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교육수요자에 대한 문교부의 태도1)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중앙 교육정책은 일본과는 조금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1969년의 중학교 평준화 정책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행정부는 일본과 비교할 때, 밀어붙이기 식의 강력한 정책 집행력을 과시하였다. 그 해의 중학교 입시 철폐와 대입 예비고사 실시는 한국 교육시스템의 구조적 측면을 거세게 흔들었던 사건들이었다. 그렇다면 1969년의 이러한 일대 개혁조치들은 문부성과는 대조적인 당시 한국 문교부의 성격을 대표할 만한 것들이었을까? 한국의 교육수요자들은 일본의 수요자들처럼 중앙 교육부의 행동반경을 제한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일까? 한국전쟁 이후의 교육수요자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이들도 일본의 교육수요자 못지않게 ‘극성스러웠음’을 엿볼 수 있다.

경찰력과 더불어 다양한 극우조직들을 통하여 독재적 공포정치가 자행되고 있던 이승만 치하에서도, 자녀의 교육문제에 있어서 학부모들은 반정부노선적인 행동을 감행하는 등 놀라운 용기를 보여 주었다. 학부모들은 학생의 공부할 시간을 빼앗는다며 정치적 목적의 학생동원에 항거하였다.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하여 이들은 학교 교장과 교육위원회에 압력을 넣고 문교부에 맞섰다.

당신은 ‘북진통일’이 공식적인 정부의 구호였으며 따라서 군사훈련은 학교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1954년에 국방부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군부대에서 일정 기간 동안 훈련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곧 학부모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학부모들에게 압력을 받은 문교부는 국방부 안에 반기를 들었고, 이러한 정부 부처간의 대립은 마침내 이대통령으로 하여금 직접 나서서 문교부의 손을 들어줘야 할 사태에까지 미쳤다. 이 때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국방부는 그러나 1958년에 다시 이 문제를 들고 나왔고, 또 한 번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1950년대 동안에 교육수요자들은 ‘목소리내기’의 옵션을 주저 없이 여러 번 선택하였다.2) 이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쳐, 중학교 입시에 학업성취도 테스트를 실행해 보려던 문교부의 1954년 안은 좌절되었으며, 1957년에 학생들의 명문 초중고 집중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추진하였던 학군 재배열안 또한 포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교부장관이 반대데모로 인하여 수모를 겪는 일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문교부는 주저앉아 있지 않고, 민감한 사안인 6-3-3-4 구조의 변경을 기도하여, 중등학교의 행정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구분하는 방안을 추진하였고, 이 역시 교장과 학부모의 저항에 부딪쳤다. 이미 명문 중학교에 자녀를 입학시켜 놓은 학부모들은 새로운 정책으로 인하여 자녀들이 고교입학을 위한 또 한 번의 시험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들이 반대시위를 벌였으나 이번엔 문교부가 애초의 안을 고집하고 나섰고, 결국에는 잠정적 피해자의 권익을 보호해주는 한도 내에서 절충된 안으로 낙찰되었다.

1957년에는 한 인기 교장의 전근을 둘러싸고 학부모들의 반대가 거세어져서 학부모들이 서울교육청과 시청마저 점령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중학교 입시의 중요성 때문에 교육수요자의 초등교육에 대한 열의 또한 대단하였던 것이다. 입시의 결과는 학부모들에 의하여 세심하게 관찰되었으며, 아주 작은 불공정의 사례도 눈에 띄었다 하면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곤 했다. 이 시기의 교육정책을 연구한 마이클 세쓰(Michael Seth)는 이러한 국민들의 드높은 관심 덕분에 타락상이 난무했던 당시 사회상 속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공정한 시험이 행하여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눈에 불을 켜고 시험의 부정사례를 감시하는 반면에, 많은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서는 부정한 행위를 서슴지 않아 치맛바람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에 교원에 대한 뇌물증여를 근절하자는 공식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입시문제가 교육수요자들에게 얼마나 중대한 이슈이며, 문교부가 이들의 집념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둘이 1960년대에 발생하였다. ‘극성’ 학부모들이 펼친 유명한 무즙파동과 창칼파동을 겪으면서3), 문교부 측은, 장관의 상의 셔츠가 찢겨져 나갔고, 법정 패배를 맛보았으며, 차관을 비롯한 여러 명의 관리가 옷을 벗었고, 학교장과 교감이 호텔연금을 당하는 등 치욕을 당하였다. 창칼파동 바로 이듬해인 1968년에는 졸업자격미달 대학생들을 졸업에서 탈락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문교부가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였는지 대부분 졸업허가를 내려줘 다시 한 번 언론의 비아냥거림을 받게 되었다.

