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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곁에 두기를 좋아했다. 굳이 책을 읽지 않고 있다
하여도 주변에 책이 많은 것이 좋았다. 꼭 지적 허영심이라든가 남들에게
과시하고픈 욕구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살다보니 공부 쪽에 발을
들여놓았고 어쩔 수 없이 많은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십대 때부터 읽은 책들을 버리지 않고 쌓아두고
있는 이유는, 옛적에 나를 키워주었거나 아니면 나의 성장을 방해했던 많은 책들과
시대 분위기와의 관계에 대하여 언젠가 일종의 사회사(社會史)적인 책을 한 권 쓰고 싶기 때문이다.
헤아려 보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이천 권은 훌쩍 넘을 이 책들 덕분에 나는 이사를
다닐 때마다 비지땀을 흘리고 고생한다. 어쨌든 이번에 연구실을 마련하면서도
이 책들 옮기느라 땀깨나 뺐다.
연구실 벽의 두면이 책으로
도배가 되었다. 새로 입주하며 이런저런 시설 보수 등으로 여러 사람들이
다녀갔고, 그들 중 몇 사람은 쌓여 있는 책에 - 반 이상은 외국어로
된 '원서'에 - 압도된 듯한 표정으로, 웬 책이 이렇게 많으냐며
한 마디씩
하고 갔다. 손과 육체를 사용하여 땀흘리며 몸을 움직이는 정직한 직종에 종사하는
그들이 나의 책더미에 주눅이 드는 것을 보기가 싫었다. 책더미는 그저 자료,
데이터일 뿐인데... 그것이 그들에 비해 우월한 나를 드러내주는 것이
결코
아닌데... 입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오해만 사고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한 그런
언사가 머리속을 맴돌았다. 그냥 한 마디로 미안했다. 책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책장 앞에서 폼잡고 사진 찍지 말아야지.'
연구실이
주로 책으로 꾸며졌다. 내면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하고 혼자 정적인 작업에
빠져있기를 즐기는 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탓인지
어릴 적부터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돈은 들이지 않더라도,
화분 하나, 낡은 장롱, 자그마한 백자 도자기 등이라도 이용해서 나만의
공간을 꾸민다. 그러다 보면 나의 공간에서는 분명히 나만의 분위기가
묻어나오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도 감지하게 된다. 나만의 분위기...
이번 주 업데이트에 올린 토마스 머튼의
이런 글귀가 떠오른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 만의 분위기를 향유하고자 하는 그 비밀스러운 욕망으로부터 누가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이 세상 죄인들의 그저그런
삶과 뚜렷이 구분되어지는 그 달콤한 묘미를 구하지 않고서 그 누가 선행을 할 수 있겠는가?'
긴
세월 동안 나는, 세속적인 성공보다도 오히려 '나만의 분위기'를 얼마나
추구해왔었던가. 내 표면의 자아는 그 나르시시즘을 먹고 자라왔다.
나는 언제나 남과 다르기를 원했다. 무리에 속하는 것을 태생적으로 싫어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나를 육아하신 방식 또한 나의 이런 성향을 부추겼다.
더러운 땅바닥에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딱지치기나 하기 보다는 얌전히
집안에 들어앉아 '세계 명작'을 읽을 것을 종용하셨으니. 그렇게 자라나면서 혼자
잘난 척 하며 지내던 나는 한 마디로 밥맛 없는 아이였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신촌 쪽에서 잠시 대학을 다녔을 때,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민중 민주' 운동에 직,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던 그때에는, 과
친구로부터 '귀족적'이라는 지적을 들은 적도 있었다 - 귀챦은 족속... 허나, 언제나,
어디에서나 사회적 고립을 아랑곳 하지 않았던 나는 줄곳 내가 원하는
대로만, 나만의 방식대로, 내 주관을 고집하며 살아갔다. 한국사회에서는
잘 융화될 수 없는 이런 극단적 개인주의 성향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많이 부드럽고 원만해졌으나, 지금까지도 나는 여전히 오로지 내 방식만을
고집한다. 그러한 고수의 밑바닥에는 '나는 다르다' 는 믿음과 나만의
분위기를 추구하는 나르시시즘이 어느 정도는 깔려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해부해볼 필요를 나는 느낀다.
