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친일교육론

한국교육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윤아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방 후에 친미적 교육체제를 수립한 인물들이 전부 친일파였던 건 아니에요. 미국의 교육이론을 소개한 오천석씨의 저서들은 지금도 교육학도들이 참고하고 있는데, 이분은 친일행적의 기록이 없어요. 당시에 오천석씨와 함께 손잡고 신교육체제 수립을 추진했던 이른바 ‘교육4인방’이라 불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 격인 인촌 김성수와 백낙준, 김활란, 이 세 사람은 친일 기록이 꽤 남아 있죠.”

“아, 맞아, 인촌이 그 사람들의 좌장이죠? 그 양반에 관해선 저도 전에 자료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글세요... 몇 년 전만 해도 친일파의 존재 그 자체를 민족사 왜곡의 주범으로 증오했었지만, 지금은 솔직히 인촌이란 인물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비판만 하지 못하겠어요. 일제강점기는 확실히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렵고 사회정의도 취약했을 텐데, 비록 지주출신에다가 사업을 벌여 축재를 하고 총독부에 조력했다지만, 그런 시절에 행정 담당자인 일본인들에게 협력하지 않고 과연 어떤 사업이라도 벌일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동아일보 창간도 그렇고,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키운 것도 그렇고..... 내가 조·중·동 싫어하지만 일제 때 동아일보가 있었던 편이 그렇지 않았던 것보다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민족사학인 보성 역시 그렇구요.”

“너답지 않게 웬 관용정신?”

인촌의 친일 행적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는 준혁의 태도에 유진은 비아냥거렸으나, 윤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인촌의 교육문화사업도 그렇지만, 그가 세운 경성방직 같은 기업체마저도 없었다면, 해방 후에 우리나라의 경제적 외양이 더 초라했겠죠. 준혁씨 말대로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백낙준, 김활란 두 사람의 친일행적은 꽤 노골적이었거든요.1) 이들 같이 많이 배우고 명석한 민족의 리더급 인물들이 다 친일 쪽으로 넘어갔다면, 그럼 정말 우린 희망이 없었겠죠. 비판할 건 비판해야죠. 이 두 사람이 더 비판받을 만 한 이유는, 일제 때엔 그렇게 목청 높여 일본을 찬양하고 미국을 욕하면서 학생들한테 참전을 종용하더니만, 일제가 물러가기가 무섭게 친미로 돌변해서 코리아 타임스란 영자신문도 발행하고 웰컴 유에쓰에이 현수막을 걸었던 기회주의적인 태도에도 있어요. 이런 기회주의 속에 미국교육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나 이해가 깃들어 있었을까 의심이 가죠. 어쨌든 이들이 친미주의자로 미군정과 결탁해서 대한민국의 교육체제를 확립했다는 것도, 많은 문제가 있는 역사의 단편인 것 같아요.”

듣고만 있던 유진도 합류했다.

“우리 싸부님께서 마지막으로 건네주신 자료에 있던 건데..... 친미로 급변한 친일 교육자들의 미국식 교육에 대한 신념이 의심스럽다더군. 예를 들어 ‘홍익인간’이 남한 교육의 대표적 이념으로 채택된 과정을 봐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한다는 바로 그 무색무취한 탈이념성이 그 당시에 미군정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된다는 거야. 왜냐면, 그때 미군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양쪽을 다 싫어했거든. 근데 친미파가 나서서 좌, 우 어느 쪽 색깔도 안 들어있는 너무나 착하기만 한 이념을 내미니까 아주 흡족스러워 했다는 거지.”

“그럼 미국의 교수님인 너희 싸부님께서도 친미 교육세력을 좋게 안 보시는구나.”


1)
백낙준은 미국 예일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하여 일제강점기에 고등교육과 개신교계의 지도급 인물로 활약했고, 해방 후에 연희대학교 초대 총장, 제2대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한국교육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다음은 1943년 12월 5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그의 글 ‘영원히 광망 뻗도록’의 일부이다:

광고무비(曠古無比)의 성전인 대동아전이 일어난 지 어언간 만 2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 날과 달을 거듭할수록 더욱 감개 깊이 생각되는 것은 이 싸움이 가진 도의적인 성격과 위대한 이상이다. 인류 역사상 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싸움과 투쟁이 있었고 동서를 통하여 민족의 흥망성쇠는 주마등처럼 번거로웠으나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하고 엄숙한 한낱의 전쟁을 가진 적은 없었다. 이제야 바야흐로 대동아의 해방은 일단락을 짓고 뒤이어 부흥의 찬연한 건설이 힘차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눈앞에 볼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싸움이 가진 숭엄한 이념에 옷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이 글의 뒷부분에서 영국과 미국을 악귀, 짐승이라고 비난하며 일본을 찬양했다. 김활란 또한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귀국 후 역시 고등교육 및 개신교계에서 활약했다. 해방 후에 이화여대의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그녀가 한국의 여성계 및 국제교육계에 남긴 족적은 거대하다. 다음 글은 태평양 전쟁 참전을 종용한 그녀의 글로, 1942년 12월에 잡지 ‘신세대’에 기고한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이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허둥지둥 감격에만 빠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지만 어쩔지를 모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갈래를 못 찾는 것도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 반도여성은 그저 내 아들 내 남편 내 집이라는 범위에서 떠나보지를 못했다. 떠나볼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자칫하면 국가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도여성에게 애국적 정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적었을 뿐이다. 지금가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막연하게 부러워도 했다. 장하다고 칭찬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그 각오와 준비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나라에 바쳐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대단히 막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에는 남편이나 아들의 유골을 조용히 눈물 안 내고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가져야 한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각오가 있을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내지 여성에게 배울 점이 많다. 우리 일본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강한 원인의 하나가 일본 여성의 숨은 힘이라 한다. 말없이 참고 나가는 그들의 힘은 강한 인(人)의 몇 배의 힘을 가진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는데 조용한 웃음으로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출처: 김삼웅 편저, 『친일파 100인 100문』, (돌베개, 1995), pp. 291,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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