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창의성 교육 - 서머힐 학교와 발도르프 학교의 케이스


1. 서설

영국의 서머힐(Summerhill) 학교는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규격화되어있는 기존학교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대표적인 역할을 해왔고, 독일의 발도르프(Waldorf) 학교는 전세계적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그 독특한 교육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두 학교들의 특색을 간단히 살펴본 후, 이들을 한국의 교육에 응용한다는 측면에서 어떠한 의미 -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 를 지니고 있는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두 학교에서 실시되는 창의성 함양을 위한 프로그램들 중 우리의 현실에서 활용하기에 적절한 것들이 있는가 살펴보고자 한다.


가) 개관: 서머힐 학교

서머힐 학교의 창립자 A.S. 닐(Neil)의 사후에도 여전히 그의 아내와 딸에 의해서 고유의 정신을 고수해오고 있는 이 학교는 그 규모에 있어서 대단치 않아, 보통 50-70명 정도의 학생만을 수용해왔는데, 1999년에는 영국 정부의 교육기준청(OFSTED)이 행한 부정적인 장학감사에 항거하여 서머힐 정신을 수호하기 위한 조직적인 투쟁을 벌였으며, 결국에는 서머힐 학생들의 승리로 끝났던 일도 있었다. 이들의 투쟁 활동에 쏟아지는 전세계 교육계의 관심과 지원이 이 자그마한 학교의 위대함을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서머힐 학교의 특징은 다음의 네 가지 목적에 드러나 있다:

첫째, 아동들이 감정에 있어서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게 해준다.

둘째, 아동들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셋째, 아동들이 자연스럽게 발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다.

넷째, 어른들에게서 받는 두려움과 강압을 제거하여, 좀 더 행복한 아동기를 보낼 수 있게 해준다.

이 네 목적들을 실현하기 위한 학교정책의 기본 노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동들이 자신만의 페이스대로 성장, 발달하고 자신만의 흥미를 추구할 수 있도록 선택권과 기회를 부여해준다. 서머힐은 어떤 특정한 기술이나 지식을 갖춘 특정한 유형의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동들이 자신이 되고 싶은 바대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을 그 소임으로 삼는다.

둘째, 아동들이 자신만의 목표를 세우고 성취감을 맛볼 수 있게 하는 한 편, 강압적으로 부여된 평가방식으부터 해방시켜준다. 아동들은 권위 있는 아동학습이나 학업성취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는 성공의 인위적인 기준에 자신들을 맞추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셋째, 아동들이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만큼 놀 수 있도록 완전한 자유를 준다.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놀이는 아동기의 발달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자발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놀이는 어른들의 손에 의하여 억압받거나 학습 활동으로 유도되어져서는 안 된다. 놀이는 아이들의 것이다.

넷째, 어른의 판단이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아동들이 느낌(feeling)의 모든 영역들을 체험해볼 수 있게 해준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명백하게도, 지루함, 스트레스, 분노, 실망, 실패와 같은 부정적인 결과들은 개인의 발달에 있어서 필요한 한 부분인 것이다.

다섯째, 아동들이 자신들을 돌봐주고, 또 그들 자신도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도록 해준다. 이런 공동체에서 아동들은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자유를 향유할 수 있고, 민주적인 과정을 통하여 공동체의 생활을 변화시킬 힘을 갖출 수도 있다.

한마디로 서머힐 학교의 가장 큰 특색은 자유에 있다. 방종에 빠지지 않으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거의 완전한 아동의 자유는 아동들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과 자발적인 동기부여에 의해서만 배움의 경험을 하도록 허락해준다. 자유로운 아동들은 심리적으로 건전하며 어떤 방식이나 형태로든 자신이 좋아하는 배움을 택하게 되는데, 이렇게 스스로 선택한 배움의 과정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된다. 철저하게 민주적이며, 교장으로부터 가장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하게 평등한 이 학교 공동체 안에서 아동들은 기존의 학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일구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 개관: 발도르프 학교

