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역경을 겪고있는 학생의 메일에 대한 답신 (2008/1/20)
M씨,
예상과는 다르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 클래스가 분위기가 괜찮았어요,
그래서 학생들도 많이 기억이 나고, 또 M씨도 기억이 납니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니 그 소식을 듣는 내 마음도 좀 무거워지네요. 나도 가까운 이의 항암치료를 곁에서 지켜봤던 경험도 있고... 부디 힘을 내서 극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어떻게 힘을 낼까 하는 문제에 대해 내가 경솔하게 끼어들 순 없겠고, 요청한 바와 같이 프랑클 박사에 관해서나 얘기할 밖에요. 나도 그 양반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라 M씨가 알고 있는 책들 밖엔 아는 게 없습니다.
다만 내가 프랑클 박사의 로고테라피 책에 관한 나름의 감상문을 적어둔 웹페이지를 알려주겠습니다: http://myfaith.co.kr/book-1/logotherapy.htm
그저, 심심풀이로 한 번 찾아가서 읽어보기 바래요. 또, 심신의 병을 앓고 있는 주변의 친지들을 위해서 내가 쓴 글 하나를 소개해보겠습니다 - 물론 이도 역시 심심풀이로 취급하기를: http://myfaith.co.kr/2004/disease.html
프랑클 박사의 원전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M씨가 바라는 책을 소개해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혹시 몸의 병과 더불어 마음에 고통을 주는 병에 관해서 이렇게 메일로나마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하다면, 그에 응할 용의는 충분히 있습니다. 내가 감히 무슨 치유의 방안을 제시하겠다는 게 아니라, 제3자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의 병의 치유의 시작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봐서 하는 말입니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과 무관하지 않다면, 몸의 병은 현대 의술에 맡긴다 하더라도, 마음의 병은 자신의 정신의 힘으로 치유해보려는 마음을 갖는 게 결코 무모한 일이 아닐 겁니다. 편한대로 연락해요.
온전한 치유와 빛나는 삶을 기원합니다.
혹시 내가 종강 때 이런 얘기 안했나요?: '한 번 선생은 죽을 때까지 선생이다'고. 미국의 내 은사들께서 나한테 그렇게 대해주셔서 나도 선생으로서 뉘우친 바가 있고,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나를 찾는 제자들에게는 차별없이 성의껏 도움을 주려 합니다 - 뭐, 당연한 선생의 자세지만.
윤동주가 말하는 슬픔은 아주 깊은 의미의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시인 고은도 슬픔이 인간 감정이 도달할 최고의 단계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센티멘탈한 슬픔과는 다른 것이겠죠. 맨날 철학책을 들여다보는 나로서는 '존재의 슬픔'이라는 어려운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의 기저에 슬픔이 있다는 얘기죠. 우주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믿는 신앙인으로서 존재의 밑바닥에 슬픔이 있다는 말을 하는 걸 사람들은 모순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나는 그 아릿한 슬픔과 사랑이 완전히 다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단, 슬픔이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우리를 존재의 본질에 대해 일깨우지만, 거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게 되죠. 어떤 목적을 눈치채게 되죠. 그런 목적의 깨달음의 차원에서 프랑클 박사가 '의미'의 부여를 실용적 방편으로 채택했다고 생각해요.
이런 건 다 이론적인 얘기고, 암튼 나한테도 좋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으니 M씨의 마음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은 사람에 관한 내 글을 심심할 때 참고하기 바래요: http://myfaith.co.kr/2004/most_important.html
물론, 나도 그런 비극을 겪어봤습니다만.
쾌유를 믿어요.
나는 '신앙인'이지만 종교가 없습니다.
욥기에 대해선 칼 융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신이란 실제로는 인간 내면에 있는 성질이 역사 속에서 형상화된 것이고, 따라서 그 신을 (욥처럼) 원망하는 것은 그저 원망할 그 누군가를 찾고 싶은 인간적 욕구의 반영일 뿐이라는. 재앙과 비극은 언제나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재앙과 비극의 원인을 인간적으로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재앙과 비극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인간이 욥기와 같은 '은유'를 만들어냈다는 해석이죠. (하지만 욥기의 결말은 억지스럽죠. 버지니아 울프가 '욥기에는 하느님이 잘 안보인다'고 고백한 것에 동의해요.)
이같은 '인간이 역사적으로 만든 신'이란 관점에 동의하면서 어떻게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부르냐구요? '인간이 만든 신'(A)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신'이 가리키고 있는 바(B)가 내가 믿는 신입니다 - 따라서 당연히 '인격 신'이 아닙니다. A가 B를 제대로 가리키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것은 지식뿐만이 아니라, 철학, 삶의 체험과 명상, 그리고 초월적 통찰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철저히 내 의견이고, 이를 순진한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별로 권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물었기에 성의껏 답했을 뿐입니다.
신이 뭔지는 나도 잘 모릅니다. ^^
신을 믿은 M씨의 동생은 프랑클 선생처럼 자신의 아픔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었겠죠, 배우기 위해 아프다구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본인이 알아서 하는 것일 뿐, 제3자가(부모, 형제도!)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문제가 못 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아무튼, 난 동생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만큼 평화를 얻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인간이 만든 신이 가리키고 있는 바'가 내가 믿는 신이라고 했죠? 많은 신앙인, 구도자들이 그렇게 증언하듯이, 신은 사랑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사랑이 뭐냐구요? 사람의 말과 글로 설명이 불가하죠. 우주의 '도'를 어떻게 문자로 설명하겠습니까? 예를 들을 수밖에 없죠, 예수와 붓다가 그리 하셨듯이. 숭산이라는 몇 해 전 타계하신 고승은 사랑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 숭산]의 달마톡이 다 끝나갈 즈음, 옆에 있던 금발의 여자가 쓰님에게 물었다. 내기억으로 그 여자는 하바드대학 박사반에 재학중인 30전후의 학생이었다.
"홭 이스 러브? (What is love?)"
숭산은 내쳐 그 여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었다.
"아이 애스크 유, 홭 이스 러브? (I ask you: what is love?)"
그러니까 그 학생은 대답을 잃어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숭산은 말하는 것이었다.
"디스 이스 러부(This is love)."
그래도 그 여학생은 뭐라 할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학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동안의 숭산은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유 아스크 미, 아이 아스크 유. 디스 이스 라부(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김용옥 선생의 글입니다. 뭔가 감이 잡힌다면, 그럼 좋습니다.
신은 숨어 있겠죠. 다 드러낼 거면 뭐하러 이런 세상이 있겠어요. 신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은, 결국 신을 구하는 길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 팔자죠. 철저히 자신 혼자 알아서 찾아가는 길이어서, 내가 주제넘게 이래 찾고, 저래 해봐라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제3자로서의 관찰을 말해줄 수는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M씨는 신을 구하는 길로 향하게 될 조짐이 많이 보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현재의 시련에는 '담금질'이라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죠. 굳이 신을 인격적으로 표현하자면, '훗날 크게 쓰시려 함이다'라고도 하더군요.
너무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게 주제넘은 내 조언이예요.
평화를 빌며.
- 한석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