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08

괴짜 목사의 별난 책사랑 - 사재 털어 오지 곳곳 '작은 도서관' 선물

한 목사가 있다. 사재를 털어 수십 군데 산골 오지에 책을 보내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주고 있다. 아름다운 선행이다.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은 뒤 종교에 귀의한 과거사도 있다. 코끝 찡한 사연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는 순천 김씨 종친회 부회장이다. 목사인데도 제사 지내고 절하는 데 거리낌이 전혀 없다. "목사 되기 전 자주 가던 술집의 마담이 예배를 보러 와 얼굴이 화끈거렸다"는 얘기를 털어놓을 만큼 솔직하고 담백하다. "내 인생의 화두는 파격"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형화된 목회자와는 거리를 보이는 사람. 김수연 목사(59·한길교회)다. 이번 주 week&은 김 목사의 굴곡 깊은 인생 역정을 슬며시 들여다 봤다.

'좋은 책 읽기 가족모임' 대표인 김 목사가 지금까지 전국 방방곡곡 작은 도서관을 지어준 곳은 족히 50곳이 넘는다. 한 군데에 보통 3000권이 넘는 책을 보냈으니 어림잡아도 20만 권에 이르는 책을 보낸 셈. 책은 대부분 신간을 따로 샀다. 당연히 책값으로만 얼추 십수억원이 들었다.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돈이 어디서 났을까, 어디 구린 돈은 아닐까 색안경을 끼고 보곤 하죠. 아마 제가 그 돈으로 집 사고, 땅 사고, 차 샀으면 그런 의심 안 했을 겁니다. 보통 사람들이 재산 모아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처럼 전 한푼 두푼 모아 몽땅 책에 투자한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사실 그랬다. 그는 교회 헌금엔 전혀 손을 안 댔다. 대신 목사가 되기 전 모아 놓은 재산을 '곶감 빼먹듯' 빼내 책에 쏟아 부었다.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책을 산 적도 있었다. IMF 때 일이다. 주변에서 "경기가 너무 어려우니 그냥 넘어가자"고 말렸다. 하지만 "여유 있어 주변을 돕는 건 호사다. 어려울수록 이웃과 나누는 게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며 강행군을 했다. "책에 미쳤다"란 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왜 책이냐고요? 미국 사람이 얼마나 책을 읽는 줄 아십니까. 일본 사람의 독서량이 얼마나 대단한데요. 전 한국이 미국, 일본보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기 위해선 책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기사 딸린 자가용 탔던 '불도저 기자'

김수연 목사는 본래 방송기자였다. 1975년 충주MBC를 시작으로 동아방송.KBS를 거쳤다. 교통부를 출입하던 84년, 그는 기내에서 방한 중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단독으로 인터뷰해 특종상을 받기도 했다. 100㎏이 넘는 거구를 이끌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 취재를 위해선 때론 주먹다짐도 서슴지 않는 근성. 그에겐 '불도저'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수완도 좋았다. 한양대 영문과 재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책 외판원'을 했다. 당시 동문 선배가 많이 내려간 울산 공단으로 무작정 내려가 "선배님, 술 한 번만 사 주십쇼"라며 찰싹 엉겨 붙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재롱을 떨자 "서울에서 걸물 후배가 내려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이후론 일사천리, 책 한 질을 사준 선배가 단박에 100명을 넘었다. 지폐로 가득 찬 대봉투 20여 개를 들고 서울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1년여 외판원으로 그가 모은 돈은 억대에 육박할 정도였다. 70년대 초반 당시로선 엄청난 액수였다. 그 돈을 그는 주식에 모조리 부었고, 주식은 10배 이상 뛰었다. 덕분에 그는 조그만 중소기업 운영에도 관여했다. 방송기자였지만 그는 기사 딸린 자가용을 끌고 출입처에 나가곤 했다. 보도국 선배들의 눈총도 콧등으로 흘렸다. 부러울 것 없던 시절, 그는 '잘 나가던 김 기자'였다.

84년 12월 19일. 일곱 살이 채 안 된 그의 둘째아들이 라면을 끓여 먹겠다며 가스불을 켜다 그만 불을 내고 말았다. 아내가 교회에 가고 아무도 없는 새였다. 황급히 응급실로 실려갔지만 때는 늦었다.

둘째아들의 갑작스런 사고는 한 집안을 산산조각 냈다. 그는 아내와 이혼 도장을 찍었다. 술에 의지해 방황하던 시기, 주위에서 종교를 가져 볼 것을 권했다. 절에도 가고 성당에도 가봤다. 교회는 끔찍이 싫었다. 아들이 죽은 게 교회 간 아내 탓이라는 원망 때문이었다.

그의 사촌동생은 당시 개척교회 목사였다. 그저 동생을 한번 보러 교회에 가 보았다. '피 같은 교인들 돈 뜯어내 엄청 잘살겠지'라는 선입견과는 전혀 달랐다. 동대문 부근 허름한 건물 2층에서 동생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경건한 생활을 이어갔다. 문득 동생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돕고 싶었다. 냄새 나는 화장실 청소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요일 새벽마다 몰래 교회로 갔다.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봉사' '타인'이란 단어가 아로새겨졌다.