이 학교는 독일의 교육자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독특한 ‘인지학 (anthroposophy)'에 기초하여 서머힐 학교처럼 진보주의(progressivism)와 가까운 내용의 아동 중심적, 자연주의적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전세계적으로 900여 개의 학교와 1,200여 개의 유치원이 설립되어 있다. 인간 정신(spirituality)의 초자연적인 본질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슈타이너의 교육철학은 특히 아동의 발달 수준에 적합한 교육을 중시하고, 지적인 면과 감성적인 측면 모두를 고르게 강조한다. 손을 사용하는 작업이 많은 것이 하나의 특징이며, 기계적인 지식의 습득을 지양하고 창의성이 우선시 된다. 아동 정서의 자연스러운 발달을 위하여 미술과 음악이 매우 중시되며, 이 둘이 타 교과 과정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고 거의 모든 과정에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한 관찰자의 발도르프 학교에 관한 요약이다(곽노의 『교육개발』 1999년 여름호, 64-72):

“슈타이너의 발달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7년의 리듬 속에서 이루어지며 유아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구별 가능한 특수한 학습과 소질의 성향들이 있다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제1단계(출생-7세)는 생명체의 탄생, 제2단계(7-14세)는 감정체의 탄생, 제3단계(14-21세)는 자아체의 탄생의 기간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발도르프 학교는 3-6세를 위한 유치원 교육, 7-14세를 위한 1-8학년 교육, 14세 이후를 위한 9-13학년 교육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밖에도 발도르프 학교의 특징으로는 한 교사가 1학년부터 8학년이 될 때까지 한 학급을 줄곧 맡아서 학생과 교사 사이에 매우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과, ‘에포크(epoch) 수업’ 형태를 취하여 “3-4주간을 단위로 매일 아침시간 8시부터 9시 반까지 한 과목의 기본수업이 집중적으로 진행”되게 한다. 또한 “다시 그 과목을 에포크 수업하는 데는 약 17주 후에나 다시 하게 된다. 이는 이 기간 동안에 배운 것을 소화, 흡수하여 잠재 의식화하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에포크는 1년에 한두 번 같은 학과를 진행하므로 어린이들은 일정기간을 쉼으로써 잊어버리는 시간을 갖게 된다.”(앞의 글, p. 69)

서머힐 학교와 같이 발도르프 학교에서도 아동들의 자유가 존중되기는 하나, 어떤 아동은 7년 동안 아무 수업도 듣지 않아도 괜찮은 서머힐 만큼 철저히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일단 수업이 시작한 후에 교사가 학생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고, 항상 자연스럽게 수업의 활동에 참여하게끔 유도한다는 점에서 아동의 자유를 존중함을 엿볼 수 있다. 슈타이너 역시 A.S. 닐 만큼이나 고집스럽게 독보적인 교육 사상의 소유자인데, 그의 독특한 종교적 관점을 깊숙이 수용하고 있는 발도르프 학교가 바로 그 종교적 뉘앙스로 인하여 도처에 적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흥미롭게도, 두 학교 다 현재 반대자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2. 서머힐과 발도르프, 그들의 문제점들

여기에서 두 학교들에 내재해 있는 교육적인 문제점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이들의 창조력 증진 사항들을 우리나라의 교육에서 수용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문제점으로 대두되는 사항들을 논의해보겠다. 문제점을 먼저 논하는 것은 매력적인 프레젠테이션 방식은 아니지만, 수입할 상품이 갖고 있는 본질적 한계를 뚜렷이 인식하고 그 상품의 가치를 평가해보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작업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먼저 문제점을 따져 보기로 한다. (두 대안학교의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적 조명은 스탠포드 대학의 오형모 교수의 비평문을 참조했다: Newsletter: Creativity Forum International, Summer, 2006.)

