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개인주의 vs. 집단주의

김도헌이 유진의 말에 반론을 제기했다.

“글쎄요, 집단에 대한 희생정신이 크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타심을 발휘할 잠재성이 상대적으로 더 크지 않겠습니까?”

“전 김박사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요. 전 한국 사람들이 서구인들보다 결코 더 이타적이라고 보지도 않고, 서구인들이 한국인들보다 조금도 더 이기적이지 않다고 봐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다른 개념일 거예요.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만 중요하다고 여기는 태도죠, 즉, 자신의 에고만 중요한 거죠. 그에 비해 개인주의는 자기라는 개인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만큼, 다른 개인들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거든요. 따라서 개인주의적 태도는 개개인을 소중히 여기는 민주적인 사회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이론적인 이해일 뿐이란 말씀입니다. 실제로는 자기 개인을 중시하는 이들이 결국 자기 개인만을 더욱 중시하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자기라는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이들은 자기를 희생하고 바쳐서 타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가짐이 있는데 반해서 말입니다.”

“아니죠, 김박사님께선 여전히 개인주의를 제대로 이해 못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쯤에서 오교수가 헛기침을 한 차례 하더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분 의견 잘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나는 서유진씨 의견 쪽으로 기울어있다는 걸 굳이 숨기진 않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의 다소 중립적인 의견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두 개의 연속선을 상상합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잇는 연속선 하나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연결하는 연속선 하나를 말이죠.”

그러면서 오교수는 탁자 옆의 칠판에 마커로 다음과 같은 도식을 적었다.


개인주의 ←――→ 집단주의

이기주의 ←――→ 이타주의


“이 개인주의-집단주의 연속선상의 어느 지점엔가 한국인의 대표적 성향이 자리 잡고 있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 연속선상의 어딘가에 서구인의 대표적 성향이 있겠죠. 내 짐작으로는 아마도 한국인의 성향은 상대적으로 집단주의 쪽에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을 테고, 서구인들은 개인주의 쪽에 더 근접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이 말은, 어느 한 쪽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개인주의적이라든가, 아니면 집단주의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뜻이죠.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똑같은 논지로 이기주의-이타주의 연속선도 역시 정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죠. 나는 개인주의-집단주의 연속선과 이기주의-이타주의 연속선이 서로 전혀 상관성이 없이 따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전개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개인주의자가 이기주의적이 되는 경우도 있고, 개인주의자가 이타주의적이 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마찬가지로 집단주의자가 이기주의적이 되거나 이타주의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건 그저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말씀이예요. 어떤 상황에서는 집단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한 한국인들이 꽤 이타적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상황에서는 대단히 이기적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바꿔 말해서, 개인주의자가 필연적으로 이기적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이 안 되듯이, 집단주의자는 꼭 이타적이 된다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유진과 김도헌 두 사람 다, 듣고 보니 오교수의 설명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교수의 차분한 설명을 들으며 두 사람은 잠시 달궈졌던 열기를 식힐 수 있었다. 오교수에게 두 사람 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을 잠시 관찰한 뒤, 오교수는 말을 이었다.

“개인주의자가 이기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집단주의자도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역자치단체들의 집단이기주의 님비(Not In My Backyard) 현상을 알지요? 헌데 지금은 산업사회가 지식기반사회로 이동중이고, 따라서 개성과 창의성이 경제적 이익으로 환산되는 게 유행인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특수한 역사적 상황 하에서는 아무래도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가 더 각광을 받게 되는 거죠. 하지만 김박사는 특이하게,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특정 계층을 상정해서 이들에게만 개인주의적 권한을 부여하고, 그 밖의 일반 대중에게는 집단주의적 순종을 요구하는 일종의 이분화된 국민교육 체제를 구상하고 있는 것 같군요. 글쎄요,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긴 한데, 난 개인적으로 그 정신에 반대합니다.

나는 누구든지, 그 사람의 지능이나 성격, 또는 그 어떤 특성과도 상관없이, 인간은 개인으로서 존재해야만 할 경우가 있고, 또 집단으로서 행동해야만 할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인간은 아무래도 사회적 동물이죠.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도 집단을 이뤄서 함께 공존하는 것이죠. 공존을 위해서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타인들과 함께 수행해야만 할 일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그 갈 방향을 잡는 정치생활에 참여하는 것,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국방의무를 감수하는 것, 의식주를 보장해줄 경제생활을 수행하는 것, 함께 사는 사회 속에서 이타적 본성을 발휘하는 것, 또 문화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개성을 전시하고 나누는 것 등등, 인간 생활의 여러 면에서 우리는 타인들과 함께 힘을 합치고, 자원을 나눠서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동시에 인간에게는 숙명과도 같이 혼자서 있어야만 하는 경우나 때가 있다고 나는 믿어요. 신화학자 죠셉 캠벨은 캐멀롯의 원탁의 기사의 예를 들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들은 무리지어 가는 것이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자 스스로 선택한 가장 어둡고 길도 나있지 않은 지점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라고.”

