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한국 근대교육의 전개

1. 근대교육의 시초
     
한국 교육의 근대화 과정을 19세기 중반기로부터 살펴볼 때, 첫째, 동아시아로 진출하고자 하던 서구의 신문명에 자극받아 피동적으로 반응한 자생적 신교육 운동의 실패와 둘째,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한 학교사업 및 일제 식민지 교육의 성공이라는 두 축으로만 해석하기 보다는, 조선 중기 이후의 교육적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자생적 신교육 운동의 능동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해석할 필요성도 요청 된다1). 이러한 관점을 수용한다면 조선 말엽의 사회 변화 속에서 교육의 근대화를 위한 자생적 노력을 찾아볼 필요가 있고, 이는 특히 18세기 실학자들의 사상에서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실학자들은 인간평등사상에 근거하여, 교육의 기회균등, 과거제도의 철폐, 학제개혁,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실생활에 유용한 실업 및 과학기술, 신학문의 수용, 민족주체성 등을 강조한 바, 이는 주자학 심학 중심적이던 조선 시대의 교육 사조와는 크게 대조되는 것이었다.

     비록 이런 실학사상이 조선 말기에 교육변화를 유발하는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 진보적 입장이 19세기말의 개화파에게 계승되어, 국가의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 기술을 받아들여 국력을 신장하며 민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표출됐다고 하겠다.


2. 근대적 학교의 등장

그러나 조선의 첫 번째 ‘근대적’ 학교는 1850년대에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도입됐고, 1883년이나 되어서야 자생적인 근대적 사립학교가 처음으로 설립됐다. 1895년에는 개혁과 변화에 대한 압박을 반영한 고종황제의 조서에 근거하여, 일본의 교육제도를 모방한 국가교육제도의 원형이 그 모습을 드러냈으나, 이 또한 1904년에 일본의 통제권에 흡수되어 일본의 제국주의적 목표에 부합하도록 재구성됐다.

한국의 첫 근대적 교육제도는 개화, 근대화, 그리고 궁극적인 자주독립 등의 목적 하에 축조됐으나, 1895년 당시 교육을 관할한 대신이 이완용이었음에도 알 수 있듯이, 역설적으로 그 첫 근대적 제도의 모델은 조선에게 독립 주권을 부여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일본의 교육제도였다. 오래지 않아 일본의 식민지 세력은 자생적인 사립학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미션계 학교들을 견제했으며, 결국 조선의 교육제도 전체를 일본식으로 탈바꿈시킬 것을 기도하게 됐다.

19세기 말엽까지 대체로 4개의 유형의 학교들이 있었는데, 이는 전통적인 유학교육기관, 기독교 미션 학교, 근대적 사립학교, 정부 관리하의 근대적 학교 등이었다. 1895년에 설립된 학무위문(學務衛門)은 앞의 3유형의 학교들을 통제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과거제를 철폐하고, 관학에 신학문을 도입하는 등, 전통적 교육제도에 근대화를 추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관학의 양적 성장은 미미한 편이어서 1900년대 말까지 2만 명 미만의 학생을 수용한 168개의 초등학교와 200명 미만의 학생을 가진 2개의 중등학교, 그리고 약 30명의 학생이 재학한 1개의 고등교육기관이 설립됐을 뿐이었다. 그밖에 여러 유형의 직업 및 전문학교들이 정부 관할에 있었으나 재학생수는 미미했다.

이에 비하여 사립학교의 증가는 주목할 만 하여, 1910년에 미션 학교의 수는 800개에 이르렀으며 자생적 사립학교는 전국적으로 3,000을 넘어섰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이들 사립학교의 수는 1910년대에 들어서서 대폭 감소했다.

이 시대의 교육내용은 전통적 학문의 기운과 서구의 영향, 그리고 일본의 점증하는 영향 등을 고루 반영하고 있었다. 전국 도처에 존재하던 서당과 중앙의 성균관은 여전히 유교 교육을 고수했다. 관립 학교는 한 편으로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고, 다른 한 편으로는 메이지 일본의 교육과정을 본떠서 근대적 신학문을 도입했다.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된 1904년 이후에는 일본어가 강조되면서 국어 수업이 감소됐다. 또한 전반적으로 이 시대 학교 대부분은 교사, 교재, 기본 시설 등의 심각한 부족 때문에 질적으로 만족할 만 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비록 1895년의 교육조서가 전통적 사회질서의 변혁과 유교일변도 교육의 철폐를 주창하며 교육입국(敎育立國)을 목표로 삼았으나, 전통적 왕정의 복구를 꾀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근대화에 있어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후 교육입국의 의지는 조정의 친일 성향과 일본에 의한 교육의 질 저하 기도에 의하여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자생적 사학은 근대화를 추구함에 있어서 강한 민족주의와 반일(反日) 의지를 드러내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됐으며,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자생적인 융합 과정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하여 와해돼버렸다.


3. 일제강점기의 교육의 근대화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삼일 운동 등 한국인의 저항의지를 목격한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탄압적 정책을 ‘문화정책’이라는 유화정책으로 탈바꿈시켜 식민지 인구의 지지를 얻고자 꾀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접어들어 일제가 본격적인 전쟁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문화와 동화시키려는 강압정책이 교육 분야에서도 실행됐으며, 따라서 공식적으로 한국어가 금지됐고, 창씨개명 및 천황숭배 등이 강압적으로 자행됐다. 이는 타 식민지 지역에서만큼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매우 잔혹한 정책이었다.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은 강점기간을 통틀어 네 차례 개정됐는데, 1922년의 개정은 ‘문화정책’을 반영했던 반면, 1938년과 1943년에 공포된 개정은 일제의 급증하는 군국주의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후반부의 이 두 차례의 개정은 조선인을 급격히 일본인화 하려는 목적 아래 강압적인 수단에 의존하게 됐지만, 서당, 민족사학, 미션 학교 등 기존의 교육기관들은 총독부의 고의적인 홀대와 노골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명맥을 유지했다. 1922년에 이르러 총독부가 그간 설립한 초, 중등학교들과 조선의 모든 중등학교들이 일본의 국가 학제에 소속되게 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초등학교, 중학교와 더불어 고등학교, 직업학교, 사범학교 등이 총독부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1924년에는 서울에 제국대학이 건립됐는데, 그 학생구성비율을 볼 때, 이는 조선인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일본인 학생을 수용하려는 기도가 더 반영됐다고 하겠다.

