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님의 격려에 대한 답장 (2003/4/19)

K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때때로 선생님께서 올해 말에 삼십년의 주기를 채우신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습게도, 제가 기다려지는 것 같습니다.

전 요즘은 깊은 수행과 깊은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지냅니다. 단순히,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일상의 매 순간을 수행으로 만들라는 틱낫한 스님이나 여러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바쁘고 분주한 일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 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참, 혼자 하루라도 조용히 보내며, 아무 의무 없이 보낼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많은 돈 같은 것으로 해결될 일도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유혹에 약한 저 같은 인간에게 돈이 많다면, 어쩌면 수행 같은 건 팽개치고 놀러나 다녔을런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지금의 바쁜 일상도 다 최적의 이유가 있어 그렇겠거니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게으름 안 피우고 열심히 살며, 제 몸도 잘 돌보고, 건강히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제가 '접신'(아내가 비꼬아 부르는 표현) 했을 초기에는 주변의 반신반의도 있었지만, 저의 이런 생활이 몇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보니, 제 아내도 이젠 할 수 없이 '숙명'으로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에 조화가 깃들고, 집안에 명랑함과 평화가 지속되고 하다보니, 비록 제가 속세의 풍진과 같은 영광과는 멀리 떨어진 길을 가고 있기는 해도, 우리 가족은 내심 제가 제대로 살고 있음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제 가정의 평화가 없었더라면, 감히 저의 평화를 바깥 세상과 나누고자 웹싸이트 같은 걸 만드는 시도도 하지 못했겠지요.

굳이 한국적인 연령에 기초한 위계질서를 존경하는 위인도 아니지만, 선생님께 메일을 쓸 때가 되면, 아무래도 대선배님을 대한다는 느낌이 들어, 저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주절주절 읊어대는 응석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 후배의 유치한 수다를 받아주심에 감사드리구요.

저도 선생님처럼 언제부터인가 전쟁절대불가론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참전경험 같은 것은 없지만요. 저의 어린 시절 스승께선 학문적 열정을 기초로 평화사상을 추구하셨지만, 저는 이제 신앙에 기초한 평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몸과 마음으로 겪으시고 다지시게 된 평화사상을 저에게도 나누어주시고, 지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상도 예전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전에는 이렇게 전 세계가 열렬히 반전을 외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대학생 때, 역사학자인 스승들의 영향을 받아 한 쪽으로 제쳐두고 내심 폄하했던 토인비의 사상.... 공교롭게도, 지금 제 시야 바로 앞에 있는 책이 토인비의 책입니다, '이십세기에로의 대화'라는 다만 일본 책이라 쉽게 읽히지가 않아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고만 있습니다만. 이제는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토인비의 비젼이 인류의 비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평화와 인류공영. 나 같은 일개 개인과는 별 상관도 없다고 여긴 지나치게 거대하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것만 같았던 개념들인데요. 이제는 나라는 개인과 뗄 수 없는 비젼임을 실감하고 삽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함이 그런 거대한 이상 또는 비젼에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길임을 믿습니다.

언제나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평화로운 4월 맞이하시옵기 바랍니다.

- 한석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