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육의 역사


학문으로서의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중심으로 인간과 세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로, 인간의 인지 활동의 매우 기본적 방식이라 하겠다. 즉, 인간은 자신 앞에 펼쳐진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현재의 이 세상을 형성한 과거의 궤적을 자연스럽게 살피게 되는데, 이는 현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 작용이 시간의 차원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 타인을 처음 만나서 사귀게 될 때, 그의 과거에 대해 많이 알고 싶어 하고, 그의 과거를 소상히 알게 됐을 때 현재의 그를 잘 이해한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한 마디로, 시간의 축 위에서 현재의 세상의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역사학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이든, 서구 선진국이든 할 것 없이, 역사라는 학과목에서 주로 사실(史實)의 암기를 강조해왔다. 따라서 나이 어린 학생들은 역사를 ‘암기 과목’으로 여겨왔다. 학생들은 끝없이 많은 사람과 장소와 사건과 연대를 암기할 것을 교육과정에서 요구받는다. 허나 실제 역사학자가 자신의 연구 활동을 암기에 바치지는 않는다. 무조건적인 암기는 학습자의 다양한 인지·학습 활동 중에서도 수준이 낮은 활동에 속한다. 이처럼 사실 암기에 중점을 둔 역사 공부가 학생들의 지적 성장을 위해서 기여하는 바가 미미하거나 아예 전혀 없다는 비판이 대두되면서, 서구의 여러 나라들은 20세기 후반 이래로 서서히 ‘역사하기’의 개념을 자국의 학교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의 암기를 목표로 삼지 않고, 학생들로 하여금 과거의 사건을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재구성해보도록 유도하는 작업이다. 1980년대에 미국의 초등 및 중등교육에서 발생한 역사교육의 전환과 1990년대 프랑스 중등학교의 역사 과목에서 일어난 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역사하기’는 학생들이 사료(史料)를 수집하여 능동적으로 자신만의 역사 해석을 구성하는 작업을 강조했다. 실은, 이와 같은 작업은 실제 역사학자들이 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근대화와 한국 여성’이라는 주제를 갖고 ‘역사하기’ 과제를 수행한다고 하자. 그는 일단 그 주제에 관하여 제한된 시간과 공간 내에서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구해야 한다. 대체로 역사학자의 자료는 1차 사료(primary source)와 2차 사료(secondary source)로 나뉘는데, 전자에는 당대의 현상, 또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관찰하거나 설명한 모든 자료들이 포함된다. 직접 목격한 이의 증언, 신문 기사, 일기, 서신, 사진, 그림, 영상 자료, 정부 기밀문서, 법정 기록, 회의록, 센서스 통계 등등이 다 이 범주에 포함된다. 전자의 가치가 후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데, 이는 2차 사료가 특정 개인의 편향된 시각에 의해 한 차례 걸러진 해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학생은 근대화가 태동하던 20세기 초반에 여성의 삶에 관해 다루고 있는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1차 사료를 수집하여 섭렵한다. 그 후에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역사학자들의 동일 주제에 관한 저술, 즉 2차 사료를 참조한다. 자료 조사가 끝난 후에는 당대의 여성의 삶의 변화에 대한 관찰 사항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를 글로 옮긴다. 이런 작업을 통해 학생은 근대화 과정 속의 여성의 삶의 변화에 대해서 주관적이고 심도 있는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비전문가인 학생의 이러한 해석은 무엇보다도 자료의 불충분으로 인해 부정확성을 함유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이 능동적으로 과거 시대상을 구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학생의 역사적(historical)1) 인식 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학생 개개인의 해석의 편향성은 교사가 지도·수정해주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 나름의 시각을 형성한 학생은 자신이 그간 조사한 분야의 여러 정보를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의 암기는 이러한 학습과정의 부산물로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교육의 역사에는 일반적으로 여러 분야들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과 관련된 교육사를 지역을 기준으로 구분하면 한국교육사, 동양교육사, 서양교육사 등등을 거론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학교들은 서구화 돼있다. 그러나 현재의 서구화된 학교는 일제 강점기의 제국주의적 학교의 토대 위에 형성됐고, 후자는 또 다시 그 전대의 유교적 교육, 또는 동아시아에 고유한 전통적 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성립됐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의 우리의 교육을 역사라는 렌즈를 활용함으로써 잘 이해하자면, 우리는 한국교육의 역사만도, 서양교육의 역사만도 아닌, 보다 지역적으로 폭넓은 교육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의 학교교육의 모습은 순전히 서구적인 것도 아니고, 순전히 유교적인 것 또한 당연히 아니어서, 그것들 모두의 원천을 살펴보아야 그 전모의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오교수의 지도 아래 유진은 앞으로 약 반년 동안, 교육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더불어 한국교육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공부를 병행하기로 했다. 이런 공부를 통해 기대하는 바는 다름 아닌 현재의 한국교육에 대하여 깊은 이해에 이르는 것이다. 한국교육의 역사적 근원을 크게 동양과 서양으로 분리하여 다루되, 번쇄한 사상적 사조를 낱낱이 분석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현재의 한국교육의 핵심적인 양상들의 배경원인이 됨직한 동서양의 주된 교육적 변화와 발달을 집중적으로 탐구해보기로 했다. 한국교육의 동양적 기원으로는 주로 유교 교육에 중점을 둘 것이고, 그 서양적 기원으로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교육 사상가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현재와 더 근접해 있는 근세로 소급해 올라오면서 구체적으로 일제 강점기의 교육 변화와, 해방 후 미군정기(美軍政期)의 변화도 살펴보기로 계획했다. 오교수는 이 두 시기의 변화에 대한 이해 없이 한국 전쟁 이후의 교육의 역사에 대한 가닥을 잡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현재의 한국 교육은 바로 직전 시대의 교육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과 역사는 물론 제각기 독자적인 학문의 분야다. 그러나 두 가지의 다른 분야를 통합함으로써 일궈낼 수 있는 이점이 적지 않다. 즉,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철학과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역사를 결합시킴으로써, 양쪽 분야에게 공히 이로움을 줄 수 있다. 일찍이 공자는 이론적 사변과 구체적 학습이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다는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學而不思 하면 맹목적이 되고, 思而不學 하면 공허하다.’ 이 경구의 ‘學’을 역사로 보고, ‘思’를 철학으로 본다면, 구체적 사실을 주로 다루는 역사만을 공부하면 사고가 맹목적이 되고, 추상적 이론에 천착하는 철학만을 공부하면 현실적 삶의 차원에서 공허함에 빠질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2) 특히 교육자를 양성하는 과정에 있어서 철학과 역사의 병행 학습은 가치 지향적이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사고 능력을 계발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을 엿볼 수 있겠다.


