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루소, 서양, 그리고 현대의 교육

      
서양 문명의 양대 사상적 축을 이성과 과학적 정신의 모태가 된 헬레니즘(그레코 로망)과 신성(神性)과 종교적 사상의 근원이 된 히브리즘(유대-기독교)이라고 볼 때,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출현한 장 자크 루소라는 인물은 이러한 서양 문명의 양대 축을 한 몸으로 구현한 대표적 사상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루소라는 개인의 정신세계 속에는 헬레니즘적인 이성의 추구와 히브리즘적인 신앙의 추구가 혼재돼 있고, 루소의 내면에서 양자의 조화 또는 융합이 시도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루소의 이성 추구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유럽의 주지주의-계몽주의적 학문 사조를 비판하고 있으며, 그의 신성 추구는 중세 이후의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반기를 들고 있는 바, 그가 자신이 속해 있는 문명의 양대 축의 당시의 기조에 대하여 공히 의문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루소가 서양 문명의 양대 근본에 대하여 제기한 의문을 칸트를 비롯한 후대의 사상가들이 계승하였고, 이들이 나름대로 양대 축 사이의 타협을 도모한 결과 현대 서양문명의 정신적 본류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여러 사상사가들의 관찰입니다. 우리가 도입한 서구적 교육은 이러한 사상사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수업의 목적을 놓고 볼 때, 첫째 우리는 루소의 사상을 통하여 '서양'이라는 타문명의 깊이와 넓이를 조감해볼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 서양을 받아들인 우리 자신의 깊이와 넓이도 반추해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루소의 내면에서 발생한 '이성'과 '신성' 사이의 융합을 관찰해봄으로써 우리들 각자의 자아 성찰에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넓고도 깊은 서양의 문화와 사상 중에서 딱 요만큼만 골라서 유의미한 철학적, 교육적 연습을 해볼까 합니다. (동양과 마찬가지로 넓고, 깊고도 복잡한 서구 문명을 이처럼 달랑 두 개의 사상적 축으로 도식화하는 시도는 필연코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사전에 밝혀둡니다. 물론, 오류의 폐해보다는 사유 연습의 이득이 더 클 것으로 판단합니다.)
      칸트 이후의 서양 문명은 이성과 신성의 일견 평화로운 공존, 또는 철저한 분리 현상을 보여왔고, 이는 현재까지 지속돼 왔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즉, 이성을 도구로 한 자연과학은 독자적으로 찬란한 발전을 해왔고, 신성을 추구하는 기독교 정신은 과학과 별 충돌 없이 나름대로 존속돼 왔다는 말이지요. 과학 숭상 정신은 주로 학교 - 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 라는 사회 기관을 통해 계승되어 온 반면, 기독교 정신은 교회라는 기관을 통해 전해져 왔고, 결과적으로 학교와 교회의 분리, 또는 이성과 신성의 결별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성(헬레니즘)과 신성(히브리즘)의 변증법적 융합체인 서양 문명의 전통적 모습과는 다른 형태이고, 따라서 서양에서 일어난 현대적 교육은 이성의 측면만 강조하였기에 서양 문명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라고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근대 이후에 일어난 이러한 학교와 교회의 대체적인 분리 현상을 비서구권도, 특히 우리나라도 고스란히 수입했습니다. 아니, 그 분리를 심지어는 더욱 확고히 만들어서 수입했는데, 실은 이 '수입'이 우리의 선조들이 직접 한 일이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이 대신 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현대적 교육에는 '신성'의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수입한 '서양'은 신성이 결여된 학교교육과 이성이 제거된 교회라고도 칭할 수 있겠습니다. 