일제강점기 동안 초등학교의 양적인 팽창은 괄목할 만 하여, 1918년 학령아동의 4%만이 학교에 등록돼 있던 것에 반하여 1942년에는 60%가 재학하게 됐다. 1943년에는 거의 2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3,700여 개 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같은 해, 150 개의 중학교에는 45,000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한편 서당 또한 여전히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고 있어, 1942년에 전국적으로 약 백만 명의 학생이 3,500 개의 서당을 다니고 있었다.

식민지 교육은 그 내용에 있어서 먼저, 한국어가 1938년까지 미약한 형태로나마 교과과정에 포함돼 있었으나, 이후 선택교과가 됐고, 1943년에는 교육과정에서 제외됐다. 강점기가 시작된 이래로 일본어가 교육과정 상의 국어의 자리를 점하게 됐으며 가장 크게 강조된 교과이기도 했다. 일본 역사와 지리 또한 필수과목이었으며 도덕(修身)과 군사훈련 또한 주요 과목들이었다. 교과서는 총독부가 출판하거나 아니면 일본 본토의 문부성의 검정을 받아야 했다. 공립학교들에 부과됐던 모든 교과 관련 규정들은 점차적으로 사립학교들에게도 적용됐다.

공식적으로 식민지 교육의 기본적 이념은 일본의 ‘교육에 관한 천황칙어’에 터하고 있었던 바, 이는 1911년의 교육법령에 명기됐듯이, 충성스럽고 선량한 식민지민을 양성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비공식적으로 총독부 교육정책의 숨겨진 목적은, ‘내선일체(內鮮一體)’ 또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등의 구호에서 나타났듯이 한국의 일본화였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 조선의 어린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학교교육의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차원에서 ‘일본인화’라는 이념적 교화의 대상이 되어, 경직되고 군국주의적인 교육을 받고 천황숭배와 신사참배 등을 강요받았다. 또한 전시에는 강제노역이나 징집 등을 통해 전쟁 지원을 강요받았다. 한편 다수의 민족 사학들은 총독부의 끊임없는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식민지 교육 전체의 구조를 살펴보면 먼저, 일제의 통제 및 탄압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당, 민족 사학, 미션 학교 등이 여전히 학령아동 인구의 많은 부분을 흡수했다. 초등-중등-고등에 이르는 학제는 그 자체로서 엘리트주의적인 복선제였지만, 동시에 중앙인 일본 본토와 주변인 한반도를 양분했던 더욱 큰 양극 체제의 일부이기도 하였다. 조선에서의 식민지교육은 총독부의 의도적인 정책에 의해 일본열도의 교육에 비할 때 열등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일제가 의도했던 아니었던 간에 결과적으로 식민지 교육체제를 통해 서구의 근대적 지식이 조선인들에게 처음으로 대폭적으로 전달됐다. 동시에 강점기의 교육팽창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홀대받았던 한글이 적어도 강점기 초반 동안에는 더 많은 인구에게 전파되기도 했다. 또한 일제는 가혹한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에 대한 이념적 교화에 성공하지 못하여, 한국어는 말살되지 않았으며 민족주의와 민족의식 역시 약화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이 유독 반일감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렇다 하여도 조선인의 일본인화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즉, 다수의 한국인들이 일본어에 능숙하게 됐으며 일본문화에 대한 친밀감을 갖게 됐음을 해방이후의 사회와 문화가 증언하고 있다.


4. 한국교육 근대화 과정의 문제점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첫 근대적 국립학제는 한국인 자신에 의해서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미성숙한 형태에서 일제의 손에 넘겨졌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대한제국의 관학이 전체 학령인구의 극히 작은 부분만 흡수했고, 따라서 대다수 한국인은 일제의 식민지 학교를 통하여 근대적 학제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됐지만, 여전히 자생적 민족사학과 기독교 미션 학교들이 상당한 수의 학령아동을 교육했던 바를 고려할 때, 교육을 통한 한국인의 근대화를 일제가 완전히 독점했다고는 결론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한국의 근대적 국가교육체제를 처음으로 체계화하는데 성공한 주체였음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이식하고자 했던 자신의 교육제도는, 실상 일본 자신이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열강의 다양한 교육제도를 모방․도입한 후 일본의 기존의 교육적 전통과 결합하여 재가공했던 것이었음을 상기할 때, 한국인이 받아들이게 된 (거의) 첫 번째의 근대적 교육제도라는 것 자체가 워낙에 일본식으로 근대화된 교육제도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로 인하여 한국 교육의 근대화 과정은 초기에 외세의 깊숙한 개입에 의해 왜곡되는 경험을 했으며, 그 외세인 일본이 물러간 후에도 이러한 난맥상은 한국인의 자체적인 근대화 노력에 커다란 장애로써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21세기에 이르도록 ‘일제교육의 잔재’라는 표현이 교육현장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근대화 과정의 복잡성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1)
특히, 김인회, 『한국교육의 역사와 문제』(문음사, 1993)에서 주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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