[중략]

한국에서도 교육과 특히 입시에 관하여 당시의 교육수요자들이 극도로 높은 관심을 보여 주고 있어, 사정은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의 학자들은 대개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 신분상승의 욕구, 일제시대의 교육기회 억압 등을 해방 후 교육수요의 분출을 설명할 주요 원인으로 들고 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중등, 고등교육을 향한 열망과 그 입시에의 집념이 해방 후 새로 축조된 교육시스템의 원동력이었으며, 문교부는 그 거대한 배의 운전자에 불과하였다고 하겠다. 한국전쟁의 종료 후, 제3차 미국교육사절단의 일원이었으며 훗날 한국교육을 연구하는 학자가 된 도날드 애덤스(Donald Adams)는, “한국인들의 열의”와 “자신의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커다란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태도”가 전쟁으로 파괴된 교육시스템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는 집안의 아들을 명문 대학에 보내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강한 가족적 열망을 목격한 후 이러한 예측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사회기관 중, 학교가 전쟁의 와중에서 정상화를 회복한 유일한 기관으로 간주된다. 또한 전후의 경제적 파탄조차도 한국인의 교육을 향한 열망을 잠재우지 못했다.

전쟁 직후의 극도의 경제적 피폐상 속에서, 의무교육 수준에서 마저도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 학교에 자녀들을 보낸다는 것은 부모들이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희생을 감수했음을 의미한다. 정부가 교육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이미 정부에 세금을 내고 잇었던 학부모들은 육성회 등을 통하여 추가분의 금액을 학교에 지불하여 운영을 가능케 하였다. 신뢰할 만한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히 어느 정도 학부모들이 비공식적으로 학교운영을 도왔는가는 결정지을 수 없으나, 여러 관찰자들은 전체 학교비용의 10-50%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간에, 국가교육재정의 상당한 부분이 교육수요자들의 자발적인 지원으로 메워졌음은 명백하며, 관찰자들은 한국 교육시스템이 엄청난 규모의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교육수요자들의 재정부담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열성적인 교육수요자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입학시험들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시험들은 학생의 6-3-3-4 사다리에서의 진급을 결정짓는, 유일하게 지속되며 철폐되지 않은 방식이었다. 사정은 일본과 흡사했다. 즉, 모두가 입시를 증오했으나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시험 이외에 문교부가 제안한, 학교성적을 포함한 모든 기준들이 전부 수요자들에게 거부당했다. 한국과 일본의 교육수요자들 중 어느 쪽이 더 입시에 집착하였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겠지만, 양쪽 모두에게, 기존의 절차와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정부의 시도를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입시가 극도의 중대한 이슈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입시절차의 어떠한 변화도 오랜 기간의 공들인 수험준비를 무효화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었으며, 동시에 불확실한 재적응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교육수요자들은 입시개혁을 위한 시민조직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치열한 학력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쪽을 택하였다.

[중략]

그간의 숱한 입시방식의 변동만을 강조해온 한국 교육사의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을 잠시 접어두고 따져볼 때, 이와 같은 국민들의 입시관련정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문교부가 입시절차를 개혁하는 데 있어서의 운신의 폭을 좁혔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그토록 비난받아온 문교부의 ‘조령모개식’ 입시정책 변경은 문교부가 자신이 의도하는 바대로 입시절차를 바꿀 수 없었음에 기인하는 바 적지 않았다고도 볼 수가 있다. 한 전직 문교부 장관은 입시개혁에 있어서의 문교부의 고충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장관으로서 다른 것보다도 입학시험이나 교과서 편찬, 대학생 통제 등에 관련된 정책이나 계획 목표를 수행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왜냐하면 관심을 가진 학부모나 대학이나 기업인들이 기자나 국회의원 등을 동원해서 이미 결정된 정책을 바꾸라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당시 문교부 측의 의견을 들어보자. 전직 문교부 관료인 박일재도 이 장관과 유사한 의견을 표명한다:

‘교육의 문제만큼 어렵고 복잡한 문제도 드물다. 그것은 교육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너무나 클 뿐만 아니라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인터뷰에 응한 전직 문교부 관료들은, 문교부의 교육수요자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소재에 관한 필자의 호기심에 약간은 불편함을 느끼는 듯이 보였는데, 이는 아마도 과거에 정부의 고위직 공무원으로 봉직하였다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터뷰가 끝날 무렵쯤에는 단 한 사람도 문교부가 여론에 극도로 민감했음을 부정하지 않았고, 몇 사람은 실제로 문교부가 국민을 두려워하였다고 토로하였다.