저 자신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과연 그러한 교육과 종교가 각각 온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육에서 '신성' - 무신론자라면 '우주적 본성' 정도로 봐도 좋겠음 - 을 도외시하고 학생의 진정한 자아실현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깊이 파고 들어갈 수가 있겠으며, 우리가 교회에서 -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별 상관없는 문제라 여길 수도 있지만 - '이성'을 외면하고 신자의 진정한 신성발현이라는 목적을 얼마나 성실하게 추구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제가 교육자로서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단순화 해서 말하자면, 학생 개인의 신성(또는 우주적 본성)을 철저히 외면한 현대의 학교 교육은 인성 조차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작금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신자 개인의 이성적 역량을 무시하고 억업하는 현대의 교회는 개인적 신앙의 성장을 도와주지 못하고 집단적 양적 팽창에만 집착하는 폐해를 야기 시켰다는 것입니다. 서양 문명 그 자체가 현대에 이르러 내적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고, 이러한 불완전한 타문명을 무조건적으로 수입한 우리들 자신도 내적 균열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서양 문명에서의 교육 사상의 본류 - '주류'가 아니라 - 는 이성과 신성 양자의 분리를 추구한 적이 없다고 저는 관찰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신성한 교육'과 '이성적 신앙'의 조화를 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추구는 서양 교육 사상사의 핵심 인물들인 코메니우스, 루소, 페스탈로치, 프뢰벨, 몬테소리, 슈타이너, 듀이(이 철학자의 '신성' 추구에 관해서는 아직 '교과서' 수준에는 소개된 것이 없습니다), 닐 등의 줄기를 따라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고, 현재에는 그러한 전통에 비추어 현대 교육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교사 지망생인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바는, '신성'이 제거된 교육이 온전한 서양 교육이 못된다는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이성'을 억압하는 종교도 결코 온전한 종교가 못된다는 것이구요).
      저는 서양 교육의 본류에는 '신성'의 추구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동양적 교육 전통의 본류에는 '신성'의 추구가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요? 동양적 교육전통에 대한 강의 시간에 성리학적 자아실현관에 관해서 얘기해준 것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논리를 조금 확장해서 만약에 인류의 교육적 전통에는 보편적으로 '신성'에 대한 추구가 내재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하여, 인간은 종교를 가져야 된다는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아를 초월하는 그 무엇을 추구해왔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고, 그러한 자아실현, 내지는 초월을 종교가 도울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인데, 종교의 밖에서도 자아의 실현과 초월에 대한 도움을 얻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저 자신의 의견입니다. 바꿔 말해서, 유물론자나 무신론자도 자아의 실현과 초월을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루소라는 사상가는 서양에서 이성과 신성 사이의 결별이 완결되기 이전에 그 양자 사이의 조화로운 융합을 시도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이성적이면서도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 비록 '정통' 기독교 교리는 져버렸지만. 자신의 그러한 내적인 ‘화해’의 추구가 에밀을 교육시키는 정신으로 결정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고를 요하는 주지적인 성격의 첫째 글에 비해, 오교수가 건네준 두 번째 것은 명상, 또는 성찰을 요하는 잠언과도 같은 글이었다:


