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가족의식이라는 근대적 의식이 얼마나 철저하게 사회성을 희생시

켜가며 발달했는가를 보여준다 ... 17세기 말부터 가족이라는 세포

내에서 아동의 독자성과 모성애에 대한 자각이 출현하고 이와 더불

어 아동기에 대한 진정한 발견을 보여주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시

작되었다. 1760년대에 그러한 변화는 가속화되었고, 마침내 보편화

되었다. 동시에 ‘학교 교육’이라는 아이들의 오랜 ‘감금 과정’

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장기간의 구속, 즉 학교 교육의 발달은 아

이들을 도덕적으로 보호하고 바르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는 부모들

의 새로운 인식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17세기 말 이후]“가정은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필수적

인 애정의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애정은 이후 특히 교육에 할애된

공간에서 표현되었다. 그것은 아이들을 더이상 재산이나 명예라는

기능으로만 간주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감정이었다.”
 

 

 

 

 

 

 

 

 

 

 

 

 

 

 

 

 

 

 

 

 

 

 

 

 

 

 

 

 

 

            

 

                             

 

 

 

순손(順孫)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연대와 살던 곳은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 중엽 때의 사람인 듯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남의 일을 돌봐주면서 근근이 연명해 살아갔다. 곤궁한 살림을 계속 하면서도 그들 부부는 늙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만은 지극했다. 순손에게는 이런 아들 하나가 있었다. 이 어린 아이는 순손이 자기 노모에게 드리려고 간신히 마련한 음식을 곧잘 먹어버리기가 일쑤였다.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겠지만 한두 차례도 아니고 몇 번이나 이런 경우를 당한 순손은 생각다 못해 아내와 의논하는 것이다.

“여보 큰일이로구려. 푼돈을 모아 간신히 마련해 온 음식을 저 어린 것이 번번이 먹어 없애니 이걸 어떡하면 좋단 말이오? 아이는 다시 낳을 수도 있지만 늙은 어머니는 한 번 돌아가시면 영영 그만이 아닌가? 어린 것만 없으면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릴 수가 있는데….”

이렇게 의논하고서 순손 내외는 철모르는 어린 것을 업고 뒷산 후미진 곳으로 올라갔다. 어린 것을 땅 속에 생매장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땅을 한 길이나 파고보니 거기에서 뜻하지 않은 종(鐘)이 하나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순손 내외는 하도 이상해서,

“여보, 이런 신기한 물건이 나왔으니 이것은 아마 이 아이의 복인가 싶소. 그대로 데리고 갑시다.”

하고 어린 것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 내외는 이 신기한 종을 대들보에 달고 한 번 쳐보니 그 소리 웅장하여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 당시 임금의 귀에까지 이 소리가 들려 연유를 묻고, 이내 순손 내외의 효성을 알게

되어 이것을 가상히 여긴 임금은 후하게 상을 주어 마음껏 노모를 봉양하게 해주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오늘날의 윤리관으로 보아서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으나 당시의 순손 내외의 그 지극하고 간절한 효성만은 깊이 찬양할 만하다.

- 명심보감, 올재 고전, 40쪽

 

 



유럽의 새로운 세대의 부모들 간에 자녀를 위한 교육시설에 대한 수요가 증대한 것 이외에도.....

 

17~18c 공립학교 형성 배후의 최초 원인 및 움직임:

16c 종교개혁, 평신도 성경독해 추구 → 근대교육 수요 증대

18~19c 근대적 국가체제의 관료 인력 필요 →     "

19c 산업혁명의 인력수요 →                     "

 

 

 

 

 

근대 공교육 체제 수립 과정의 주요 법령

- 1642 독일의 고타 공국, 미국 매사추세츠 주: 공립, 보통, 의무 교육 법안

- 1717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의무 취학령

- 1763 프랑스 법관 샬로테: 국민교육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