“교수님은 그런 걸 어떻게 외우고 계세요?”

“실은 어제 읽은 책에 나온 말이야. 에헴. 아무튼, 사람은 혼자서 있어야 할 경우가 있어요. 성인식과 같은 통과의례도 그렇구요, 또 자아성찰이라든가 명상, 기도, 일기쓰기, 뭐 이런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죠. 어떤 이들은 이런 활동이 그저 우리의 본래 활동인 벌어먹기에 첨가된 좀 고상한 활동이라고 보는데 반해서, 철학자들은 그런 활동이 벌어먹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인간의 활동, 아니, 존재상태라고도 말하죠. 이런 활동은 함께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유진이 또 끼어들었다.

“아, 교수님, 우리나라에선 기도도 혼자 하지 않고 합동으로 크게 소리 내서 하거든요. 그걸 보고 러시아에서 귀화한 박노자 교수가, 한국 교회에서는 기도를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하지 않고 단체로 모여서 한다면서, ‘공개적 성행위’니, ‘난교 파티’니, 비꼬던데요.”

“난교 파티라구? 우하하하! 그 친구 아주 재미있는 친구네! 아, 실례.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의 문제는 혼자서 있어야 할 경우에도 집단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난 어떤 한 사람이나 어떤 국민들이 전적으로 개인주의적이 될 수도, 또 전적으로 집단주의적이 될 수도 없다고 보고, 두 가지 측면을 어느 정도씩 다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양쪽 성향 다 일장일단이 있을 거예요.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서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생존해가는 사회적인 존재인 한, 전체 집단을 위해서 개인적인 면모를 희생할 줄 아는 집단위주의 태도가 요청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집단의 구성원인 개인들의 개성을 무시한다면, 그런 공동체에서는 개인의 행복추구에 커다란 장애가 존재할 테고, 또 창의적인 개인들의 재능을 사장시킴으로써 집단 전체의 이익도 반감되겠죠. 또한, 각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함으로써 개개인의 질이 향상될 때, 집단 전체의 질 또한 향상되기 마련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것들을 다 염두에 두고,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집단주의는 생존, 또는 현상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이지만, 개인주의는 초월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오교수님께선 개인주의자이신줄 알았는데, 그렇게 단순하게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시는 것 같군요.”

모처럼 김도헌이 오교수에게 반대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진은 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느낀 바가 있어, 집단주의를 배척하게 되고 개인주의를 강하게 선호하게 됐었는데, 오교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자신의 그런 태도 역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교수가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이순신 장군은 집단주의자일까요, 개인주의자일까요?”

느닷없는 엉뚱한 질문에 유진과 김도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충무공이 평생 살아간 궤적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 양반이 언제 한 번이라도 사회적 대세라든가, 집단의 논리에 얌전히 순종한 적이 있었던가요? 이 양반의 행적은 지극히도 개인주의적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반은 대단한 애국자였음이 명백합니다. 그가 있어서 조선이라는 집단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니 집단을 위해서도 개인주의자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두 사람의 청중은 딱히 반론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오교수는 또 한 번 물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대동여지도 만든 김정호는 또 어떻습니까? 이 사람에게 집단주의 성향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남들 말은 조금도 안 듣고, 황소고집으로 끝끝내 자신만의 길을 헤치고 갔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인물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이런 개인주의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공동체의 ‘질’ 향상에 개인주의자의 고집이 기여하는 바가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눈앞의 어떤 인물의 삶의 자세에 대해 경솔하게 개인주의적이니 어쩌니 평을 하고, 심판을 하는 게 온당한 일일까요? 아니면 좀 엉뚱해보여도, 독특한 개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관용을 베푸는 건 어떻겠습니까?”

결국 오교수는 자신이 개인주의 쪽으로 더 편향돼있음을 천명한 셈이었다. 유진은 아까보다 조금은 더 의기양양해진 데 비해, 김도헌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 됐다. 그가 몇 마디를 보탰다.

“개인주의는 물론 사회 전체를 위해서 필요하죠. 특히 소수의 우수한 인재들이 개인적으로 자신만의 업적을 발휘하도록 지지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재교육 같은 게 그 예이죠. 꼭 대다수가 개인주의적이 되는 게 해답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온 국민이 이순신이나 김정호와 같은 특출한 인재일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럴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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