나는 나 [루소的인 '자신 내면의 모순된 요소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잠언]


나는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이다. 내 스스로 나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  생떽쥐베리


다음의 글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선 내 자신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라는 어느 열다섯 살 소녀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쓴 글이다.


나는 나다.

이 세상의 어디에도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다. 나와 어느 정도 닮은 사람은 있어도 정확히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진정한 나만의 것이다. 내 자신이 그걸 선택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것은 내 소유이다. 나의 육체와 육체가 하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마음과 마음 속에 담긴 생각, 사상 모두가 나의 것이다.

내 눈과 눈에 비치는 모든 모습들이 나의 것이다. 내 감정은 모두 나의 것이다. 분노, 슬픔, 기쁨, 좌절, 사랑, 실망, 흥분 모든 것이.

내 입과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나의 것이다. 공손한 말, 부드럽고 거친 말, 정확하고 부정확한 말 모두가. 그리고 나의 목소리도 나의 것이다. 큰 소리든 작게 속삭이는 소리든, 나의 모든 행동, 그것이 남에게 하는 행동이든 나 자신에게 하는 행동이든 모두가 나의 것이다.

나의 환상, 나의 꿈, 나의 희망, 나의 두려움도 나의 것이다.

나의 성공과 승리, 나의 실패와 실수도 나의 것이다.

내 모든 것이 나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과 친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날 사랑하고, 또 나의 모든 부분과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럴 때 나의 모든 부분은 나의 깊은 관심과 애정 속에서 활동할 수 있다.

나의 어떤 부분은 날 당황시키고, 또 어떤 부분에 대해선 내가 모르는 것도 있다는 걸 난 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때, 난 용기와 희망을 갖고 그 모르는 부분들을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순간에 내가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들리든, 내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든,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든,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것이 이 순간 나의 진정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훗날에 가서 돌이켜 보면 과거의 나의 모습, 내가 한 행동, 내가 한 말과 생각 등이 나한테 맞지 않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가서 나는 그 맞지 않는 부분들을 버리고 맞는 부분들을 간직할 수 있다.

나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생존하고, 타인과 가까워지고, 창조적인 일을 하고, 외부의 사물과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해 나갈 수 있다.

나는 나의 것이며, 그러므로 나의 주인은 나다.

나는 나이며, 나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


- 버지니아 스테어;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류시화 옮김,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푸른숲, 1994, pp. 117-119.



      세 번째 문서에는 학생들의 반응 글 다섯 편과 함께 한 유명 저자의 글이 덧붙여서 실려 있었다:1)


학생의 감상문 1 - 별 같은 통찰


      교육의 기본 목표는 공동체의 생존. 그러므로 그 근본속성은 이타적이라고 담론을 모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을 연장하여 공동체 속의 생존, 즉 나만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이고 왜곡된 교육이 있을거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은 교육의 대전제인 "전체"를 위협하는 사항이므로 끊임없이 배척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부에서 끊임없이 추구되고 있다고 봅니다. 주의하여 구별해야될 항목으로는 너를 인식하고 나를 일식함으로서 상호존중이 성립하는 개인주의가 있습니다.

보통 서양문화에서 "전체"를 찾는 것은 어렵다는 편견이 있습니다만, 역사적으로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뿐더러 신앙이란 것이 공동체를 모으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한 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유교"라는 구심점이 있었지요. "도덕적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초개인적인 사회체, 그리고 궁국적으로는 우주적 질서와 일치되는 인간"이것이 유교의 논리입니다. 서양의 도덕윤리는 어떤 것일까요? 사람을 일방적으로 "교화"할 수 있을만큼의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닌, 이른바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이 의문에 부정적으로 접근해 보았습니다. 괴테는 그의 글 '파우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차라리 각자들에게 하늘의 불빛 따위는 주시지 않았던들, 좀 더 잘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놈들은 이성이라 부르고 오직 그것을 어떤 짐승보다도 더욱 짐승답게 사는 데만 이용하고 있습죠." 서양 철학에서의 Truth와 대칭되는 truth가 있습니다. 변하는 것, 합리화하는 것. 이것은 "惡"입니다. 그리고 이 "惡"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거한 선택에서 태어납니다. 자유의지란 "개인"을 대변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양의 "善"은 우리의, 말하자면 동양의 공동선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의 범위에 대한 나름의 주장들이 있을거라 봅니다. 아무튼 종교의 위치를 나의 초의식의 정점[=참자아]이라 본다면 집단의 무의식과의 교점이 되는 그 속성은 "절대선"을 띄고 있으리라 추정됩니다. 교육이 아무리 종교와 분리되었다 한들 그 목표가 "공동체의 생존"에 있는 이상, 그리고 그 이타적인 속성을 기본으로 하는 이상 신앙의 절대선을 향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서양의 교육 체계를 받아들이면서 신성을 배제하였다는게 보편적인 사실일 거라고 봅니다. 많은 근대문학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받아들인 것은 "미신"을 제외한 인간 존재의 사고ㅡ"계몽의식"이었지요. 근대문학에서 보이는 방황하는 지식인의 배경엔 현실적 고뇌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부정하는 19세기식 전통에 그들의 초의식을 지배하는 동양적 신앙[=유교]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현대에 문제시 되고 있는 우리 교육의 방향성 상실은 역사적 흐름에서 도태하고만 전통적 근간, 우리의 근본을 제거하려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일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의식속에 자리한 나도 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채익의 기준으로 떼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현대 한국 교육의 병리적 현상들은 결코 물질적 기준으로 환산할 수 없는 상대적으로 "미신적"인 부분을 자발적으로 상실한 시대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런지요.