전직 관료 전용철은, 정치가들이 교육수요자의 의견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보았다. 문교부와 여당과의 상호협조적인 관계를 볼 대, 정당 정치인들의 두려움이 문교부에도 전하여졌을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과거 정권의 군사적 배경에 관하여 언급하며, 박일재는 “교육에 관해서는 군인도 약했다”고 표현한다. 전직 차관 장인숙은, 교육개혁에 있어서, 아주 사소한 실패의 조짐도 언론과 사회 전반의 소란스러운 반응을 야기하고, 때로는 그 안건의 담당 관료에 대한 심한 질책이나 심지어는 그의 사퇴마저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문교부로서는 진정으로 바라는 정도의 개혁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고 회상한다.

문교부에게 대학입시가 어느만큼 심각한 임무였던가는 문교부가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학력고사의 D-데이를 위하여 실시했던 준비과정에서 단적으로 예시되고 있다. 전직 차관 정태수는 다음과 같이 뚜렷하게 회상한다.

문교부는 최대의 주의를 기울이고 철저한 태세로 심각하게 입시 당일의 준비를 하였다. 대학 교수와 고등하교 교사로 구성된 시험 출제진은 철저한 보안이 유지되고 있는 지정된 장소에서 사실상의 연금 상태에 놓여졌다. 이들의 전화통화 내용도 감시당하고 기록되었다. 마침내 완성된 시험 문제지를 전국에 배포하는 날이 문교부 관리들의 긴장을 더해주며 다가온다. 그 거대한 시험지 더미 중에 단 한 뭉치만이라도 분실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사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험지를 제주도에 보내는 것은 배편으로 행해졌는데, 이는 비행기 사고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시험지를 배달하는 배가 침몰할 경우를 대비하여 또한 대의 배가 항구에 대기하고 있었다. 정태수는 이 배포과정을 직접 지휘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만약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사직서를 제출할 각오로 일에 임하였다고 회고한다.

‘조령모개’를 일삼았던 문교부가 실은 교육수요자와 입시개혁을 두려워하였다는 역설적 논의로 돌아가 보자. 문교부가 뻔질나게 입시절차를 바꿔왔음은 한국인들에게는 주지의 사실이다. 간단히 표현해서, ‘각 대학별의 본고사와 전국단위의 학력고사 둘 사이에서의 왕복과, 둘에 덧붙는 다른 방식들과의 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합들을 테스트해보는 것’이 조금은 복잡한 문교부의 입시체제 수정역사를 요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입시절차를 개선하기 위하여 아마도 가능한 모든 방법들이 문교부에 의해 실험되어 왔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김종철은, 대학 입시를 빈번하게 수정한 주된 원인은 입시개선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와 문교부의 - 그리고 정권 그 자체의 - 여론에 대한 과도할 만치 민감한 반응에 있었다고 본다. 한국 교육시스템 전체에서 차지하는 입시의 핵심적 역할을 인정하며, 세쓰(Seth)는 다음과 같이 한국정부의 여론민감성에 관하여 평하고 있다:

‘한국교육에서 입시체제가 중심적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은 사회적 지위의 결정요건으로서의 교육, 한국인의 서열과 지위에 관한 관심, 사회적 신분상승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인 열망과 믿음 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확고하고 일관된 입시정책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얼마만큼 교육시스템이 사회적 압력과 전통의 무게의 영향 하에 있고, 또 권위주의적인 국가와, 그 국가의 교육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제약하고 있는 비공식적인 압력의 채널, 그 양자 사이의 모순에 의하여 얼마나 교육 시스템이 영향 받는가를 반영해준다.’