마흔에 신학대학 진학 '제2의 인생'

어느 날 화장실 청소를 하던 중 낯선 사람이 올라왔다. 신자처럼 보였다. 그는 부끄러움에 급히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 사람은 볼일을 보곤 치우지도 않고 화장실을 나가 버렸다. 성질이 났다. 다시 청소를 해야 할 판, 홧김에 물을 와락 부었다. 그런데 그만 똥물이 그의 몸으로 다시 튀겨 왔다. 허겁지겁 근처 세탁소의 문을 두들겼지만 새벽녘 셔터는 올라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서 옷을 벗고 대충 빨래를 했다. 그 옷을 입고 밖에 나오는데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대폿집을 찾았다. 그리곤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내가 성질만 안 부렸어도, 조금만 참았어도 똥물을 뒤집어쓰진 않았을 텐데…. 문득 내 불행의 모든 책임이 내가 아닌가 싶었던 거야. 남이 아니라. 그리고 이런 게 하늘의 뜻이 아닌가도 싶었어. 다음 날로 바로 짐 싸서 신학대학을 찾아갔지."

신학대학 졸업 후 그는 목회자가 됐다. 그냥 말씀을 전파하는 것만으론 성이 안 찼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다 외지 문화 소외지역에 책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무료로 새 책을 볼 수 있으니 아이들도, 어른들도 좋아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초창기 시골 주민들은 시큰둥했다. "그냥 돈으로 주시면 안 될까요?"란 반응이 가장 많았다. 실컷 책을 싸서 조그마한 도서관을 만들어줘도 1년만 지나면 엉망진창이었다. 씁쓸하고 섭섭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냈다.

도서관을 개관하는 날, 그는 아예 마을 잔치를 열었다. 막걸리도 준비하고, 전도 부치며 주민들을 끌어 모았다. 미용사도 데려가 어른들 머리도 무료로 깎아줬다. 사람들이 모이고 좋아했다. 아이들은 그가 맡았다. "얘들아, 나폴레옹 본 적 있니?" "아니요." "아저씬 나폴레옹 본 적 있는데…" "정말요, 어디서요." "어디긴 어디야, 바로 책이지." 아이들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는 근엄한 목사님이 아니라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였다.

책 한권 못 읽고 떠난 둘째를 위해

그는 종친회 일로 한 달이 멀다 하고 제사를 지낸다. 주변에서 "그래도 목사인데…"라며 말려도 소용이 없다. "아니 하나님이 부모님 공경하라고 했잖아. 제사도 마찬가지라고. 그걸 우상 숭배로 보는 건 한국문화를 무시한 형식주의에 불과한 거야."

그는 기존 교회의 권위주의에 대해 쓴소리를 많이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겉으론 거칠지만 '속 정은 깊은 사람'이란 게 주위의 한결같은 얘기다. 그래도 그가 왜 그토록 책에 집착하는가는 의문으로 남았다. "이 얘긴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둘째 세상 떠날 때까지 책 한 권 보지 못했어. 그 애가 못 본 거 다른 애들이라도 실컷 보게 하자. 애들이 책 들고 마냥 좋아하면 난 둘째가 살아 돌아오는 것 같아." 어느새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들이 하나 둘 떠나 텅 빈 교실은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너무나 많은 걸로 채워졌습니다. 지난주 3000권의 책이 학교에 오는 순간, 전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역사책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책을 그저 읽지 말고 나눔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커서 어려운 이웃에게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는 어른이 되겠습니다."

최근 전남 보성 웅치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좋은 책 읽기 가족 모임'에 보내온 편지의 일부다. 김수연 목사가 만든 '좋은 책 읽기 가족 모임'은 문화 혜택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산간 벽지, 농어촌, 섬마을 등에 책을 보급하자는 취지로 1987년에 만들어졌다. 91년 지리산 뱀사골 초입 남원군 산내면에 '원천 마을 도서관'을 건립한 것을 시작으로 18년 동안 50여 군데 외지에 책을 보내고 작은 도서관을 지었다. 92년엔 연변과학기술대에 4만 권을 기증하기도 했다. 복지시설.교도소.구청 등에도 꾸준히 책을 보내고 있다.

도서는 대략 어린이용 60%, 어른용 40%로 나뉜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도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교육용 만화다. 변현주 사무국장은 "단지 책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동화 구연, 과학 마술, 인형극 등의 문화 행사도 함께 진행해 마을 주민들의 관심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줄곧 김 목사의 사비로 도서 비용을 대 왔으나 2000년대 들어선 후원자들도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단다. 최근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1억 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후원은 돈이 아니라 자신이 보던 책을 기증하는 것으로도 가능하다.

02-515-1178.

- 중앙일보, 2005.6.24

'미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