루소적 화해의 전통은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실제로 공동체적 신앙과 자신의 이성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주변의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최첨단의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크리스천이라던가 하는 것일텝니다. 루소가 말하는 신앙은 기독교적 신앙이라기 보다는 "자연의 본질서"라는 느낌이 듭니다만ㅡ. 아무튼 그가 주장하는 화해가 절름발이가 아닌 "온전한 나"를 지향하고 있다는...것.

...본 자료의 방향과 맞는 논의인지 확신이 없어 이쯤 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서양과 동양의 지향성을 말한다면 위와 같습니다. 교수님, 많은 학생의 감상 일일이 보시려면 힘드시겠네요. 좋은 하루 되시고 내일 수업에서 뵙겠습니다.



학생의 감상문 2 - 우물 같은 성숙


      의식된 자아로서의 ‘나’가 우주적 본성, 즉 신성으로서의 참 자아가 되는 것은 신성에 대한 순간적인 깨달음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참 자아로 부단히 다가가는 점진적인 과정이며, 이 과정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모든 점을 인정하고 똑바로 들여다보고 수용, 개선하는 반성적 사고과정 즉, 이성을 통해 이뤄진다.

의식된 자아가 참자아로 나아가는 과정은 마치 도르래로 우물의 물을 퍼는 것과 같다고 생각된다. 사람의 힘에 의해서 도르래가 움직이지만, 이러한 힘의 전달은 일단 생략하고, 도르래 자체가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힘이라고 보자. 도르래가 움직이지 않으면 물을 얻을 수 없으며, 또 도르래가 위를 향해서 연결되지 않는다면 즉, '위'라는 도착점이 없다면, 도르래가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물을 얻을 수 없다.바로 이러한 도르래와 '위'라는 최종 도착점의 관계가 이성과 신성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즉, 지향점을 향해 갈 수 있는 원동력(이성)과 원동력이 부단히 지향점을 향해서 작동하게 하는 지향점 자체의 힘(신성) 사이의 관계에서 루소가 말하는 내면의 화해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원동력과 지향점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루소가 말하는 내면의 화해라고 생각한다.



