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스템 어낼러시스 (System Analysis)

    
21세기 현재의 한국교육에 잔존해있는 조선시대의 유교교육적 요소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현대적 관점에서 봐서 유교교육의 긍정적인 부분인 전인교육, 인성교육적 요소들은 한국의 교육, 특히 중등교육에서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반면, 유교교육에서 부정적으로 보이는 부분인 교사중심 교육, 암기 의존 학습, 비실용적이며 형식주의적인 교과 내용1), 시험대비형 교육, 위계질서 중시하는 권위주의적 교수방식, 관주도형 중앙집권적 행정구조 등은 여전히 학교교육에서 현저하게 작동중이다. 이와 같은 관찰을 바탕으로 유교교육과 현대교육 사이의 연관성의 의미를 따져보자.

각 시대의 교육(체제, 제도, 실행 모두 포함)은 그 시대와 그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교육이 그 사회의 이른바 불완전한 측면들을 개선해주기를 희망하지만, 그 사회의 거울인 교육이 그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빈번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선 사회의 교육은 당시의 압도적인 주류 이념인 신유학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신유학적 교육이 신분차별, 양성차별과 같은 조선 사회의 전근대성을 뛰어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앞의 관찰에서와 같이, 조선의 성리학적 교육 전통을 우리는 비판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다. 그러한 우리의 시각은 '현대적(modern)' 시각이라 하겠다. '현대적 시각'이 듣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실은 우리의 시각도 '현대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형성된바 매우 크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조선의 교육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었듯이, 조선의 교육을 재조명하는 우리 자신의 시각도 비판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해서, 근세 한국교육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속의 전근대성과 근대성 양자를 공히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나아가, 전근대성으로부터 근대성으로의 교육사적 이행의 성격에 관해서 숙고해 보는 작업 역시 필요할 것이다. 조선교육이 현대 한국교육으로 이전되는 과정 도중에 ‘근세’라는 단절 현상이 일어났는데,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개입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단절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연속성 보다 더 강한가, 아니면 약한가 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큰 줄기의 질문이 되겠다.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역사의 흐름에서 완전한 단절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매우 커다란 단절이 있었음 또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단절이냐, 연속이냐?' 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함이 아니다. 그 단절, 또는 연속성의 정도가 우리의 현재의 교육 현실에, 또 우리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조선시대와 현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짐짓 팔짱끼고 각 시대를 조감해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가능한 정도만큼 우리는 '현대'로부터 역시 벗어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위에 제시된 질문을 체계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교육을 개념적으로 크게 그 구조적 측면과 내용/이념적 측면으로 양분하여 보기로 하자:
 

• 교육의 구조적 측면: 선발 및 배정 장치인 학제, 행정 체계, 사회의 자원 동원 체제 등

• 교육의 내용/이념적 측면: 교육 목적, 교육 사상, 교육과정, 교과서, 교수법 등.


조선의 교육은 현대의 교육의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만큼,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아 있을까? 아니면 근대화 과정에서 거의 사라져버리고 만 것일까? 바꿔 질문하자면, 지금 우리 교육 현실의 어느 정도를 우리의 전통적 교육이 설명해줄 수 있을까?

결론은, 두 측면에 공히 조선 교육의 유산, 또는 자취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이건 좀 싱거운 결론일 수 있겠지만, 그 유산, 또는 자취가 남아있는 방식, 또는 상태는 좀 더 흥미롭다 하겠다. 즉, 조선 교육의 유산이 한국의 현대 교육에 노골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부분 보다는, 잘 드러나지 않는 깊숙한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유교적 가치관인 충효정신 및 상하 위계성은 더 이상 한국의 국가교육과정에 뚜렷하게 공식적으로 명시돼있지 않지만, 학교생활에서 사제지간 및 상위 행정기관과 하위 기관 간의 위계성은 엄연히 상존하고 있다. 헌데, 더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은근히 내면에 비공식적으로 잔존해있는 교육 전통이 여전히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데 있다. 이는 '잠재적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 학생의 배움에 미치는 영향의 강력함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조선 교육의 유산, 또는 자취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에서 엿볼 수 있다:


• 구조: 관(官) 주도형 정책, 중앙집권적 행정 및 재정 경향, 대학입학시험의 사회적 기능 등등

• 내용/이념: 권위주의, 획일성, 상명하복, 위계질서, 도덕 강조, 자기 수련, 암기 중시, 교사관 등등


너무 '부정적인 유산'들만 많이 열거됐나?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찾아낼 수 있는 조선 교육 전통의 '긍정적인 유산'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탐색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적 교육의 영향이라는 독립변인이 당당히 남아있으니, 우리가 조선 유교교육의 유산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 과연 순수하게 조선의 유산인지, 아니면 조선과 현대 사이에 끼어든 일제의 유산인지는 쉽게 판명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판명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이 후대에 행사한 영향력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구조와 내용/이념'이라는 분류를 '자루와 술'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새 자루에 새 술을 부었나, 아니면 헌 술을 부었나? 혹시 오래 된 술의 향기가 더 좋은 것은 아닐까? 헌 술을 붓기에는 자루가 너무 새 것은 아닌가? 아니면, 새 것, 헌 것이라는 시각 자체가 문제인가?


1)
 물론 현대 공교육제도가 제공하는 교육내용은 실용성을 그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 국어, 수학, 외국어 등 주요 과목들은 현대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시민이 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지식을 다루고 있다. 문제는 본질적으로 실용적이어야 할 교과목들이 실질적으로는 거의 실용성이 없다는 점에 있다. 만약에 모국어의 효과적인 활용(글 이해하기, 글쓰기)과 국문학적 유산에 대한 소양의 심화라는 국어 과목의 목표가 실제 입시문제 대비식 국어교육에서는 도외시되고 있다면, 수학적 사고의 지평 확장과 문제해결능력의 함양이 시험문제 해설식 수학교육에서 무시되고 있다면, 외국인과 만나서 대화하고 외국어로 읽고 씀으로써 의사소통하는 실질적인 능력의 배양이 문법위주 영어교육에서 사장되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국어, 수학, 영어 교육은 비실용적이고 형식주의적이란 비난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런 교육이 필답시험에서의 고득점 획득을 도와준다는 한도 내에서는 실용성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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