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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이
에이도록 매섭게 추운 어느 겨울 날, 두툼한 코트로 둘러싼 몸뚱아리도 후들후들
떨리는 저녁 무렵. 서울의 유명한 달동네 봉천동 고개 밑의 번잡한 거리.
나는 곧 다정한 벗을 만나 따뜻한 식당에 들어가 몇 만원 쯤 돈을 내고
뜨뜻한 안주에 술 한잔 나눌 것이었다. 그런 혹독한 추위도 지하철역에서
식당까지 가는 짧은 거리에 잠시 겪는 겨울 밤의 낭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런 밤에도 따뜻한 음식과 술 한잔은 내 몸을 녹여줄테고,
나는 친구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푸근한 마음으로 귀가할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 또한 평화로운 잠에 빠져들 것이다....
내 갈
길을 횡단보도의 빨간 불이 막았다. 그곳엔 곧 수십 명의 행인이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차디찬 겨울 밤 공기 보다
훨씬 더 차가웠을 보도블록 위에서 땅을 보고 엎드려서 몸을 질질 끌며 행인들 무리에게 다가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두 다리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심지어는
그 흔한 찬송가 한 곡 틀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 시간 그런 혹독한 추위
속에서 그가 그 바닥을 기고 있다는 것 하나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었기에
다른 어떤 보조 효과가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의 고통이 추위처럼 가슴에
파고 들었다. 나는
천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그의 '모금통'에 넣었다.
호주머니에
천원 짜리가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만원 짜리밖에 없었더라면 그걸 줄
수 있었을까? 요즘 내 벌이도 신통치 않은데...
여전히
그 걸인은 나에게 있어서 타인이었다. 그 때는 영하 10도 아래의
혹한의 밤이었고, 그 걸인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어두운 불빛
아래서 확인한 순간 그가 인내하고 있을 추위가 내 몸으로 느껴져 왔다.
(그런 구걸도 다 '비지니스'고 어쩌고 하는 얘기를 모를만큼 내가 어리고
순진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걸인은 나에게
있어서 타인이었다. 나는 천원 한 장 주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버젓이 내눈 앞에 펼쳐지는 인간의 고통을 등뒤로 하고 나는
다른 행인들 속에 파묻혀 급히 횡단보도를 건너 내갈길을 갔다. 천원으로
간신히 '양심'의 체면치레를 하고는.
2.
솔직히
말해서 나에겐 아직도 맑시즘이 '영성수행'과 완전히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난 젊은 '이상주의자' 맑시스트들의 순수함을 찬미한다. 맑시즘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변질되건, 맑시스트들이 늙어서 어떻게 세상과
타협하건 그런 것들 다 제쳐두고, 젊은 순간의 그 순수함을 찬미한다.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찬미한다. 타인의 아픔을 차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맑시즘이란 도구를 집어들고 이상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기 때문에 - 짧은 한 순간 동안이라 하더라도.
헌데 나에게는 때때로, 내가 알게 된
놀라운 신의 은총과 가난한 이웃이 마치 별개의 이슈인 것 같다. 물론
변명하자면, 신과 함께 하는 생활을 추구한 이래로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이 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밥퍼 목사님과
같은 퍼줌의 행위 없이는 나는 가짜라는 걸 깨닫기도 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 둔 이후의 불확실한 경제 상태에서도 그런 금전적
지원을 지속한 것은 내 딴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한 일이란 사실 천원 짜리 지폐 한 장과 똑같은 것이었다.
천원 한 장으로 '때우고' 갈 길을 계속 가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타인의 아픔을,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혹한 속에 보도블록을 기는 걸인의
고난을 차마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젊은 맑시스트의 전적인
헌신이 나에겐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메시지를 믿는다면서도
혹한 속의 걸인은 여전히 타인이었다. 신의 은총은 신의 은총이고, 가난한
이웃은 가난한 이웃일 뿐인 채로.... 나의 정신적, 물질적 풍요를
타인과 나눔으로써 신의 은총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다인가? So what? .... 그래봤자 기껏 천원 한 장만 던져주는 주제에.
3.
나는
소위 '뉴에이지' 신앙이라고 불리우는 쪽으로부터 많은 정신적 계발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비판하듯이 뉴에이지는 지나치게 투명하다.
연꽃만 보여주고 진흙은 무시해 버린다. 밝고 영롱하고 깨끗한 것만
말하고 어둡고 질퍽거리고 더러운 것은 외면한다. 역사의 시각으로 파고들면,
결국 뉴에이지 신앙이란 것이 물질적 풍요가 만연한 서구 사회에서도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사회계층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그들 모두 -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교양있는 사람들인 - 가 하나이고 지금 이 순간을
신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우주는 풍요롭다는 메시지가 비교적
쉽게 흡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도시와 시골을 채우고 있는
다수 빈민들에게도 그런 메시지가 접수될 수 있을까?
나는 고상하고
세련되며 '열려있는' 디팍 쵸프라의 메시지와
고집스럽고 투박하며 '닫혀있는' 볼리비아의 카탈리나
메시지 사이의 크나큰 간극을 볼 때 좌절감을 맛본다.
그렇지만,
좌절감은 영적으로 좋은 경험이다. 내 머리에 의존하는 걸 포기하고,
세상의 모순을 이성으로 풀어보려는 자아의 집요한 습관을 떨쳐 버리고,
신께 의지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에. 신은 내게 무어라 하시는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신다. 그저 자애로우실 뿐이다. 그 자애로운 품 안에
있으면 세상의 모순을 내 시각이라는 협소한 틀안에 끼워맞춰 넣으려는
기도를 그만 두게 된다. 천원 짜리밖에 주지 못하는 나의 소심한 모습도
축복으로 다가온다. 나를 용서하고 더 이상 좌절해 있지 않는다. 그리고
일어나서 다시 계속 가던 길을 갈 수 있다.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에게 공식 인터뷰 자리에서 한 사람이 질문했다.
당신의 작품에는 밝고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되어 있고 어두운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은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백남준은 이렇게 답했다.
"오늘
나온 질문 중에서 가장 좋은 질문이다. 참 부끄럽다. 할말이 없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겠다." (김용옥,
石澍畵論, 통나무 1992, p.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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