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한·일에 주둔한 미군의 교육개혁

당시 미군은 일본 사회 전체를 개혁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품고 열도에 상륙했다. 개혁의 표면적 모토는 일본의 평화국가화, 또는 비무장화였고, 본질적인 목적은 일본이 다시는 미국에 군사적으로 대항하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이는 데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42년에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가 궤멸된 이후, 미국은 매우 힘겹게 태평양의 패권을 놓고 제국 일본과 경합한 끝에 핵폭탄을 두 발이나 터뜨리고서야 겨우 항복을 받아냈다. 따라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일본의 태도를 철저히 바꿔놓고자 했던 것은 미국의 행정부와 미국 국민들의 공통의 의지이기도 했다.

미국정부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사자로서 일본에 상륙한 ‘연합군 총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그는 소시적에 일본을 방문한 적도 있고 일본 역사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는 인물이었으며, 출중한 정치가적인 재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의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지휘 아래 미점령군은 일본 사회 전체의 개혁을 단행했다.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깊숙하고도 거대한 사회 개혁 프로젝트가 미합중국이라는 외세의 손에 의해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것이다. 전시의 군부는 공중분해 됐고, 그 핵심인물들은 전범재판에 회부됐으며, 군수산업의 본산인 재벌기업들도 해체됐다. 농지개혁으로 사회계층구조에 변화가 일어났고, 제국주의를 독려한 신도(神道)가 국교의 지위를 박탈당함과 함께, 전 국민을 군국주의의 노예로 세뇌시켰던 제국교육체제도 철저히 분해됐다.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라는 개혁의 정신은 신헌법에 단단히 새겨졌다. 점령군의 민간정보교육국이 담당한 교육개혁 또한 이 같은 어마어마한 총체적 개혁의 일부였다.

교육 민주화 기조를 비롯하여 미군의 교육개혁안 중에는 히로시와 같은 일부 일본 관료들이 내심 찬동하는 부분들도 적지 않았다. 엘리트주의적 학제를 파괴하고 미국식 평등지향적 학제를 수립한다든지, 학교교육의 군국주의적, 전체주의적 내용을 민주주의와 평화 지향의 가치관으로 교체하고 이 같은 정신을 새로이 제정한 교육기본법에 명문화한다든지 하는 등의 개혁안은 그들도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밖에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교육 행정체계를 미국과 같이 지방분권화하여, 지역 수준에 교육위원회라는 의결기관을 설치한다든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여 좌파 이론의 유통을 허용한다든가, 교직원 노동조합의 설립을 권장한다든가 하는 등의 개혁안에 대해서는 문부성 관리들이 대체로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일본을 민주화, 평화화 시키겠다는 미군의 기도에 내재돼있던 점령군으로서의 제국주의적 요소에 대해서는 관료들이 커다란 반감을 갖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맥아더 사령부가 직접 지휘하던 도쿄의 미군과는 현격하게 다른 태도를 갖고 있었다. 노련한 맥아더가 일본 민중에 대한 유화적 제스처를 십분 활용하여 개혁 드라이브를 가속화했던 반면에, 남한을 ‘관리’하러 온 미군은 마치 점령군과 같은 위압적인 태도 때문에 서울에서 인기를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일본을 점령한 미군에게는 일본의 비무장화라는 매우 중차대한 목표가 있었던 반면에,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식민지 통치자인 일본인들이 퇴각하게 될 한반도를 한시적으로 관리한다는 애매한 목표만을 갖고 있었다. 미군의 첫째 역점 활동은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을 보호하여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시키는 데 있었고, 이는 적국인 일본의 정부가 패전 이후에도 여러 채널을 통해서 미정부에 간곡히 요청한 바이기도 했다. 따라서 도쿄의 연합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의도했던 일본사회의 전면적인 개혁에 필적할 사회개혁 프로그램 같은 것을 남한에 진주한 하지 준장이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남한에 수립된 미군정은 골치 아프고 부담스러운 큰 개혁을 벌일 뜻 자체가 없었고 한국의 정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결여하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기존의 총독부 관료들을 그대로 기용하여 국가관리 대행자로 활용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육계라고 하여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규모와 심도의 개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미군정의 상대적인 무관심은 결국 일본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주체적인 주장을 신교육체제 수립과정에서 관철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친미성을 광고하여 미군정에 의해 발탁된 ‘교육4인방’의 김활란, 백낙준, 오천석 등 미국 유학파 학자들은, 개혁의지가 취약한 미군정 학무국의 장교들과 상당히 원만한 관계를 형성했고, 미국식 교육제도를 자발적으로 도입하는 데 앞장섰으며, 또 새로운 교육체제에 한국적인 색채를 가미하는 일도 여러 부분에서 성공했다. 이들은 학무국의 미군 장교들과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미국식 6-3-3-4 단선학제를 도입했고, 미국식의 지방분권화 된 교육행정체제를 수립했으며, 민주주의를 교육의 목표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새로이 도입된 미국식 교육제도의 원활한 보급을 위하여 한미교육위원회가 창설됐고, 이후 수많은 한국인 학자와 관리들이 미국의 대학으로 초청되어 미국 교육에 관해 훈련을 받고 돌아왔으며, 지속적으로 미국 교육학자들로 구성된 교육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하여 민주주의적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한국의 교육자들에게 전수했다. 한국교육의 미국화는 이렇게 해방 직후부터 꽤 순조롭게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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