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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교 사이에 흐르는 강
(이윤기, 중앙일보 2002.11.9)

`믿음 좋다`는 말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자주 쓰던 말이다. `기독교에 대한 신앙이 돈독하다`는 뜻이다. 집안 좋고, 학벌 좋고, 믿음 좋고…. `믿음`은 집안이나 학벌에 견주어질 정도의 아주 높은 덕목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자주 뵌 내 친구 어머니는 `믿음이 좋은 분`이었다. 어느 정도로 좋았는가 하면, 긴한 볼일이 있어 곱게 단장하고 마을을 나섰다가도 도중에 스님을 만나면 집으로 되돌아갔을 정도로 믿음이 좋았다. 몸도 어리고 마음도 어리던 우리들은 십자가 군병 같은 그 어머니를 한없이 존경했다. 우리 집안에도 믿음이 좋은 분이 한분 계시다. 좋은 일, 궂은 일이 있어 모이면 나는 이분 때문에 열을 많이 받는다. 이 아무개가 믿음까지 갖추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겹게 건너왔고 지금 건너고 있는, 종교와 종교 사이로 흐르는 강이다.

나는 두 종교를 모두 좋아해 기독교 신자들 무리에 섞이면 이단으로 조리돌림을 당하고, 불교 신자 무리에 섞이면 예수쟁이로 `왕따`당하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래서 교리를 둘러싼 논쟁 같은 데는 거의 끼어들지 않는다. 상처 안받고 지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 머무를 당시 바로 그런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뻔 한 경험이 있다(이 때 경험을 책에다 쓴 적도 있다). 저녁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가톨릭 교도인 한 물리학자와 불교도인 한 화학자가 바로 내 곁에서 종교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나는 아연 긴장한 채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교황을 까마득하게 높일 때는 "히스 홀리니스(His Holiness)", 즉 `성하(聖下)`라는 극존칭을 쓴다. 논쟁을 벌일 당시 가톨릭 교도와 불교도는 똑같이 "히스 홀리니스"라는 말을 썼지만 그 말로써 높이는 서로의 대상은 당연히 달랐다. 전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지칭했지만 후자는 달라이 라마를 지칭한 것이다. 하지만 논쟁은 종교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양쪽에서 똑같이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전제다. `나는 당신이 믿는 종교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동안 교리 논쟁을 벌이던 두 학자, 끝내 종교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대신 당신의 종교를 좀 더 알고 싶은데 혹시 참고가 될만한 책을 추천해줄 수 있느냐, 서로 이런 말을 주고 받고 추천서 메모를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불교도가 한 농담, 세월이 꽤 흘렀는데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의 천국은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천국 구경을 한사코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내가 가까이 모시는 스님 한분은 20년 전부터 10월 상달의 달 좋은 날을 잡아 단군제를 모신다. 물론 그 스님이 주석하시는 절에서 모신다. 20여년 전에는 글 좋아하는 우리 동아리, 그리고 스님 몇 분이 참례했을 뿐인데 지난 10월에 가보고는 크게 놀랐다. 절에서 스님이 지내는 제사이니 스님들이 많이 오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목사님 두 분, 수녀님 한분이 와 계셨다. 주량에 맞게 술을 마시면서 하느님 이야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이 열리는 분들 덕분에 이제 종교와 종교 사이를 흐르는 강이 좀 제대로 흐르겠구나 싶었다.

칭기즈칸의 며느리 소르콕타니가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소르콕타니는 원나라를 세워 우리 고려를 침략한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일본 작가 진순신의 소설『야율초재』에 따르면 소르콕타니는 아들인 쿠빌라이에게는 물론 지아비인 몽골 제국의 황제 툴루이(칭기즈칸의 아들)에게도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해 주고 믿기를 청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소." 툴루이 황제가 아내에게 했다는, 기독교에 대한 이 말이 퍽 인상적이다. 나는 툴루이가 기독교를 폄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울타리 없는 신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