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루소의 교육사상

      
1712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장 자크 루소는 가정교사, 급사, 악보전사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유럽 각지를 유랑했고, 평생 한 지역, 한 분야에 정착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사상을 좇으며 자유로운 삶을 영위했다. 그는 당대의 주류 지성 사조였던 계몽주의의 이성 존중 정신에 반기를 들어 감성을 통한 덕성 회복이 인간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 주장함으로써 한때 동지였던 백과전서파와 반목했고, 부르봉 왕조의 절대군주제도에 반대하여 『사회계약론』에서 민주주의 정신을 제창함으로써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길잡이가 됐으며, 정통 가톨릭의 인격 신 개념을 부정하고 이신론적(理神論的) 신관을 펼침으로써 바티칸으로부터 파문당하고 그 저서가 불태워졌으며 현상수배 되기에 이르렀다. 한 마디로 그는 당대의 모든 주류 시각에 반대함으로써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하겠다. 그러나 근세 유럽의 대표적 철인 칸트는 『에밀』의 출간이 프랑스 대혁명에 비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할 정도로 루소를 높이 평가했으며, 실로 루소가 후대의 정치사상적, 교육적, 심리학적, 문학적 발전에 끼친 영향력은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전범인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루소가 실은 부르주아의 한계를 가장 심각하게 비판한 인물이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성을 통하여 발견한 자아의 극대화가 이기주의적 부르주아를 양산하게 될 것이라고 본 루소는 에밀을 통하여 부르주아를 뛰어넘는 새로운 자율적 인간상을 제시하려 했다. 그는 『에밀』에서 현실로부터 유리된 지극히 추상적인 교육적 상황을 설정하여, 어느 상황에서도 일반화될 수 있는 교육의 원리를 전개했다. 『에밀』은 일반인이 그대로 따라하여 아동을 교육할 수 있는 실질적 지침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시각을 바꿔보려는 목적 하에 씌어진 철학서다.
      칸트는 루소가 에밀을 통해서 추구한 것이 ‘화해’라고 봤다. 완전하고도 선한 자연과 투쟁 및 편견으로 점철된 인간 역사 사이의 화해,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과 시민 사회의 의무 사이의 화해, 그리고 본능적 성향과 도덕적 책임감 사이의 화해 등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자 사이의 화해를 루소는 치유의 교육을 통하여 시도했다. 기실, 루소 그 자신이 모순 덩어리인 인물이고 내적인 ‘화해’가 필요해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의 내면에서 충돌하고 있는 모든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 전부가 인간, 또는 우주라는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화해’란 충돌하는 요소들 간의 조화를 모색함이고, 에밀의 교육 과정은 이러한 모색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런데 루소의 이런 화해 추구는 현대 심리학의 기초를 구축했다. 근대 초기까지 서구에서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 기초하여 인간의 미덕과 악행을 설명하는 방식이 우세했다. 즉, 정신과 육체의 상이한 요구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심리적 문제가 발생하며,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은 정신에 속한 이성의 지도하에 육체적 욕구들을 통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루소의 방식은 달랐다. 그는 ‘신과 맞닿은 선한 정신’과 ‘타락하고 악한 육체’라는 이분법에서 탈피하여 한 개인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영역의 과다 의존에 의해 초래된 인간의 전체성 또는 통일성의 상실에 주목했고, 인간의 심리적 문제들을 자아의 전체성 회복을 통해 치유하려 했다. 에밀은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주창된 것과 같은 태초의 전체성을 회복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할 것을 모색한 하나의 본보기와 같다.
      에밀의 교육은 고립된 상태에서의 개인교수와 사회에 진입하는 교육으로 나뉜다. 에밀에게는 학문적 지식이 제공되지 않고, 에밀은 자연 속에서 활동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과 사물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형성하도록 지도받는다.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개인의 잠재능력과 개성을 계발시키는 데 있었다. 루소는 인간사회에 발을 들여놓기 전의 순수한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의 본성인 자연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의 자연성은 자기애에 의해 표현되는데, 이 자기애에서 나오는 감각적 쾌락의 추구를 없애려 함은 어리석다고 봤다. 이는 신의 섭리에 반하는 것이다. 그 대신 이성과 양심에 귀를 기울여 ‘도덕적 자유’를 실천하는 경지로까지 발전하면 된다고 봤다. 또한 루소는 인간 내면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여 ‘본질적인 예배는 마음의 예배다’라는 주장을 폈던 바, 결국 『에밀』은 교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고 판매금지 및 분서에 처해졌다.
      그의 유아 교육은 가능한 한 성인과 교사의 간섭을 피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인간의 제재가 극소화한 ‘소극적 교육’으로, 자연 섭리의 작용의 극대화를 꾀한 것이었다. 스승인 루소의 권위도 성인의 우월함과 강압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스승과 학생 간의 상호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에밀은 스승에게 자신을 명령해 달라고 간청한다. 모든 인공적, 인위적 조작에 반대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주장은 당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넷은 궁전 안에 농가를 짓고 소젖을 짜거나 시녀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갈 정도였다고 한다.1) 스승 루소는 모든 책을 싫어했고, 특히 바이블을 싫어했는데, 에밀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전에는 단 한 권의 책, ‘로빈슨 크루소’ 만을 읽도록 했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가 문명, 또는 타인들의 견해에 의해 조건 지워지지 않은 자연인이고, 그 환경 안에서 자연을 활용하여 생존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묘사하며, 인간의 진정한 본래 모습을 보여준다고 봤다. 루소는 사회의 거울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독립된 교육을 지향했던 것이다.
      루소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근대시민혁명을 예견하고, 그 성공까지 확신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문제가 혁명의 성공이 아니라, 혁명의 성공 후에 새로이 건설된 사회를 구성하게 될 시민의 자질이었다. 특히 평등 이념 위에 세워질 새 사회에서 부르주아에 의해 초래될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부르주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될 시민 상으로 제시된 에밀은 인간의 존엄성과 전체적 인격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루소의 교육 사상을 페스탈로치(1746-1827)가 교육 혁신 실험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고, 이 실험은 헤르바르트(1776-1841)에 영향을 끼쳐 현대 교육학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에 프뢰벨, 몬테소리, 듀이 등에게 계승됐다. 이들 중 헤르바르트를 제외하고는 루소의 사상적 후계들은 모두 아동 내면의 ‘신성’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프뢰벨은 신인동질설(神人同質說)까지 제기했다. 인간 안에 내재된 신을 찾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루소에게는 내면의 성찰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안을 들여다봄으로써 현재의 자신의 표면적 모습, 또는 사회적 자아에는 드러나지 않는 잠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 이후 서양의 교육사상적 전통에는 이처럼 내면의 잠재성을 싹틔우고 끄집어내려는 노력이 지고의 이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1)
역사의 아이러니: 루소의 또 다른 저술인 ‘사회계약론’은 앙트와넷을 단두대로 보낸 프랑스 혁명의 성서라고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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