첫째로 두 학교 모두 철저하게 창의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즉, 어떤 부수적이거나 첨가물과 같은 개별적인 프로그램을 운용하여 아동의 창의성을 키우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모든 물리적, 제도적 구조와 교과 과정과 교육 철학 전반에 걸쳐서 창의성의 배양이라는 목적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에서 재래식 학습과정을 조금 보완해보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창의력 증진 프로그램을 전개할 때에, 우리나라 교육의 전통적 학습 방식이 서머힐이나 발도르프 같은 곳에서 행하여지는 창의력 증진 노력의 그 비전통성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추상적인 논의를 떠나 좀 더 실질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학교에서 어느 정도 학생들에게 창의성을 심어주는 것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한다면, 그 주된 원인은 창의성 존중의 철저함과 방대함, 또는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음’이라는 그들의 특색에서 찾을 수 있을 터인데, 이런 철저함과 방대함을 갖추지 않고 단지 ‘첨가’하는 정도로 창의성 배양의 효과를 어느 정도 거둘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게 된다는 말이다. 부언하자면, 그들은 그렇게 많이 해서 그만큼 거두는데 우리는 요만큼만 해서 얼마나 거둘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둘째는 첫 번째 문제보다 더 추상적일 수도 있으나 지극히 현실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잠재성이 있는 문제로, 두 학교의 교육철학에 내재해있는 종교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두 학교 설립자들의 종교관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시도하지 않겠으나, 간단히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전통적인 서구의 종교관, 즉 기독교적인 시각과는 아주 거리가 있는 종교관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반대 세력과 부딪친 사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들 수가 있다. 서머힐의 창설자 닐의 종교관은 반기독교주의로 비칠 만큼 기성의 기독교계에 대한 비판적 의견으로 가득 차 있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그가 기독교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교회에 대한 불신이 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발도르프의 슈타이너 역시 정통 기독교 신학과는 불일치하는 종교관을 보여주며, 이 두 사람의 종교관을 굳이 분류해보자면, 20세기 후반에 서구에서 득세한 뉴에이지(New Age)의 관점과 보다 유사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종교관이 독특하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필자는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의 종교관에 거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 신자 인구를 감안할 때, 탈유대주의(non-Judaic) 성향의 서머힐이나 발도르프 교육사상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서구에서 이 두 학교의 종교관에 대하여 비판의 기치를 드높인 세력은 물론 기독교 단체와 또, 인문주의(liberal arts)의 신봉자들이다. 필자의 눈에는 이 비판 세력의 견해들이 꽤 경직되어 있고 관용성(tolerance)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비판과 반대가 우리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나라의 어느 사설 교육기관이 기독교 신자를 대상 고객에서 배제하지 않는다면, 일종의 진보적이고도 전위적으로 보이는 서머힐과 발도르프의 종교성,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태도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제시하는 창의성 배양 프로그램들이 깊숙한 면에 있어서는 창설자들의 종교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문제는 고객의 의식수준에 있다. 서머힐과 발도르프에서 말하는 창의성이란, 실로 대학 입시와는 아무런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 그런 것들이다. 수능의 논술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차원의 ‘창의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현재의 수능 시험 같은 것에는 오히려 방해를 줄 수도 있는 차원의 창의성을 서머힐과 발도르프는 키워주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객들, 즉 학부모들이 그런 창의성을 과연 원하는가가 필자의 의문이다.

넷째는, 현학적인 논의로 들릴 수 있겠으나, 상품의 원산지의 사회문화적 환경에 관련된 문제이다. 두 학교가 애초에는 영국과 독일에서 시작하였으나 이제는 거의 서구 전체의 대안 학교를 대표할만한 명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20세기 후반기 서구사회의 어떠한 요구에 부응하여 서머힐과 발도르프가 일어났던 것인가를 물어볼 수 있다. 또, 서구에서 발생한 그런 요구가 동일하게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하고 있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두 상이한 문화권에서 발생한 요구(demand)의 성격이 유사할수록 그 상품(서머힐과 발도르프의 창의력 증진 방식)을 수입하는 행위가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정보화 시대의 도래라든가, 지식기반사회의 형성 같은 것들은 서구에나 한국에나 공히 일어나고 있는 전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지만 과연, 탈현대화(post-modern)를 겪은 서구에서의 요구가 아직 현대성(modernity)의 획득도 이루지 못한 한국에서의 요구와 어느 정도나 유사할까? 상업적인 용어로 다시 말하자면, 상품이 잘 팔렸던 나라의 소비자와 우리나라의 소비자가 얼마나 유사한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의식하고 있을 때에 두 독특한 학교들이 보여주는 창의성 증진을 위한 활동들을 좀 더 비판적이고도 현실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기존의 자료로부터 수집이 가능했고, 우리나라의 교육에 어느 정도 적합해 보이는 프로그램들을 소개하겠다. 단순히, 서머힐의 경우보다 발도르프 학교 쪽이 더 많은 자료들을 인터넷을 통해 제공해준다는 이유 때문에 여기에서 발도르프의 프로그램이 더 많이 소개된다.


