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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람 속에서
- 깨달음은 부드럽게 속삭인다
금년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길을 가다가도
잠시 허공에 날리는 흰 꽃잎들의 군무를 바라보았다. 저 하늘, 그 어디에 투명한 바람의 손이 있어 숨어 있던 슬픔을 저토록 흰 꽃으로 피워
죽음의 잿빛 도심에 뿌리는 것일까?
일곱살 적, 내 코끝에 스치던 싸한 향기의 뜻 모를 그리움이 산처럼
밀려왔고 그 누군가 내 가슴 속에서 연주하는 비발디에, 나는 또 바람처럼 설레기도 했다.
하늘만큼 크고, 저 잿빛 허공만큼 막막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어붙은
그리움도 세월이 가면 저토록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일까? 어느 날 우리의 젊은 시인은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서정주/자화상)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찌 스물 세 해만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태어나던 순간부터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바람에
이끌려 한 생애를 살다가 어느 날 또다시 한줌 바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봄.여름.가을.겨울 하늘과 땅에 부는 바람이 그러하듯, 때로는 몸과 마음을
소진시키는 숨 막히는 사랑으로, 때로는 죄스러운 양심에 현기증으로, 때로는 아득한 절망으로 무너지는 산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은 바람의 무덤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시기와 질투, 온갖 더러운 탐욕으로 미친 바람같이 인간의
마음이 오욕으로 물들 때 바람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격언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인류의 모든 영웅서사시가 '폭풍과 뇌우, 회오리바람'으로 쓰이지만
인류의 모든 죄의 역사 또한 '바람의 역사'로 표현되었다.
선지자 엘리야는 폭풍 속에서도, 지진과 불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미풍 속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용하고 여린 음성으로, 미풍 속에 거닐던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했다. 질풍노도와 같은 영국군의 군화 발자국이 진동할 때 간디는 조용히 물레에
실을 감으며 미풍을 일으켰고, 히틀러가 폭풍노도같이 연설할 때 우리 시대의 성인 로마노과르디니는 미풍과 같은 설교로 삭막해져 가는 독일 사람들의
마음에 마지막 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
온 국민이 폭풍 같은 고함소리와 아우성이 창궐한 텔레비전 앞에서 하루를
보내는 나라에서, 플래카드와 벽보와 확성기가 교회와 사찰의 제단에 아우성처럼 걸려 있는 이 나라에서, 우리는 엘리야가 만난 그 하느님의 목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으며, 꽃 속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가섭존자의 지혜는 그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얼어붙은 엄동의 하늘, 그 어느 곳에서 흰 눈발을 이끌고 가던 바람은 오늘
밤에도 천길만길, 그 어느 꿈속에 희디 흰 무덤을 만들고 있을까?
(조광호
신부, 중앙일보,
200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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