학생의 감상문 3 - 인도 같은 성찰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적어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타이틀은 ‘루소적 내면의 화해’라고 하나 결국은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입학한 순간부터 저는 ‘내가 바라는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 쉽게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조금 더 똑똑하고, 세련되고, 멋있는 사람이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게 변할 수 없었습니다.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는 사진들은 이리저리 조작하고, 수정할 수 있는데 진짜 내 모습은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편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저 높은 곳에 있는데, 나는 자꾸 그 한참 떨어진 아래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가게 됐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5년 1월, 인도에 갔습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여행이었습니다. ‘선재수련’이란 이름으로 50명 정도의 사람들과 어울려 인도의 한 천민마을로 봉사활동을 갔던 것입니다. 불교신자지만 한 번도 자신 있게 불교신자라고 말할 수 없었던 자신에게 변명의 기회라도 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꼭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에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누구보다 잘해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불교식으로 이뤄지는 단체생활도, 인도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돕는 일도 성실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밤이면 전기가 없어 완전한 암흑 속에 갇히는 마을, 2~3일에 한 번은 물이 끊겨 샤워조차 맘 놓고 할 수 없는 그곳이 불편하게 생각됐습니다. 인도 사람들과 똑같이 먹어야하는 점심 식사도 고역이었습니다. 간간히 법문을 해 주시던 스님께서 “수행하는 사람한테 인도만큼 좋은 나라도 없다. 하지만 수행보다 먹고 싸는 게 중요한 사람한텐 인도만큼 불편한 나라도 없다.”고 하셨는데,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저는 아무래도 ‘먹고 싸는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환경 보호를 위해 봉사자 전원이 샴푸와 휴지는 쓰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샤워도 웬만하면 3일에 한 번 정도만 하자고 약속했었습니다. 하지만 싫었습니다. 불편한 게 싫었고, 찝찝한 걸 참지 못해 남들 몰래 샴푸도 쓰고 휴지도 썼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예전에 내가 바라던 그 모습처럼 굉장히 똑똑하고 멋진 사람은 아니더라도 이기적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불편함을 감내하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저는 그 짧은 순간순간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한 몸도 제대로 못 챙겨 남의 도움을 받았고,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몸과 마음이 괴로워 매일같이 울어서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언제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현재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진 못 했다는 반성이 일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이기적이고, 나약하고, 위선적인 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착한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인도에 다녀온 이후 마음의 무게는 꽤나 가벼워졌습니다. 이전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나에 대한 허상(虛想) 같은 것이 지워진 기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며 정의 내렸던 수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언제, 어느 장소에서든 새롭게 정의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좀 더 느낌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됐다고 해야 할까요? 원래의 저는 낯을 가리고 조용한 편이지만 꼭 언제나 그렇지는 않게 됐습니다. 시끄러울 때도 있고, 푼수 같은 때도 있고, 엽기적일 때도 있고, 또 다시 한없이 부끄럼을 탈 때도 있고… ‘나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만큼이나 현재의 내 모습도 똑바로 응시하고자 노력합니다. 그 간극을 좁혀 나가는 출발점이 다름 아닌 지금 나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이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루소보다는 ‘덜’ 지적인 내면의 화해 같습니다. 하지만 루소에게 만큼이나 제게도 의미 있는 성장의 결절점이니,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요? ^^



학생의 감상문 4 - 산 같은 중용


      내면의 화해. 그것은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며,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어떤 도덕적 개념에서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 우리가 가장 원하는 모습이 바로 이성과 신성의 합치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인간이 추구하는 속성이자 본성이라고 한다면 신성 역시 인간의 한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 내면에서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 뿐 아니라 계산적이지 않은 무조건적인 수용까지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은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 행복에 필수적인 자존감의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내부에서 외부로까지 확장되어 다른이들에 대한 가치 부여와 나눔, 희생이라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공동선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게됩니다. 개인적 욕구와 공동선이 갈등관계로 부딪칠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며 유일한 방법이 내면의 화해라고 봅니다.         이성의 힘만으로 공동선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내재되어 있는 욕구를 억압하는 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성은 공동선에 대한 자발성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만으로는 공동선 추구의 지속적인 설득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성과 신성의 결합, 즉 내면의 화해가 이루어졌을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공동선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육에서의 이성과 신성의 추구의 필요성이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학생의 감상문 5 - 겸허한 '교양'