일본의 문부성이 대학입시절차를 과감히 개혁하는 것으로부터 물러나서, 시험지옥이라고 불리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고쳐볼 강한 정책을 펴는 것을 주저하고, 심지어는 그 문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는데 반해, 한국의 문교부는 입시를 고쳐보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들로 실험해볼 만큼 소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하겠다. 양쪽 다 여론에는 민감하였다. 문부성과 문교부가 달랐던 원인은 각자가 속해 있던 상이한 정치문화와 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의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민당 주도의 정권이 쭉 지속되었다. 한국에서는 거듭되는 사회적, 정치적 위기들이 새로이 대두하는 군사정권들에 의하여 잠재워졌다. 또한 일본과 한국의 정권은 여론을 대하는 데 있어서 서로 다른 접근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앞선 일본의 경우에는, 문부성이 장기간 숙고하고 계획한 이후에야 어떤 행동을 개시하였다. 대조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정권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는 문교부로서는 늘 속성결과를 보기를 원하였고, 따라서 교육의 문제영역을 직접 손대곤 하였다. 그렇다 하여도 이것이, 군부의 권력자에 의해 지시받고 있던 문교부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문교부의 지배적인 행동양식은 문부성의 그것에 비할 때 세련되지 못했고 직접적이며 노골적이었지만, 문교부의 행동은 대개는 아주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으며 근본적이라고 할만한 부분을 건드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문부성의 적인 일본교직원조합과 같은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 없었다는 것은, 문교부의 개혁정책의 집행 시에 눈에 띄는 큰 투쟁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문교부는 문부성과는 달리, 입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곤 하였다. 그러나 문교부의 정책들은 여전히 그 범위가 좁았고, 강도 역시 약했다.

1968년 문교부의 공식적인 정책목표 중, 첫 번째가 중학입시의 철폐였고, 박정희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였던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이 두 번째였다. 세 번째는 대입예비고사의 실시였다. 1973년에는 문교부가 한국교육의 문제영역들을 발표했는데, 그 첫째가 “국적 없는 교육” - 대통령이 친히 강조한 - 이었고, 둘째는 “오도된 교육열,” 셋째는 “입시위주 교육”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입시의 폐해에 대한 공식적인 시인을 보여주는데, 이는 문부성이 오랫동안 입시의 사회병리적인 효과를 인정하기를 회피했던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인에도 불구하고, 문교부가 수행했던 가장 혁신적인 대학입시절차의 개혁은 1968년의 국가예비고사 제도 도입이었고, 사실 이것은 이보다 얼마 앞서서 문부성이 유사한 형태로 시도했던 것이었다.

