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우리 나라 음악과외의 문제점

저는 어렸을 적 피아노 교습을 한 3년 쯤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십대에 들어서서는 취미삼아 줄곳 혼자 피아노를 쳤습니다. 악보도 제대로 볼 줄 모르지만, 한 번 들은 대중음악 곡은 스스로 편곡해서 다 칩니다. 공식 석상에서 엔터테이너로 연주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고, 피아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프로 피아니스트인줄 알 정도로 곧잘 칩니다. 저 홀로 있을 때, 평화로운 마음으로 느낌을 담아 피아노를 치면, 단순한 나의 기분이나 감정을, 뭐랄까, '우주'라고 하면 좀 거창하고, 아무튼 내 밖의 세상과 교환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청중 앞에서 연주하면, 저의 내부가 외부 세계와 교환하는 그 감정을 제삼자와도 교류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신께서 저에게 허락해주신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저는 악보 보는 법은 물론이거니와 기본적인 화성법, 기타 등등 무슨 법들을 모릅니다. 마음에 드는 곡 하나를 잡고 편곡해서 쳐볼 때 제가 의존하는 것은 오직 내가 두드리는 음이 전해주는 느낌 뿐입니다.

혼자 피아노를 두드리고 독학한지 어언 십오년 쯤 지났을 때, 아아, 피아노는 이렇게 치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건, 곡 하나 하나마다 그 곡만이 표현해줄 수 있는 전체적인 느낌과 리듬과 흐름이 있는데, 그것을 담아내서 건반에 옮기면 되는 거로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제가 의존하고자 했던 이런 저런 이론이라든가, 또는 선생님들의 도움말들은 거의 전부 기계적이어서, 저로서는 따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마치 고등학교 때 멋있는 글 한 편을 속속들이 문장, 문구, 어간, 어미까지 분해하고 분석해서 도대체 그 글이 원래 가졌었던 맛이란 게 무엇인지 짐작도 못하게 만들어놓곤 하던 수업을 끝없이 받았던 것과 같이, 아무리 멋진 곡이라도 그 곡의 부분부분들을 만드는 음표와 쉼표 같은 것들에 집중하다보면 도대체 그 곡이 원래 주기로 되어있었던 감흥과 느낌이 무엇인지 완전히 놓쳐버리기 일쑤였습니다. 한 마디로 김빠진 맥주나 마찬가지죠.

그때 스스로 체득한 것을 누구와도 제대로 나누지를 못했습니다. 음악에 있어서 저는 워낙 제대로 배운 게 없는 '딴따라'였는데다, 전 다른 일로 바빴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 이후로 저의 피아노 연주는 내적인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아무리 대중음악이지만, 각각의 곡이 내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리는 그 느낌을 곡 전체의 흐름으로 표현하려고 제 마음을 담다보면 매우 아름다운 새로운 곡으로 재탄생하곤 했습니다. 건반 한 번 한 번 두드리는 데에 제 마음을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전문가의 귀로 들으면 거칠고 투박하기 그지없는 터치이고 기교일런지도 모르지만, 피아노 치는 것은 저에게 깊은 침잠과 휴식을 동시에 제공하는 아주 귀중한 자산이 되었답니다. 실로 피아노 연주가 제 인생의 질감을 아주 풍부하게 해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요? 자녀를 교습소에 보내거나, 자신이 최근에 배워보았거나, 아니면 현재 피아노 교습을 하고 계신 선생님들께서는 아실 겁니다. 피아노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 '책 떼는 것'이 그 목적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마치 남들보다 먼저 다음 학년 교과서를 떼고 전진해야 흡족해 하듯이, 바이엘, 체르니 하면서 빨리 빨리 책 떼는 것... 혹시, 동요 한 곡이라도 그 곡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만이 받은 그 느낌을 건반으로 옮기도록 도와주는 피아노 교습을 제공해주는 곳이 있을까요? 있다면 제 딸을 보내고 싶습니다. 책 떼는 것 vs. 자신만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 이것은 우리 나라의 교육 전체가 처해있는 최대의 도전을 압축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전자에 집착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배움이 포함되지 않은 '진도 나가기'는 무의미합니다. 무엇하러 진도를 나갑니까? 반드시 양자 사이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군중이 그 균형을 잃고 있으면 개인이라도 깬 정신으로 그 균형을 되찾아야지요. 내 인생인데. 내 자식 인생인데. 다 한 번 주어진, 비할 데 없이 귀한 인생인데.

저는 조금 극단주의자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후자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그러나 요즘 같은 언밸런스 속에서는 저같은 극단이 좀 필요하다고 봅니다.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왜 교육을 받는가, 왜 피아노를 배우는가의 질문에 있어서도. 진도 나가고 남보다 앞서 가서, 설혹 결과적으로 명문대를 갈 수 있게 된다 하드라도, 그것이 과연 한 인간의 인생 전체라는 큰 맥락에서 갖는 가치는 무엇일 것이며, 인간으로서 이곳에 태어난 존재의 목적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런 성찰 위에 '진도'냐 '본질'이냐를 재고해봐야 합니다. 어린 시절의 피아노 렛슨과 같은 단순해 보이는 것에서도.

