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넘어선 종교
사계절, 2005

- 최준식


이화여대의 한국학과 교수인 저자의 소개 글이 이 책의 표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대학 들어가서 사는 게 왜 이리 힘든지를 설명해 주는 분야를 찾아보았더니 그 대답은 종교밖에 없었다. 그렇게 학문적 관심보다는 실존적 관심을 좇아 종교 공


 

부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 책은 지난 30년 공부에 대한 작은 결산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 인간은 죽음이나 고통과 같은 궁극적 문제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괴롭기가 그지 없다. 이러한 괴로움을 분석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자의식이라는 근본적 원인이 있었다. 우리는 이 자의식을 초월해야 하는 숙명을 갖고 있다. 그래야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다 해결되면 다다르는 곳이 있다. 영원과 불멸, 그리고 대자유의 세계이다. 이른바 초개인적 영역이다. 이 경지 혹은 차원이 바로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목적지로 제시하는 곳이다."

실은 이 싸이트에서 종교 그 자체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다루는 책을 소개하고자 하였다면 일찌감치
오강남 교수님의 책들을 올려놓았을 터인데, 이 싸이트가 종교학에 큰 관심을 두는 곳이 아니어서 아직껏 오교수님의 책들을 소개하지 않고 있던 차였습니다. 최준식 교수님의 이 책 또한 종교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제고시키는 책으로써 종교학 서적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 저의 공부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습니다만, 본 싸이트는 주로 삶과 신앙에 대한 영감을 주는 글들을 다루고 있기에 본격적으로 독립된 섹션을 만들어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단, 책의 부분 중 재미있게 읽었던 곳만 조금 발췌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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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러[종교심리학자 James Fowler]가 제시한 [신앙 발달의] 세 번째 단계는 종합적-인습적(synthetic- conventional)이라는 신앙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이 겪는 일들을 일관성 있게 통합해나가기 때문에 종합적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그러나 아직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이때는 - 부모나 형제 혹은 친구들과 같은 - 주변에 있는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s)'나 외적 권위에 의존하는 일이 흔하다. 이런 신앙은 제도적인 권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갖게 된다. 쉽게 말해서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단계는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단계를 말한다. 교회나 절에서 목사나 승려가 말한 것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그렇게 설해진 것을 자신이 한 번 더 반성적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마리아가 동정녀로서 예수를 잉태했다고 가르치면 그것이 일반 상식과 어긋나든 말든 의심을 갖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 바로 이 단계에 속한다. 이런 신앙은 근본주의적인 신앙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는데, 『예수는 없다』라는 책으로 명성을 날렸던 오강남 교수의 추론에 의하면 한국 개신교 신자 가운데 이런 보수 신앙을 가진 사람은 90퍼센트가 훨씬 넘는다고 한다.

이 신앙은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매우 높은 신앙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신앙 단계를 거쳐서 다음 단계로 가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수많은 종교 신자들이 이 단계에 머무르고 더 이상 성숙하려고 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이 가진 이런 신앙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상위의 높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는 데에 있다. 그들은 이 제3단계와 앞으로 보게 될 상위 단계인 제4, 5단계를 혼동해서 자신들의 신앙이 이미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 '저 장로는 아주 신앙이 독실하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런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보수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교회가 제시한 여러 교설과 계명에 잘 맞추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연구한 사람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신자들보다 성격이 더 완고하고 고착적이라, 인격이 비성숙된 사람인 경우가 많다 ....

이런 신앙은 나이로 따져보면 고등학교 학생 정도의 신앙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고등학생 수준에서 그치지 말고 그 이상으로 인격을 성숙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고등학생과 같은 청소년 시기에 그 성숙이 멈춘다면 이것은 자신에게나 사회에게나 대단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인간이 청소년기를 거쳐서 장년, 중년 등의 시기에도 끊임없이 성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격이 성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큰 문제를 삼으면서도 종교 신앙이 이 시기에 고착되는 데에 대해서는 별 문제를 삼지 않는다. 종교 신앙은 마치 어떤 비난에도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본 인격 발달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바람직한 태도라 할 수 없다. 유치한 신앙은 말 그대로 유치한 것이라 그 신앙을 가지고 다른 신앙을 비난하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개인적으로 보수 신앙을 갖고 사는 것에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런 보수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생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세력화되면 이들은 자기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미성숙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징표 중에 하나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용인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성숙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상대화시키기 때문에 세상에는 자기와 다른 생각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성숙하고 자신의 성격에 고착된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힘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그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다. 이게 바로 종교 박해의 단면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과거에만 일어났던 일은 아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항상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수많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국과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혹은 갈등은 이런 보수주의 신앙의 갈등으로 보면 된다. 보수주의 신앙인들이 분쟁을 일으킨 결과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보수주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도 사람은 이 단계에 머물면 안 된다. 나는 여기까지의 단계를 아직 유아적인 단계에 속한다고 보고 싶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우리가 굳이 유아와 성인을 구별한다면 자기중심적인 입장을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따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유아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다 잘못이 생기면 그들은 항상 그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바깥으로만 돌린다. 자기가 걷다가 넘어져도 땅이 잘못한 거지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니다. 반면에 성인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어느 정도는 벗어나 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입장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성인은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반성적인(reflective) 사고를 할 수 있다. 이런 태도가 바로 파울러가 이야기하는 네 번째 단계에서 보이는 모습들이다. (pp. 277-280)


저는 윗글의 의견에 죄다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현 실상에 대해서 말해주는 바가 많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종교적 근본주의가 세상에 화합 보다는 투쟁을 야기시키는 면이 크다는 점에도 동의합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성숙한 신앙'이라는 것이 바위같이 굳건한 믿음과 사물에 대한 끝없는 회의 두 면을 동시에 포괄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로써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2005.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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