왜 문교부는 좀더 광범위하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한 프로젝트를 시도해보지 못했던 것일까? 정범모 등은 이익집단들이 지속적인 개혁정책의 집행을 막아왔다고 주장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나라의 대통령과 여당이 그 정치적 생명을 걸고 도전해야할 문제며, 교육부의 몇몇 “묘안”의 발상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 입시와 입시준비교육의 개혁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인 강한 저항 세력들이 많기 때문이다. 좀 심한 비유일지는 몰라도, 그것은 마치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마약밀수 집단소탕에는 많은 정치가가 그 정치적 생명, 심지어 육체적 생명마저 각오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해묵은 입시와 입시준비교육엔 특수 이해집안이 많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 필자들은 1993년의 저서에서 반대 이익집단으로 입시산업, 교육자들 자신, 학부모를 들었다. 그러나 ‘입시산업(학원, 참고서 출판사, 전문 과외 등)’이라는 것이 이 연구의 대상인 1970년대 초에는, 영향력 있는 파워 그룹을 형성할 만큼 강력했다고 보기 어렵다. 학교 교사 또한 그들의 공동이익을 주장할 만한 대표성 있는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그들의 상관인 교장이나 교감들은, 자신들과 또 수하의 교사들을 승진시킬 수도, 또 강등시킬 수도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문교부로부터 하달되는 지시사항들을 따르기에 바빴다. 한편, 1969년의 중학교입시 철폐에 대한 사립중학교들의 반대는 결연한 대통령과 그 지원 아래의 문교부 앞에서 무력할 뿐이었다. 대학들 역시 처지가 비슷하였다. 문교부가 총장과 교수들을 임명하고, 각 학과의 정원결정 등 대학행정의 세부사항까지 관리하는 상황에서, 대학들은 정부의 정책을 직접적으로 반대할 자율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남은 입시개혁을 막은 이익집단은 학부모, 즉 교육수요자들이다. 이는, 한, 일의 교육시스템의 주된 동인(動因)을 심각히 추적한 시도들이 교육수요자를 하나의 독립변수로 고려하지 않았을 대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설명의 공백현상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연구에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바와 같이, 최소한 교육수요자를 중요 독립변수로 설명의 틀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 교육시스템의 구조의 핵심부분인 입시의 개혁은 문교부에게 극도로 중요하며 어려운 임무였다. 그래도 문부성과는 달리, 한국의 문교부가 보여준 행동은 소심하거나 미약하지만은 않았다. 문교부의 교육수요자에 대한 민감함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은 비로 근본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여도, 문부성의 그것과는 달리 직접적이며 솔직했다. 문부성과 비교할 때 문교부는, 늦게서야 입시의 압력을 경감시킬 간접적인 방식이나 국가 주도적인 노동력 선발방식을 고안하려 하였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문교부는 입시를 개선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문부성보다 덜 소심했고, 더 직접적이었다. 문부성은 문교부보다 더 신중했으며 또한 성숙한 조직이었는데, 이는 하나의 전문 조직으로써 자신이 취할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잘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입시를 개혁해보려는 문교부의 직접적인 시도들은 당시의 사회로부터 그다지 지지를 받아 본 적이 없었으며, 자신의 조직으로서의 성향이나 국가기관으로서의 목적 등과 부합할 정도로 교육시스템을 구조적으로 개조하는 데 실패하였다. 문부성과 마찬가지로, 문교부의 행동이 성공을 거둔 분야는 교육의 내용과 이념이었고 구조는 아니었다. 문교부의 행동에 제약을 준 중요 배역인 교육수요자들은 특별히 문교부가 교육시스템의 구조적 영역에 손을 대는 것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세쓰(Seth)의 주장이 이러한 경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학교 교육을 받으려는 만연한 욕구가 교육시스템을 축조한 주된 동력원이었다. 국가는 오직 자신의 목적이 대중의 교육수요와 충돌하지 않는 영역에서만 교육정책을 통제하거나 성장을 지휘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나라의 교육의 역사를 그려 볼 때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교육시스템 그 자체 등 여럿의 주요 배역(historical actors)들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시점에 따라서 각 배역의 영향력의 정도는 달라지겠고, 그 어느 하나만이 지속적으로 변화 없이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한, 국가의 교육행정부가 그 눈에 잘 띄는 활동상에도 불구하고, 항상 교육시스템의 변화에 영향을 끼쳐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 교육수요자라는 배역의 자리가 없다는 것은 사실(史實)의 정확한 반영이 아닐뿐더러, 전체적 그림을 충실히 그릴 수 없게 만드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비록 본 연구가 예시한 우리나라의 교육소비자의 행동이 특정 사회계층 - 즉, 엘리트 집단 - 에 편중되어 있으나, 이들의 행동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배후에는 보다 넓은 사회계층을 통틀어 공유되고 있는 교육열이 작용하고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현재의 교육현실에 대한 보다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도, 이 교육열의 주체인 교육수요자들의 모습을 우리의 교육사라는 큰 그림에 심층적으로 그려 넣는 작업이 필요하다.


1)
‘수요자(consumer)’는 교육을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적 개념으로 이해할 때 활용되는 표현인데, 학생과 학부모가 여기에 포함된다. 교육은 소비재가 아니라 투자의 성격이 강한 ‘상품’이기 때문에 ‘교육 소비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이 글은 필자의 다음 논문의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 논문 안의 각주 및 출전 표기는 여기에서는 생략했다: 한석훈, “교육정책결정에서의 교육수요자와 중앙교육행정부의 역학관계: 한, 일의 비교, 1950-1973” 『한국교육』, 1999. Vol. 26, No. 2, pp. 121-123, 125-126, 137-143.

2) 허쉬만은 한 체제나 조직의 구성원들이 체제에 대해 불만이 있을 때 ‘목소리내기(voice)’나 ‘빠져나가기(exit)’ 두 가지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고 봤다. 목소리를 내도 체제에 변화가 없을 때에는 체제에 대한 충성도(loyalty)가 현저히 약화돼서 ‘빠져나가기’를 선택하는 이가 많아지게 마련이다. 현재 한국의 교육체제를 놓고 볼 때, 이른바 ‘기러기 아빠’의 급증, 대안학교와 홈 스쿨링의 증가 등은 ‘빠져나가기’의 몇 가지 예들이라 할 수 있다; Albert O. Hirschman,
Exit, Voice, and Loyalty: Responses to Decline in Firms, Organizations and State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3) 1965년도 중학교 입시의 한 4지선다 문제에 대하여, 워낙에는 정답으로 인정 안 된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돼야 한다며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났던 사건과 이듬해의 입시 문제에서 공작용 창칼의 사용법에 관한 정답 시비로 인해 학부모들이 거세게 저항했던 사건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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