피아노를, 아니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후자 - 본질 - 쪽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후자가 전자 - 진도 - 를 이끌어야 합니다. 자신의 느낌을 음으로 표현하는 것을 즐기다보니 책도 한 권씩 떼어 가게 되고, 실력과 기교도 늘게 되고 하는 것이 정도이고, 본질이고, 진짜 실력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임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인물로 비치고 있는 김용옥 선생이 절규하는 그 '실력,' 그 진짜 실력은 후자가 전자를 이끌 때 나옵니다.

자, 그럼 저의 열변을 뒷받침해줄 음악교육의 권위자 한 분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기악 교습은, 단순히 악기로 익히는 기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반드시 음악성의 가르침이어야만 한다. 음악성을 가르친다는 것이 인간의 성찰의 한 형태이고, 악기 연주의 입문자는 그 입문하는 첫 날부터 '음표 등등의 것들'이 아니라 이 인간의 성찰을 전수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신봉하지 않는 이상, 음악을 가르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직관적인 반응 없는 편협한 기술적 차원 만에 대한 분석은 아무 결과도 창출해내지 못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그렇게 많은 기악 학생들이 [중도에] 그만 두는 것이라고 본다. 나의 저서,'음악과 정신과 교육 (Music, Mind and Education)'에서 나는, 분석과 직관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균열을 교습과 만남(encounter) 사이의 긴장으로 특징지운 바 있다.

이러한 교습과 만남 사이의 긴장은 불가피하면서도 풍부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뚜렷하게 모순된 인간 학습의 양면은 교육적인 교환의 기류가 흐르는 양극과 음극이다. 만남과 교습은 음악성의 나선형 구조의 왼쪽, 오른쪽과 각각 일치하고, 음악적인 경험의 자연스러운 썰물, 밀물과도 각각 일치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조작 기술과, 전문화 된 관습과, 스타일의 전통과, 체계적인 절차 등을 습득하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진도를 나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학습은 보다 쉽게 체계가 잡히고, 질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왼쪽을 특징지워주는 것은 만남이다. '왼쪽'이 포함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감각적인 인상, 개인적인 표현, 구조적인 사색, 그리고 상징적인 숭상.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학생은 다양한 가능성들을 품에 안은 채 혼자 남겨져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 가능성들은 대체로 교습이 제공해준 틀 덕분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왼쪽과 오른쪽의 다이나믹한 관계를 수용하지 못하는 음악 교육의 이론과 실제는 우리가 한 손으로 손뼉치려는 헛수고나 하게 만든다. (Swanwick, 1988: 135)

첫째 법칙: 음악성 없이는 렛슨 없다. 음악성은, 소재로부터 받는 흥(delight)과 소재를 장악하는 것, 표현력의 고양된 자각, 그리고 가능하다면, 훌륭한 형식에서 나오는 흥을 뜻한다. 음악성 없는 렛슨은 시간 낭비이고, 잘못된 가르침을 학생에게 주게 된다. 즉, 때로는 음악성 없이 연주하는 것도 타당하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그것은 절대로 타당하지 않다.

둘째 법칙: 언제나, 분석적으로 파악함에 앞서서 직관적인 통달을 목표로 삼아라. 적어도 태초에는, 악보를 만들어내기 전에 음악이 자유롭게 흘러나와야 했었다. 매번 연주할 때마다 인쇄본의 제한된 분석을 눈앞에 두고 볼 필요는 없다. 청각으로 깨치는 것이 먼저 일어나고, 그것이야 말로 음악성의 초석이요 진실한 기초이다; 동시에 그것은 음악적 지식의 최종 목표이다.

셋째 법칙: 학생을 뒤에서 밀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또한 끌어당겨 주기도 해야 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에 빨려들어갈 수가 있다.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학생들을 위하여 잘 연주해주고, 학생들과 함께 잘 연주할까? 음악은 발명일까? 학생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이 인간 정신을 앙양하는데 기여한다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음악과의] 만남 없는 교습, 직관 없는 분석, 미적인 쾌감 없는 예능의 손재주, 이런 것들은 교육적 재난을 만들어 내는 지침서이다. 무의미한 행동은 아무 행동 안하느니만 못하고, 혼란과 무감각 상태로 이끌 뿐이다. 반면에 의미는 의미를 내재한 모델과 동기를 창출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교사로부터 학생을 자유롭게 풀어 놓는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학습을 스스로 이끌어 나가게 된다. 다른 방식은 없다.

- Keith Swanwick, "Some Observations on research and music education," in Gary Spruce, ed., Teaching Music (London: Routledge, 1996), pp. 249-50 [번역: 한석훈].

저의 '극단적'으로 보이는 본질에 대한 집착을 이 스완윅이라는 음악교육의 권위자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가는 길이니, 내 자식도 편하게 그 길로 가게 해주기 위해서 '진도'를 나가는 교육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인생의 깊은 의미'라는 차원에서 볼 때, 그런 길의 끝이 너무 뻔하게 초라하므로, 몇 사람 가지 않는 험하고 좁은 길로, 본질의 길로 내 자식을 이끌어 줄 것인가 하는 매우 어려운 결단을 부모들은 내려야 합니다. 어린 시절의 피아노 렛슨과 같은 단순해 보이는 것에서도.

그런데, 과연 전자의 길이 편하기는 한 걸까요? 저는 그것을 심각하게 회의합니다. 후자만큼이나 전자도 가시밭길 아닐까요? 인생은 고해 아닙니까? 어짜피 그러할진대, 이왕이면 본질적인 후자를 택할 것을 저는 결심했습니다. 당신의 결정에 참고 삼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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