3. 서머힐 학교의 창의성 배양 프로그램

서머힐에서는 노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은 놀고 또 논다. 학교 측은 노는 것이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것이 어느 정도나 중시되고 있는가는 놀이의 종류에 팀 스포츠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훈련과 연습을 수반하는 스포츠 행위는 서머힐의 놀이가 아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이들이 이 길고 긴 노는 시간을 메우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프로젝트를 벌이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연극이다.

서머힐의 연극 공연은 상당히 자주 열리는 듯 하며, 대부분 학생들이 직접 만든 희곡을 상연한다고 한다 - 물론 기존의 희곡도 종종 사용되지만. 이 희곡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아동 개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탁월한 기회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아동들은 무대 의상이나 장치, 소품 등을 만들기도 한다. 남자애들보다는 여자애들이 희곡 작성에 더 열심이며, 특히 10세 아래의 남자애들은 거의 관심을 안 보인다고 한다. 또 연극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도 몇 있는데, 때로는 이들이 자신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다 한다.

그러나 연극에 대한 긍정적인 관찰이 부정적인 것을 압도한다. 아이들은 일단 연극상연을 계획하고 나면 자신의 배역에 아주 몰두하게 되는데, 모두 자발적으로 출연하는 것이라 창의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실제의 상연을 통하여 자신의 표현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연극에 출연하는 아동들은 자신감을 갖게 되고, 또 여러 다른 배역들과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팀웍도 배우게 된다.

진실된 창의성의 발휘를 위하여 희곡의 종류가 규정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종류는 지극히 다양하여, 매우 엉뚱하고 허무맹랑한 것으로부터 심오한 주제를 다루는 세련된 것까지 출현하기도 한다. 교사의 역할은 거의 없어 보인다. 모든 것을 아이들이 알아서 한다. 여기서 창설자 닐의 명령이 유효하다. 즉, 끝없이 아이들을 신뢰하라는 명령.

연극을 만들고 공연하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창의성이 댄스 파티를 통해서도 발휘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테크노 춤이 유행하면 모두가 테크노만 추는 그런 획일적인 문화가 아니라, 모든 학생 개인들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스텝을 만들어내고 또 즐기는 것이 당연한 그런 종류의 댄스 파티인 것이다.