     
1년 전에 저는 중핵 필수과목으로 ‘생명과 환경’이라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초기에 본인은 기독교 신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과학자이신 교수님이 기독교 신자이시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아마도 제가 이제까지 ‘과학은 신성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라는 인식, 또 그러한 신성과 완전히 분리 되어 있는 과학지식 위주로 교육을 받아 왔던 것이 이유였을 것입니다. 교수님은 수업 중에 자주 칠판 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상을 가리키시며(K관의 칠판 위에는 모두 작은 예수상이 있습니다), ‘이런 건 아마도 이 양반이 만든 거겠죠’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자시면서 그런 칭호를 사용하시다니.... 그건 더욱 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학기의 막바지 무렵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다들 배우면서 느꼈겠지만, 나와 같이 이런 과학 현상들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자들도 참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현상을 분석 연구해서 어떤 이론으로 정리를 해보면, 처음에는 어떤 부분에 대해 그것이 분명이 오류라고 생각되었는데도 나중에 가서 보면 한 전체 조직을 위해 꼭 있었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분명히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이렇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어떠한 질서에 의해 완벽하고 아름답게 전체적인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앞에서는 저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무신론자 임에도 그러한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말이 마음속에 와닿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교수님이‘이 양반’을 이성적으로 이해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수님이 예수님을 이성적으로 이해하셨던 과정과, ‘자아’를 이해하는 과정이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미 완전한 전체로 만들어져 있고, 그것을 내가 깨닫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끊임없이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틀을 깨고 신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사고과정이 필수적일 것입니다.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부분만을 ‘나’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이 온전히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중간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정체되어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신성과 이성에 대해 저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또 다른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학교에 와서 교양을 쌓아보고자 필독서 목록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크리톤>을 읽었습니다. 처음에 두 책을 읽었을 때, 저는 소크라테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변론>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이성적인 사고로 법정에서 변명을 합니다. 그리고 ‘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리톤>에서는 다시 ‘국법을 따르겠다’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로, 아테네 법이 자신의 철학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으나, 그것만으로 두 책에서 나타나는 그의 상반된 행동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저는 고민 끝에 철학과 교수님께 가서 이에 관해 여쭤보기로 했습니다. 교수님은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는 신의 전언을 믿었고, 다이몬이 항상 자신을 옳은 길로 인도한다고 믿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자신이 변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형판결을 받았을 때, 이미 그러한 결과가 나오도록 다이몬이 가만히 있었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사형을 받아들이도록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성을 믿었지만, 그가 그러한 결론을 내리는 과정은 분명 모두 이성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인간에게는 삶의 길을 닦아 나갈 수 있는 도구인 ‘이성’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이성’이 길을 닦아 나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신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내면의 화해’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고등학교 때, 논술을 준비하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저는 그 내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악’으로 가득 찬 책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반박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그 군주론의 내용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해 제가 강한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정규 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히 따라왔고, 저에 대한 부모님의 교육도 학교에서의 교육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 결과, 저는 ‘선’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선’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악’이 있다는 사실을 저는 왜 모르고 있었을까요. 인간에게서 드러는 '악'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비판하는 것이 바로 또다른 '악'이 될 수 있다는 것, 인간관계에서 무조건 '선'하기만 한 것은 '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대학교에 와서 이러한 여러 텍스트를 접하고 인간관계를 쌓으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학교에서 여러 가지 수많은 지식들을 배웠지만, ‘인간에 대한 지식’은 진지하게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본 ‘배트맨 -다크나이트’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위와 비슷하게 한동안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 영화는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배트맨의 내면적 갈등을 그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사회 전체의 평화를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악인들을 죽이는 ‘악’이 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무척이나 괴로워하며 갈등을 겪는 배트맨의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배트맨을 만들어 내는 사회가 바로 내 마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악’이라는 것에 대해 심히 기피하고 뿌리째 뽑으려고 하며, 괴로워하는 배트맨의 모습에 매우 공감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악’을 제거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마음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제가 있는 그대로의 인간(저 스스로)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계속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겠지요.



* 어느 현자의 조언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인정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간디에서 히틀러까지, 모든 인물이 될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동일 유전자 공유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히틀러가 될 수 있는 면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모습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은 결코 부정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할 리가 없다며 자신에게 잠재된 어두운 면을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일단 인정하고 나면 노력으로 그것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안에 깊이 뿌리박힌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모두 인정할 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자아를 존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 감추고 싶은 자아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포함해서.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선한 마음에 이끌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인위적이고 멋진 모습들로 진정한 자신을 가리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 자체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 사람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진정한 자신에 가까워지려면 자신의 어두운 면과 결점에 대해서도 솔직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 Elisabeth Kubler-Ross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류시화 번역, '인생 수업,' 이레, 2006, pp. 26, 28-29, 34, 35)


1)
아래에 실은 학생의 글 5편은 필자의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이 과제의 일부로 필자에게 제출한 글들 중에서 추린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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