1)
영어 단어 historical(역사의, 역사상의)와 historic(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는 한국어로는 공히 ‘역사적’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김일성의 역사적 활동’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historical이라는 의미로는 별 문제될 소지가 없지만 historic의 의미로 보자면 그를 찬양하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 1990년대에 진보진영의 최장집 교수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역사적’이라는 어휘를 쓴 것을 이른바 보수언론이 historic의 의미로 쓴 것이라 주장하며 맹공세를 펼쳤던 것은 지겨운 용공시비의 재탕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영문 어휘에 대한 우리 현대어 어휘 수효의 상대적 빈곤을 보여준 사건일 지도 모르겠다.

2) 혹은, 전자가 자연·이공계열 학생들의 약점인 반면, 후자는 인문·사회계열 학생들의 약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축적된 정보와 지식은 탄탄한데 그 축적의 궁극적 지향을 모르는 경우가 전자이고, 별로 축적된 지식도 없으면서 말만 무성한 경우(‘구라가 센’)가 후자라 할 수 있다. 전자의 극단적인 예로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와 냉전시대에 핵폭탄 및 수소폭탄 제조 과정에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핵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식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미국의 오펜하이머와 소비에트 연방의 사하로프 등의 고뇌는 과학자의 자세에 대한 깊은 성찰의 재료를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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