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일본 제국주의교육 평가

1. 질적인 평가
     전에 조선 교육의 유산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면서, 교육 시스템의 ‘구조’와 ‘내용 및 이념’이라는 두 범주를 살펴본 것과 같이 일본 제국주의 교육 시스템을 분석해보자:


• 구조: 엘리트주의 복선형 학제, 고도의 중앙집권적 교육행정, 관(官) 주도적 학교교육공급

• 내용/이념: 권위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교사중심적 교수·학습, 획일적, 위계적


교육의 구조적 차원에 관주도적 중앙집권성이 드러나는 것과, 내용/이념적 차원에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 교육내용이 교사중심적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전달됐다는 것은 조선 교육을 분석했을 때 볼 수 있었던 결론과 흡사하다.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육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조선교육체제와 일본제국주의 교육체제에 공히 존재했다. 이처럼 현대성이라는 척도에 의해 볼 때 유사하게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조선과 일제교육의 특성은, 그러나 그 본질적 측면을 파고들어가 보면 유사함이 사라져버린다.

그 본질적 측면을 권위주의적인 교육에 나타나는 ‘복종’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파고들어가 보자. 먼저, 조선의 유교교육의 복종은 학생이 삶의 도리를 깨우치도록 이끌어주는 일종의 영적인 스승의 권위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이는 우주적 본성에 대한 코메니우스적인 자기 내맡김이나 자기초월적 헌신과 같은 개념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교육의 복종은, 국가의 목표 달성을 위해 개인의 개성을 포기하고,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강제적이고 폭압적인 복종을 의미한다. 이런 두 종류의 복종 사이에는 엄연한 본질적 차이가 있다. 유교의 스승에 대한 자발적 순종은 존재론적 성장의 차원에서 우러나온 요청인 반면에(‘나’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성장을 위하여), 일제의 국가에 대한 강제적 복종은 서구열강과의 경쟁, 생존, 투쟁을 위한 물리적인 힘의 증대를 꾀하는 소유론적 차원의 요구이다(‘나’의 집합체인 공동체의 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오늘날 우리가 유교적 순종과 일제의 복종을 동일시하게 된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전자를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망각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복종은 후자의 폭압적 복종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교육은 유교교육을 악용하는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유교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악용하여 백성의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유교적 덕성을 오용하고 왜곡해버렸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유교적 덕목이 군국주의적 권위주의와 동일시돼버렸다. 역사적 가정은 위험하지만, 만약에 일제강점기 교육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그토록 성급하게 유교적 교육유산을 폐기처분해버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비극은 자신의 전통적 축적물을 너무 빨리 폐기해버린 데 있다. 한국인 스스로 자신의 전통과 서구의 신문물 간의 융합을 시험해 볼 기회가 한일합방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동시에, 해방과 더불어 ‘일제’를 표면적으로나마 청산하고 급작스럽게 ‘미국 교육’을 받아들이는 역사적 계제에도 유교적 유산의 재평가는 없었다. 이는, 유교적 교육전통의 개인 차원의 효용성을 근대화 과정에서 한 번도 사회 차원의 효용성으로 연결시켜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즉, 신유학의 ‘경’ 사상이 개인의 내적 성숙에는 도움을 주었지만, 개인을 뛰어넘어 전체 사회 차원에서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가 해방 후에 미국 교육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은, 서구가 민주주의로써 달성한 개인 차원의 효용성과 사회 차원의 효용성 간의 연계를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나서나, 미군정기를 거친 다음에나, 여전히 유교적 교육유산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부담스러운 전통으로만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개인 차원의 효용성과 사회 차원의 효용성을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국가권력에 대한 무비판적 복종을 강요한 일제교육은 과연 성공했을까? 매슬로우의 욕구계층이론의 잣대로 볼 때, 육체적, 경제적 생존의 보장과 집단에 대한 소속감의 확보라는 저차원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제의 부국강병적 교육체제가 단시일에 예외적인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국가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시급히 달성하는 데 있어서는 일제의 엘리트주의적이고 국가주도적 - 또는 계획경제적 - 교육정책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매슬로우의 고차원적 욕구인 자아실현의 충족을 위해서도 일본의 제국주의적 교육이 효과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개개인의 능력과 적성은 엄청나게 다양해서, 그것을 중앙정부에서 통제하고 지시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의 근대화 시대가 일본에게 있어서도 매우 비정상적이고 전환기적인 역사적 시점이었음을 염두에 둘 때, 당시에 절박한 정신으로 축조된 제국주의적 교육체제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를 위해 고안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시기의 절박한 생존 목적을 위해서는, 비정상적으로 비인간적이지만 물리적 목표 달성에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일제의 교육체제가 일시적으로 활용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정상’적인 시대에 일제교육을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비록 일제가 20년 가까이 내부적으로 치열한 융합과정을 거쳐 주조한 근대화된 교육제도이기는 하지만, 일제교육에는 서양교육의 하드웨어만 수입됐지, 서양교육의 소프트웨어의 핵심 파일인 ‘루소적인 이상’은 현저하게 결여됐다. 이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육신만을 빌려온 것과 비슷하다. 일제가 강요한 근대화된 교육제도에는 군국주의적 망령이 깃들어 있었을지는 모를지언정, 자아실현, 전인교육 등과 같은 고차원적 인간욕구를 반영하는 교육이상이라 할 ‘영혼’은 빠져 있었다. 우리가 억지로 받아들인 교육은 따라서 영혼이 없는 시신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빠져나가면 그 육체는 썩기 마련이다. 썩어가는 시체와도 같은 교육체제를 회생시키는 데 실패한 한국의 교육 근대화 과정의 귀결이, 만민이 만민과 경쟁하며 오로지 개인의 생존만을 추구하는 작금의 교육 현실인 것은 아닐까.


