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교교육에 대한 유진의 리포트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의 전통적인 교육은 약 25,000여 자에 이르는 한자 중, 주로 사용되는 약 5,000자를 익히는 데 집중돼있었으며, 그 주된 교재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하여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집필한  방대한 유교 경전들이었다. 공자가 창시한 유교는 사회적, 정치적 윤리를 개인의 덕성과 결부시켜 중국의 교육을 지배했으며, 그 최고의 도덕적 원칙은 효(孝)였다.

유학교육기관인 학교의 학습의 주안점은 한자의 숙달, 경전 암기, 경전에 관한 수많은 주석의 연구, 그리고 경전과 같은 문체를 만드는 능력의 배양에 있었다. 학생들은 천자문 등의 6권의 교과서에 실린 문자를 암기함으로써 읽기와 쓰기를 익혔고, 문헌과 그 주석을 암기함으로써 경전의 내용을 소화했다. 특히 교육의 초급 단계에서는 암송을 통한 암기 훈련이 그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은 암기를 통해서 작문 능력을 키웠는데, 작문도 경전의 문법, 운율, 구문 등을 철저히 모방할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독창적이거나 창의적인 글쓰기는 노골적으로 억압됐다. 글을 쓴다는 것은 교육받은 자의 최종적 증거이자 인간정신의 가장 고귀한 경지로 숭상됐다. 유교교육 체제의 정점을 점유하고 있던 것은 과거제도였다. 과거제는 중국에서 서기 587년에 시작됐으며 1898년에 황제의 칙령으로 서양식 대학제도로 변화될 때까지 유구한 세월을 지속했다.

유교교육의 특징으로는 과거의 지식에 몰두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학생들은 전통적 행동양식의 보존에 열중했다. 이는 과거로부터의 일탈을 방지하여 기존의 사회체제를 굳건히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그 정체적(停滯的) 특성이 두드러졌는데, 중국과 같이 외세와의 활발한 상호작용으로부터 자유로웠던 편인 문명으로서는 정적인 면을 유지하는 것이 타당성을 가졌다 하겠다.

요, 순 시대의 이상향의 회복을 추구하는 이 같은 복고적 경향으로 인하여 교육에 있어서도 과거를 반복할 것이 강조돼서, 학생 개개인은 과거의 성현의 생활을 따르도록 요구받았다. 교육은 이를 통하여 개인이 과거와 달라지지 않게 하고, 또한 과거 이상으로 진보하는 일도 없도록 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즉, 과거를 개혁하는 능력이나 새로운 정세에 적응하는 역량을 발달시키기 보다는, 과거와 똑같은 사상 및 행동의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었다. 이 같은 유교교육의 유용성, 실용성 무시는 기존 체제의 유지에는 크게 기여했으나 근세에 서양의 도전에 직면해서는 급속한 균열을 보이게 됐다. 유교적 세계에서 ‘교육’은 너무도 고귀하였기에, ‘천박한’ 실용을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의 유교를 적극적으로 수입했고, 유교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지배하게 됐다.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와 도교 등이 우리나라의 교육적 전통에 끼친 영향은 유교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삼국시대부터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유교교육의 영향으로 고구려는 한자를 사용했고 유학을 장려했으며, 372년 소수림왕 때 귀족교육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했다. 태학은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또한 지방 소재 사립교육기관인 경당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양성을 그 목표로 삼았다. 이에 비해 신라에서는 자생적인 화랑도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의 기치 하에 귀족 자제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불교의 영향력이 강했지만,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유교의 영향력도 상존했다. 삼국통일 후 682년 신문왕 통치 시에 유교 중심적 교육기관인 국학이 설립되어, 귀족 자제의 고등교육을 담당했다.

고려 시대에는 유교와 불교의 영향이 혼재했는데, 992년 성종이 설립한 국자감은 국가의 최고교육기관으로 문무 양 분야를 망라한 교육을 실행했다. 이후 원으로부터 주자학이 도입됐고, 1300년에는 안향이 국자감에 주자학을 도입하여 교육 내용의 충실을 기했다. 동시에 지방의 교육기관인 향교에서도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 행해졌다. 또한 958년 광종 때에 중국에서 도입된 과거 제도가 최초로 실시됐다.

선대의 왕조들에 비해 조선시대는 유교가 교육의 지배권을 거의 일방적으로 독점한 시기였다. 고전적인 농경관료제(agrarian bureaucracy) 형태의 중앙집권국가인 조선의 사회는 유학자인 양반이 지배계층을 이루었으며, 중앙정부의 왕권과 토지기반 귀족세력 간의 세력 균형 유지가 정치의 관건이었다. 조선은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중국을 인간문명의 중심으로 여겼던 것에 비해 일본은 무시했다. 종주국인 중국의 유교는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를 지배했으며, 교육에 있어서 그 영향력은 독점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가 국가교육의 대강을 결정하고 지방의 국립교육기관뿐만이 아니라 일부 사학의 재정까지도 지원해주는 중앙집권적인 교육행정 구조가 확립됐다. 수도 및 지방에 소재한 국립 중․고등교육기관들은 중앙에서 직접 관리했다. 지방의 소규모 사립교육기관인 서당은 양반의 자제를 교육했으며, 그 수가 전국적으로 대단히 많았다. 유교경전을 교육받은 선비들의 선발과정인 과거를 통하여 정부의 고위 관료를 결정했으며, 과거제는 이론적으로 백성들의 평등한 신분상승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과거 시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소요되는 비용을 감안할 때, 법적으로는 보장돼있는 수험권이 실질적으로 빈곤한 농민들에게도 균등하게 보장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여성은 과거 시험에서 배제됐다.

중앙의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이 있었고, 지방에는 성균관의 축소판인 중등 유학교육기관으로서 향교가 있었다. 고려시대에 생긴 향교는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도입으로 더욱 커졌고, 국가교육기관으로 융성했다. 유교교육의 주된 학습 방법은 암송이었고, 토론은 일반 학생들에게 허용되지 않았으며, 교사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19세기의 실학 무시 풍조가 증언하듯이 유교의 배움은 형식주의와 의식, 예식을 존중했으며, 도덕을 강조했고, 교육 그 자체에 큰 가치를 뒀다. 조선조 유교교육의 사상적 근간이었던 성리학, 또는 주자학의 세계관은 보편타당한 도덕적 이상주의의 원리에 의해 떠받쳐졌다. 성리학적 세계관에는 서양의 헬레니즘 전통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실재의 이분법적 구분과 유대-기독교적 전통에서 드러난 목적론적 세계관이 부재했다. 성리학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끝없이 되풀이되고, 그 속에서 인간은 덕을 쌓는 수양에 힘쓰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며, 그 끝은 일종의 깨달음을 거치는 것으로 설명됐다.

이념적으로 유교교육은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복종심을 심어주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충, 효 정신의 숭상은 기존 정권의 안정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 초기부터 전국적으로 유교를 전파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중대한 과제였다. 전대까지 유교와 함께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점했던 불교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억압됐으며, 유학자 문인에 비해 무술 훈련에 치중한 무인 계급의 지위가 저하됐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유교는 경쟁자 없는 지배적 이념으로서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또한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의 정신수양을 강조함에 따라 수작업을 수반하는 수공업과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은 천시됐는데, 이는 당대의 상업과 산업의 미발달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인하여 한글은 조선 말엽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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