 그리하여 애쓰기를 멈추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을 보거나 빗소리를 들으면서 평안하다. 무엇을 좇아서 달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매 순간을 즐길 수 있다. 사람들은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거기에 있다.(티크 나트 한,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p. 64)


참되게 닦는 사람은 애쓰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으니,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게으르면 어리석음에 떨어집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열쇠지요. (p. 68)


삶에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차원에서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물결(wave)과 같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적 차원(historical dimension)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하나는 물(water)과 같다. 그것을 우리는 궁극적 차원(ultimate dimension) 또는 열반(nirvana)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물질을 경험한다. 그러나 물을 경험하는 법을 발견할 때 우리는 명상이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열매를 얻게 된다.(티크 나트 한, Touching Peace, 10장) (p. 68)


물길이 일어 달빛이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더니 물결이 잦아들어 거울처럼 고요해지자 둥근 달이 옹글게 비친다. 과연 고요해진 물결이 달을 온전하게 만든 것인가? 아니다. 그러나 물결이 고요해지지 않고서야 어찌 둥근 달의 옹근 모양을 비쳐 보일 수 있으랴? (p. 71)


모든 수행인은 마땅히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p. 73)


'화엄경'에 이르기를, 삼천대천세계가 헤아릴 수 없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체 중생을 이룬 것이라 하였으니, 그밖에 따로 무슨 세계가 있으랴? 깨달은 이도 여기에 살고 깨닫지 못한 자 또한 여기에 사는데, 깨달은 이의 마음은 맑고 깨끗한 마음이라 그 마음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니 또한 맑고 깨끗한 세계요, 깨닫지 못한 자의 마음은 티끌로 때가 묻은 마음이라 그 마음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니 또한 티끌 세계다. (p. 92)


보시라는 것이,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주고받는 물건도 모두가 공(空)이니 실(實)은 없는 것이요 그 이름만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놀라고 겁내고 두려워하겠는가? 인욕도 마찬가지다. 욕을 주는 자도 받는 자도 따로 없고 그놈이 그놈인데 누가 무엇을 참고 견딘단 말인가? 그래도 주고받음을 통하여 주고받음이 없는 경지로 가고 욕됨을 참고 견딤으로써 욕됨을 참고 견딤이 없는 경지로 간다.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가볍게 처신하지 말 것이다. (p. 106)


내가 화를 내는 까닭은 내가 다칠까봐 두려워서다. '나'가 단단할수록 화를 잘 낸다. "나에게 몸이 없다면 어떻게 병을 앓겠는가?" (老子) (p. 108)


경을 읽는 것은 좋은 뿌리[善根]를 심는 것인데 좋은 뿌리를 심으면 날마다 자라나 마침내 성불(成佛)에 이른다. 그러므로 끝이 없다. (p. 129)


광기의 입술에 매달려 살아 왔다.
까닭을 알고 싶어서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나는 안에서 두드리고 있었다.(Rumi) (p. 135)


우리가 '그것'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모르기 때문이다. 부분은 제가 그것의 부분인 전체의 이름을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부분이라는 사실을 앎으로써 전체의 존재를 또한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신을(신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그것'을) 알 수 없으면서 모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내 안에 불성(佛性)이 있음 또한 분명하다. (p. 142)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그 나라들 가운데 사는 중생이 천 가지 마음을 지녔다 해도 여래는 그 마음을 모두 안다. (p. 155)


법신여래(法身如來)를 보고자 할진대는 제 본심을 알고[識] 제 본성을 보면 족하다. 구태여 두루 갖춘 색신[色身]을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 (p. 163)

(2003.10.19)

 

    '책의 지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