2. 양적인 평가

현재 한국교육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인 비난의 화살을 일본에게만 돌리는 것도 부당한 일이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데에는 한국의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이 추후 한국교육의 양적인 팽창에 있어서 심각한 걸림돌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 한국교육의 질적인 악화에 더하여, 일제가 한국교육의 양적인 성장에 대한 장애요소 또한 심어놓았음을 관찰할 수 있다.

일본의 엘리트주의적 학제 내에서는 이미 1910년대에 ‘입시지옥’이라는 용어가 신문 지상에 등장했을 정도로 명문대 진학을 위한 학생들 간의 경쟁이 치열했다. 일본 열도에 비해 열등한 ‘2등급’ 채널인 조선의 학제 내에서도 대학교육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으나,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 ‘문화정책’ 시기에 선심성으로 설립한 경성제국대학마저도 조선인의 입학 쿼터는 일본인의 그것에 비해 미미한 실정이었다. 중등 및 고등교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수요는 식민지 당국에 의해 무시되고 억압됐고, 극소수 상류층 자제는 일본 본토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선인들의 교육적 욕구는 늘 존재해왔다. 그 배경요인이 유교적 학벌주의였든, 근대적 자아계발욕구의 확산이었든, 아니면 식민지 경제의 피폐화에 따른 개인적 투자결정의 반영이었든 간에. 증가하는 교육 수요는 일제의 초등교육 확장 정책에 의해 한층 자극을 받았을 수도 있고, 또는 후자가 전자에 대한 정책적 반응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일제는 초등학교의 수를 대폭 확장하여 해방 직전까지 학령아동의 60%가 학교에 재학하게 됐다. 그러나 초등교육과는 대조적으로 중등교육의 양적인 증가는 매우 미미하여, 1944년에 전체 조선인구 중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 소지자는 1.03%에 불과했고, 전문학교 이상 재학중인 인구는 0.13%밖에 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 동안 초등교육은 상당한 양적인 팽창을 이뤘음에 반하여 그에 걸맞는 중등이상의 교육의 증가는 부재했다고 하겠다.