며칠
전 밤에는 BBC에서 죤 레논 특집 다큐멘터리를 봤다. 난
특별히 비틀즈를 좋아하지도 않고 죤 레논에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사십줄이 되어서 이런저런 일로 알게 된 세 여성이 내게 동일한 별명
하나를 붙여줬는데,
'죤 레논'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가수와 나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길래 세 사람이나 똑같은 지목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한
나머지 그 BBC 프로를 열심히 봤다. 그리고는 만족했다. 내가 유명한
사람을 닮았다는 평을 들어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서 찾아내어서
세상을 향하여 입증하기를
줄기차게 바라는 그 성향을 죤 레논에서 쉽게 찾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는 다르다'라는 믿음이다.
죤 레논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의 표면의 자아가
만족했다. '다름'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부치면 꼭 훌륭한 결실을
보게 된다는 실제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엉성한 논리전개이지만,
어쨌든, 레논이 그러했으니 나 또한 꼭 훌륭한 결실을 볼 것이라는 논의가
가능해진다. 언젠가 한애규라는 조각가가 쓴 글이 기억난다: '「양철북」에서
나는 하나의 태도를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그 각자의 감각이 제 아무리
외곬이고 잘못 됐더라도 그것이 철저하고 순수할 경우 나중에는 어떤
보편성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중앙일보, 2002.11.23)
그래,'철저하고
순수'한 추구 그 자체를 문제 삼을 건 없겠다. 다만, 철저하고 순수한
추구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고, 자신의 그러한 이미지가
투사된 '나만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정신을 빼았기게 되는 그 순간, 그때에
문제가 일어난다. 그때엔 추구 그 자체가 이미 더 이상 순수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 순간, 영적 오만의 기운이 주사 바늘을 통해서 몸안에 흘러들어가는
차가운 약물과도 같이 내 의식 속에 흘러들어온다, 아니 내 무의식 속에
흘러들어온다. "Uninstall"하기 어렵게.
나는 지금
순수한가? 연구실의 책더미는 허영과 과시인가, 아니면 순수한
데이터인가? 연구실에 조성되고 있는 나만의 분위기는 나를 타인들로부터
분리시키는 비밀스러운 도구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다가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방편일 뿐인가? 나만의 길은 나를 고립시키기 위한 나르시시즘인가,
아니면 참된 나의 강력한 박애주의적 요청인가? 죤 레논의
세속적 성공이 부러운가, 아니면 그의 순수와 천재가 부러운가?
깊은 산속의 선승은 자신 안의 낙원에 안주하는 것인가, 아니면 중생에게
다가가고자 용맹정진하는 것인가? 나는 지금 이 글을 '나만의 분위기'라는
향기를 은은히 퍼뜨리고 '다르고 특별한 나'를 은연중 광고하기 위하여
쓰고 있는가, 아니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쓰고 있는가? 도대체
이런 해부의 과정이 결론에 이를 수는 있는가?
물론 이런 내면의
해부는 결코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이성에 의해서는. 아마도
이것은 해부와 분석과 결론지음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선택은 '되어짐(becoming)'이 아니라 '있음(being)'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나는 한 쪽을 선택하여 그러한 존재로 있는다. 그것이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의 내면의 여정이 통과하는 순환고리의 필연적인
종점이라면, 그러니까 어짜피 그쪽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면, 영성을
추구하는 나는 무엇 때문에 내면의 해부라는 소모적이고 불필요해보이는
과정을 자꾸만 되풀이해서 기도하는가?
나도 모르겠다.
팔자인가 보다. 더 해부해보자. 사랑의 신의 품 안에서.
그러나...
이런 위험한 해부와 그것이 수반하는 자신에 대한 질문, 때로는 자신이
온 존재를 다 던져서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한 의문마저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런 질문과 의문의 화살은 나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겨누어져 있으므로. 이것도 일종의 써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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