4. 발도르프 학교의 창의성 배양 프로그램

발도르프 학교에서도 특히 유치원의 수준에서는 창의력(creativity)이 재창조(recreation; 레크리에이션)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아동들은 놀이를 통해서 자신들이 인식한 어른들 세계의 일상을 재창조하는데, 이 과정이 풍부한 창의력을 요구하며 또, 실제로 창의력을 키워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머힐에서와 같이 놀이가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이 놀 때에는 단 한가지의 사용방법 밖에 없는 장난감(퍼즐 같은)은 창의력 증진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며, 아이들이 스스로의 상상력을 이용하여 가지고 놀 수 있는 것들이 도움이 된다. 발도르프의 놀이에서 요구되는 수준의 세심하고 정교한 창의성 증진 방안은 실제로 발도르프 학교의 교사 교육을 철저히 이수하기 전에는 실행하기 힘든 것이어서, 피상적인 모방만으로 한국에서 실시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발도르프의 생활과 일과 전체가 독특한 창의성 계발 활동으로 가득 차 있으나 대부분은 우리나라 학교에 도입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이는데, 그래도 몇 가지 특별활동의 예들은 우리의 환경에서도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하나는 발도르프 고유의 블록식(block) 수업과 행사이다. 블록식 수업은 하나의 정해진 소재를 가지고 일정기간, 예를 들면 1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활동을 말한다. 즉, 그 블록의 기간 중에는 그 소재만이 학습의 대상이 되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그 블록에 참여하는 전체 학생들이 아예 수학여행 식으로 한 장소에 가서 일주일 동안 합숙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합숙 활동은 우리 현실에 적합하지 않으나, 일정 기간 동안 지정된 한 소재만을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여 학습한다는 것은 실행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여기에서 ‘학습’이라 칭하기는 하지만, 기존 학교에서 행하여지는 종류의 공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참여하는 학생은 동일하거나 비슷한 연령층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예로써, 발도르프 학교에서 중요시되는 파르찌발(Parsifal) 블록을 살펴보자. 이 블록 기간에는 중세 전설의 기사인 파르찌발의 일생에 관해 학생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습을 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전설적인 인물의 생애가 슈타이너의 교육철학의 핵심을 표출시키는 효과적인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블록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아주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파르찌발의 생애를 배우게 된다. 그의 생애가 그가 실존 인물이던 아니던 간에, 한 순진한 소년이 세상을 배우고 자기의 자아를 발견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야기 거리로서의 교육적 가치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나 전설 등은 꼭 파르찌발의 전설 이외에도 여러 다른 설화 등으로부터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자아 발견과 세계관 형성의 과정을 보여주는 풍부한 이야기 거리가 있는 인물을 선정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파르찌발 블록에 참여하기 적절한 연령층은 고교생 수준이라고 하는데, 필자가 접한 사례에서는 고교 2학년생들이 그 참석자였다. 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에, 파르찌발의 생애를 가르치는 첫 번째 접근 방법은 전반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어쨌든 간에 전통적인 강의식 교수방법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두 차례에 걸쳐서 교사 또는 강사가 이 전설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이야기 해주고, 아이들의 연령 수준에 맞게끔 그 줄거리를 분석하여 제시해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이 전통적이고 재래적인 교수 유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간략하게, 그러나 요점과 핵심을 명확하게 보여주어서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도록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철저한 연구와 분석을 거쳐 줄거리와 그 분석 내용이 만들어져서 교사들에게 제공되고, 똑 교사들 역시 그 전달 방식에 대한 충분한 사전 교육을 받아야 하겠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또 한 가지를 더 학생들에게 전달해주게 된다. 파르찌발의 전설에서 나오는 수많은 구성 요소들이나 소재들 중에서 과학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과 역사학적인 의미가(더 나아가서는 사회과학적 의미까지도) 있는 것들을 풀어 이야기해주는 것이 그것이다. 즉, 천문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함의가 보이는 대목을 들어 현대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논의해보고, 전설에 등장하는 시대, 인물, 제도, 기구, 공동체, 사회상 등을 역사학의 지식을 빌어 소개해주는 것을 말한다.

교사의 지식 전달과 논의 전개보다 훨씬 중요한 파르찌발 블록의 활동은 말할 나위 없이 학생들 자신의 활동에 있다. 크게 세 가지 활동이 학생들에게 요구된다. 첫째, 교사로부터 전설의 줄거리와 분석 등을 듣고 난 후에, 학생들은 1시간 30분 동안 감상문을 작성해낸다. 이 감상문에는 특별한 형식과 틀 같은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또 교사에게 제출한 후에 이것이 어떤 평가나 판단 또는 추궁의 근거로 사용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교사로부터 듣거나 또는 인쇄물을 통하여 대략의 줄거리를 파악한 어떤 전설 전체를 학생들의 두뇌 활동을 거쳐서 재구성한다는 데에 있다.

둘째, 학생들은 이야기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인상 깊었거나 재미있었던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게 된다. 적절한 표현 도구(사인펜이건 색연필이건 물감이건)를 사용하여 충분하지만 과도하지 않은 시간 동안 그림을 완성시킨다. 발도르프 학교의 경우, 다른 학생들보다 먼저 그림을 완성한 학생들은 자신의 감상문이 기재되어 있는 공책의 페이지 여백에 그림을 그려서 장식(decoration)을 하도록 유도된다. 발도르프 학교에서와 같이 단체 합숙을 하여 1주일이라는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파르찌발 블록을 행하는 경우에는 이와 같은 학생들의 글과 그림이 모여서 하나의 개인 포트폴리오를 만들게 되기도 한다.