이처럼 엄존하는 중등이상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수요는 일제강점기 내내 억압돼 있다가 해방과 더불어 분출됐고, 이를 수용하기 위해 남한 정부는 기존의 식민지 체제의 학교와 더불어, 일제를 관통하여 존속해온 사학들을 공립학교 체제 속에 편입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 이래로 한국의 사립학교는 국민의 교육수요 충족이라는 공적인 기능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3. 한국의 ‘교육열’의 원인

한국의 교육열이 세계적으로도 수위에 꼽히게 된 역사적 원인을 규명하는 일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분석하는 학자의 학문적인 지향성이나 정치․이념적 성향에 의해 상이한 해석이 강조되곤 한다. 일부 서구 관찰자들의 평이한, 그러나 비교교육학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유교문화 배경론’이 한국의 교육열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방금 언급한 일제강점기의 교육수요 억압정책과 그에 따른 교육열 분출도 충분한 설명력을 갖기는 어렵다. 이런 설명들과 더불어 한 가지 더 추가할 만한 해석은, 타력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계층구조의 불평등이 지속된 역사적 정황에 대해 주목한다. 이 해석은, 산업화되고 근대화된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도 왜 유독 높은 교육수준이라는 조건이 상대적으로 월등하게 높은 보상을 보장해주는지에 대해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왜 산업사회에서도 학벌이 우대되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한국은 근대화 과정을 자력으로 완수하는 데 실패했다. 대체로 근대화 과정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변화와 더불어 기존의 사회경제적 질서의 와해를 수반하고, 따라서 종종 폭력적인 계급투쟁과 그에 따른 계층질서의 전복이 발생하게 된다. 계급투쟁적인 대규모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한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토지 헌납이나 정부의 실질적인 토지 개혁, 농지 재분배 등이 이루어진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구조주의 마르크시스트 학자들은 근대화 과정의 폭력적인 혼란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1) 그런데 근대화 과정을 식민통치하에서 경험한 사회의 경우에는, 때로 강력한 식민지주의자의 지배력으로 인하여 계급투쟁이 발생하지 않고, 따라서 기존의 계층질서가 변화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후기식민지시대까지 존속되는 경우가 있다. 식민지 지배자인 외국인 총통에게 부역한 원주민 귀족들이 식민통치가 종식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경제적 상류층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 이 같은 경우다. 영국 통치하의 인도나 미국 지배하의 필리핀과 같이, 좌파 학자들은 한국이 그러한 경우라고 본다.

봉건적, 또는 전근대적 사회계층구조가 변화하지 않고 존속된다 함은, 그 계층구조가 동반한 문화와 의식 역시 존속됨을 뜻한다. 따라서 근대화 과정에서 산업혁명을 거치고 사회는 급변하여 자본주의적 산업사회가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즉, 많은 다양한 직종과 그에 따른 다양한 사회경제적 보상이 창조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전근대적 의식을 고수하여, 학벌과 가문을 중시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전근대적 상류계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징하는 높은 수준의 학벌,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대학 졸업장의 가치가 더욱 상승하게 된다.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형성하는 배타적인 사회계층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결실의 과다하게 많은 부분을 점유하게 된다. 또한 전근대적인 사회경제적 이권을 박탈당하지 않은 지주, 귀족 계층은 후대의 교육에 더 효과적으로 투자하여, 이들 계층의 후손들이 결국 사회의 엘리트 지위를 다수 점유하게 된다(개천에서 나는 용은 몇 마리 안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상류층에 이르는 채널이 결국 교육 한 곳으로 집중되게 된다. 그 밖의 사회경제적 분야에서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학벌이 없으면 그에 상응한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상류층의 국외자 위치에 머물 뿐이다. 한국인들은 이같이 유일한 신분상승 채널인 교육에 모두가 뛰어들어 경쟁하기 때문에 진학의 길에 병목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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