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한·일 교육 근대화의 비교

불안정한 격변의 시기였던 동아시아의 개화기 사정에 대해 오교수가 강의를 시작했다.

“조선과 일본의 교육 근대화 과정을 한 번 비교해볼까.”

그는 칠판 위에 다음과 같은 간단한 연대표를 적었다.

 

일본

한국

 1853   미국 페리제독 요구로 개항

 1868   메이지 유신

 

 1886   문부성의 전국 교육행정 장악

 

 

(1855   제천 배론학당 설립)

 

 1876   강화도 조약 후 개항

 1883   원산학사 설립

 1895   교육입국조서

 1905   을사조약


“이 연대들을 보면 교육 근대화라는 노정에서 한국이 어느 정도 일본에 뒤쳐져 있는지를 알 수 있어.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조선시대에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일본은 1853년에 개항을 하기 이전에도 이미 17세기 초부터 네덜란드와 활발히 교역을 하는 등, 조선의 쇄국과는 대조되는 행보를 취해왔지. 그런 일본이 먼저 서양을 좇아 근대화를 감행한 건 역사적 필연이었을 거야.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천황을 옹립하고 쇼군의 봉건주의적 막부 정권에 대항해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인데, 이 역사적 사건을 기점으로 일본은 천황이 친정하는 중앙집권적 입헌군주제를 출범시켰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서구문물을 국가 차원에서 수용하기 시작했어.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국가적 목표는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였고, 교육 근대화 역시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치밀하게 추진됐어. 1886년을 이런 교육 근대화가 완성된 시점으로 보는데, 유신 이후 20년이 채 안되는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구 열강의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을 수입해 와서, 일본 고유의 교육 전통과의 융합을 시도했지. 이 융합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아서, 여러 다른 세력들 간의 암투와 충돌은 대단히 심각했다고 해. 이 과정에서 일본 교육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대 문부상인 모리 아리노리가 반대파의 자객에게 암살당하는 일까지 일어났을 정도야.

결과적으로, 일본은 스스로의 힘으로 교육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약 20년 동안 내부적인 진통을 겪을 만큼 겪었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기간동안 일본은 자체적으로 서구적 교육과 자신의 전통적 교육 사이의 어떤 화합을 기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가졌던 거지. 문제는, 동시대의 한국은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데 있어. 우리나라는 스스로 서구의 교육을 판단해보고, 그것과 우리의 전통 사이의 융합에 대해서 미처 따져볼 틈도 없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휘말려 우리의 전통은 그냥 폐기해버리고, 그저 일본이 자신의 입맛대로 만든 일본식 교육제도를 강제로 이식 당하게 됐던 거야.

이 도표에 보이듯이 일본에 비할 때, 한국이 교육 근대화를 시작한 것은 1895년이나 돼서지. 내가 보내준 강의 파일에도 설명이 나와 있지만, 이때 고종이 천명한 교육입국조서는 상당히 개혁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기는 했어도 왕권으로 대표되는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의지가 반영돼있었을 뿐 아니라, 사실 일본이 이미 만들어 놓은 일본식 교육제도를 근대화의 모델로 삼으려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워. 그리고 이 같은 관주도 교육 근대화가 미처 양적인 결실을 보기도 전에 10년도 안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 손에 우리의 교육 시스템 전체가 접수되고 말았어. 한 마디로 우리의 손으로 교육 근대화를 제대로 시도도 못해본 것이지.

그리고 이 표에는 1855년에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 교육기관이 표기돼있지만, 이 배론학당은 프랑스인들이 신부양성기관으로 세운 것이라 일반적인 학교도 아니었고, 또 한국인이 만든 것도 아니었어. 또 1883년의 원산학사는 한국인이 세운 일반인을 위한 학교이므로 최초의 근대화된 교육기관임에는 분명한데, 당시에 이런 학교는 매우 예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학교였기 때문에, 국가차원에서 교육 근대화가 시작된 시점이라고 볼 수는 없지. 국가차원의 교육 근대화는 일본에서 훨씬 일찍 시작했고, 또 완성했다고 해야지.”

이야기를 일단락 짓고, 오교수는 유진에게 인쇄된 문서를 건네줬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교육체제의 특징 및 식민지 교육의 영향 등을 요약한 동료학자들의 글이라고 했다. 유진에게 나중에 자세히 읽어보라며 오교수가 다음과 같이 구두로 설명해줬다:


일본 제국주의적 교육체제는 첫째, 엘리트주의적 복선형 학제로 특징지어진다. 엘리트주의 복선학제란,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는 진학의 경로가 하나가 아닌 여러 갈래이며, 그 갈래가 중학교 입학 때와 같이 이른 연령에 나뉘게 되는데, 그 갈래들 중에서 단 하나의 경로만이 국가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는 엘리트의 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 엘리트 경로의 최정점인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부국강병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 국민을 이끌고 나아갈 정예 관료가 될 재목이다. 이 ‘토다이(東大 = 도쿄대)’ 출신 엘리트 관료들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성공한 직업인이 아니라, 국가를  관리할 정도의 실력과 도덕성, 그리고 애국심을 지닌 지도자 집단으로, 일반인의 숭상을 받았다. 엘리트 경로 이외에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데, 이들도 학생들 간의 경쟁에 따라 일반 대학 진학, 고교 졸업, 실업계열 중고교 진학, 사범학교 진학, 기타 잡다한 학교 진학, 또는 조기 취업 등등의 제 갈 길을 제시해주는 기능을 한다.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과 사회경제적 조건에 맞는 적재적소를 일찌감치 찾아 나서도록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치중한 시스템이라 하겠다. 이 시스템 속에서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예를 들어 고교 2학년이 돼서 자신의 경로를 수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제국주의적 교육체제는 둘째,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교육행정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의 중앙집권 행정구조와 프로이센의 군사적 명령이행구조를 결합하여 축조한 이 체제는 가히 전 세계적으로 봐도 가장 중앙집권도가 강한 교육행정체제라 평할 수 있다. 즉, 중앙의 문부성에서 결정한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관한 사안을 전국의 학군과 각각의 학교 단위에서 일사분란하게 시행하는 형태다. 중앙정부는 전국의 학교와 지역 교육행정기구의 예산권 및 인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중앙의 명령체계로부터의 이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구조에 1920년대 이후의 군벌의 득세에 따른 군국주의 및 전체주의적 기조가 가세함에 따라, 전시 일본의 교육체제는 대단히 권위주의적인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를 유지하게 됐다.

셋째, 일본의 제국주의적 교육체제는 서구의 과학기술 및 실용학문을 적극 수용했으나, 서구의 근대시민 정신, 민주주의 이념, 그리고 전인교육적 이상은 철저히 도외시했다. 일본정부의 지도층과 근대화 사상가들은 서구가 발달시킨 과학을 일본이 받아들여서 행정, 경제, 군사, 과학 등 제반 분야에서 서구의 수준을 따라잡아야 할 것을 역설했지만, 서구적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정신 등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결국, 도쿄제국대학이 창설될 당시, 서구의 과학기술과 실용적 지식은 받아들이되, 신학, 철학, 윤리학 등은 수입할 의향이 없다는 점이 구체적으로 천명됐다. 따라서 루소를 통해 계승된 서양교육의 이상적 정신은 거부됐고, 동시대 미국교육사상계의 기린아였던 존 듀이의 인성교육적 담론 역시 무시됐다. 일본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의 물질적 힘을 추구했을 뿐, 서구의 정신과 영혼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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