셋째는 모든 학생이 참여하여 학급 전체의 공동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발도르프 학교의 경우는 블록 행사 기간 중 매일 순번을 정하여 두, 세 명의 학생이 합의된 형식에 의하여 공동 발표물의 글과 그림을 작성한다. 이 과정은 물론 그 자체로 아동들에게는 의미 있는 학습 경험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한국의 실정에 맞게 창의적인 방안을 마련하는 편이 좋을 듯 하다. 발도르프에서는 후배 학생들에게 물려줄 커다란 공책을 공동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전통인데, ‘후배’의 개념이 모호한 사교육기관(학원 등)의 경우에는 자신의 공동 성과를 만들어 낸다는 성취감과 또 이것을 타인들에게 발표하여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측면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공책보다는 커다란 캔버스 종이를 활용할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는, 발도르프 측의 글에는 상세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학생들 개개인의 이 전체 블록에 대한 반응을 표출시키는 과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학생들 각자가 전체적으로 느낀 점이라든지, 파르찌발의 전설로부터 받은 감동, 또는 블록 활동 중 어떤 부분으로부터라도 느낀 것들을 전체 토의의 형식을 통해서 발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과정에서는 심지어는 초인지적 분석까지도 학생들이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초인지적 분석(metacognitive analysis)'이란 학습자가 자신이 학습하고 있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하여 마치 제3자가 된 듯이 인식하고 분석하는 차원을 뜻한다. 거창한 이름을 갖고 있으나 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인지활동이다.

발도르프 학교의 파르찌발 블록 같은 학습활동은 아동의 창의성 발현과 증진이나 사고력 계발을 위한 훌륭한 기회를 제공해줄 것으로 판단된다. 창의성에 대한 최신의 학문적 축적에 대해서는 필자가 심층 연구를 할 필요가 있으나, 학계를 떠난 실제 학교라는 차원에서는, 즉 서머힐이나 발도르프 학교 등이 보여준 예에서는, 학생이 교사의 지시나 간섭 없이 자신의 머리와 손과 몸을 사용하여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가 가장 창의성을 키워주고 또, 사고 활동을 자극해주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발도르프 학교의 프로그램 중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았으나 중요시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도입 가능하리라고 보이는 것으로 축제(festival)가 있다. 축제의 전반적인 구상이 창의성 계발의 차원에서 매우 적절해 보이기 때문에 여기에 간략히 소개하려 한다.

발도르프에서는 한해 동안에 걸쳐, 거의 매달 다른 축제 행사를 가질 것이 건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축제는 발도르프의 종교적인 본질을 반영하여, 신성과 인간성의 합일 같은 것을 찬양하며 즐기는 행사가 주로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축제가 항상 종교적인 것은 아니며, 또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엄숙함과 경건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도 전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아동들은 이러한 것에 별 관심이 없으므로.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축제의 기본 개념이다. 즉, 교사와 아동들이 어떤 지정된 축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즐기기 위하여, 즉 재미를 위하여, 계획하고, 준비해서 실행에 옮겨본다는 것이다.

한 학기의 시작인 개학식에서부터, 부활절, 할로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 미국의 전통적인 축일들과 학기의 끝인 종업식까지, 또 매달 다른 여러 문화의 전통적 축제일도 포함시켜서 일년 내내 축제를 연결시키는 구상이 발도르프 학교 내에서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축제일의 선정은, 만일 도입한다면, 우리의 사회 문화적 성격과 학교나 학원의 고객층의 성격을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하겠다. (발도르프 측에서 민감하게 여기는 것은, 학생들이 일률적인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문화권의 출신이기 때문에, 한 가지 종교적 색채만을 강조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중언하자면, 축제라는 포맷 자체가 학생들의 흥미와 참여를 유발하여 효과적으로 창의성 증진을 수행할 수 있는 형태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창의성 교육에 관하여 문헌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 그리고, 최근에 오형모 교수와 같은 전문가의 자문을 받은 바에 의하면 - ‘창의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학계에서는 아직 완전히 정의되어 그 실질적 양태들에 대한 확고한 이론적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처지에, 필자의 견해로는, 여러 상업적 기관들에서 제시하고 있는 ‘창의력 증진’이나 ‘EQ 향상’과 같은 표어들은 거의 ‘아무렇게나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인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실효성을 거두면서도, 교육적으로도 진실함과 정직성을 갖춘 창의성 증진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와 준비 절차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만약에 이러한 절차를 뒤로 미루고, 급행 절차를 한시적으로나마 취해야 한다면, 우선은 오랜 경험을 가진 학교나 교사의 의견을 들어보는 편이 효과적일 테고, 그러한 점에서 서머힐이나 발도르프와 같은 대안학교의 예를 살펴보는 것이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간디학교나 이오학교와 같은 대안학교들로부터 더욱 많은 정보를 입수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제시해본 아이디어들은 우리나라의 학교와 학원에서의 적합성을 꼼꼼히 따져본 후에 더욱 심층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유진의 학교' 보강 원고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