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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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 이후]“가정은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필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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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손(順孫)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연대와 살던 곳은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 중엽 때의 사람인 듯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남의 일을 돌봐주면서 근근이 연명해 살아갔다. 곤궁한 살림을 계속 하면서도 그들 부부는 늙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만은 지극했다. 순손에게는 이런 아들 하나가 있었다. 이 어린 아이는 순손이 자기 노모에게 드리려고 간신히 마련한 음식을 곧잘 먹어버리기가 일쑤였다.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겠지만 한두 차례도 아니고 몇 번이나 이런 경우를 당한 순손은 생각다 못해 아내와 의논하는 것이다. “여보 큰일이로구려. 푼돈을 모아 간신히 마련해 온 음식을 저 어린 것이 번번이 먹어 없애니 이걸 어떡하면 좋단 말이오? 아이는 다시 낳을 수도 있지만 늙은 어머니는 한 번 돌아가시면 영영 그만이 아닌가? 어린 것만 없으면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릴 수가 있는데….” 이렇게 의논하고서 순손 내외는 철모르는 어린 것을 업고 뒷산 후미진 곳으로 올라갔다. 어린 것을 땅 속에 생매장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땅을 한 길이나 파고보니 거기에서 뜻하지 않은 종(鐘)이 하나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순손 내외는 하도 이상해서, “여보, 이런 신기한 물건이 나왔으니 이것은 아마 이 아이의 복인가 싶소. 그대로 데리고 갑시다.” 하고 어린 것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 내외는 이 신기한 종을 대들보에 달고 한 번 쳐보니 그 소리 웅장하여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 당시 임금의 귀에까지 이 소리가 들려 연유를 묻고, 이내 순손 내외의 효성을 알게 되어 이것을 가상히 여긴 임금은 후하게 상을
주어 마음껏 노모를 봉양하게 해주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오늘날의 윤리관으로 보아서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으나 당시의 순손 내외의 그 지극하고 간절한 효성만은 깊이
찬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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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c
공립학교 형성 배후의 최초 원인 및 움직임:
근대 공교육 체제 수립 과정의 주요 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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