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 공원의 연꽃을 보며 회상해보는 지난 여정
 

제주도를 떠나는 엿새째 날,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저와 큰딸은 페리에 차를 싣고 완도로 가서 서해안 고속도로로 돌아왔고, 아내와 둘째는 안락하게 비행기 편으로 귀가했습니다. 첫째 딸 시시(역시 애칭)는 집 떠나던 날에는 아빠와 둘이서만 장거리 여행을 떠나고 커다란 배도 탄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신이 났더니만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속에서는 지루함으로 내내 몸을 비틀더군요.

다행히 바다를 건너오면서도 물결이 잔잔하여 편히 세 시간여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차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와서는 배의 객실에서 VCD 만화 한 편을 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서울에서는 흔해 빠진 노트북이 완도행 배속에서는 진귀한 물건이 된 듯 했습니다. 너른 평상을 깔아놓은 듯한 객실에서 나이 든 어른들도 우리 어깨 너머로 만화를 힐끔거렸고, 특히 네 살 쯤 먹은 계집아이가 우리에게 들러붙어 한참을 함께 갔습니다. 그 아이가 때때로 노트북 키보드를 두 손으로 쾅쾅 쳐대는 바람에 기계가 약간의 오작동을 했고, 그 아이를 노트북으로부터 떼어내느라 제가 애좀 먹었습니다. 다행히 아이의 아빠가 여러 차례 아이를 우리로부터 떼어 놓아 주려고 왔다갔다 한 바람에 끝까지 만화를 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딸이 그 여자 아이와 놀아주며 살살 달래주었음에도, 아이의 부모는 저의 눈길을 내내 피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자기 딸이 귀찮게 하는 것이 미안했었겠지만, 도회지 사람들처럼 당당하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여유있는 미소로 대하는 그런 태도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부부의 겉 모습은 아주 초라한 편이었구요, 저 자신은 산지 7, 8년은 됐지만 아직도 미제 티가 나는 세련된 남방을 걸친 도시 사람 모습에 값비싼 - 실은 6년이나 된 고물인 - 노트북을 두드리는 부티를 풍기고 있었다는 것이 그 사내로 하여금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서울에서도 상류층, 엘리트의 모임이나 행사에 참석하여도 특별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화려한 외빈들과의 행사일수록 세련된 영어로 분위기를 잡는 편인 미제(美制) "Ph.D."인 저는, 나이 먹고 나서 사회적으로 열등감을 느껴본 기억이 없습니다 - 금전적으로는 저 자신의 절대적 열등성은 잘 알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하여 열등감까지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가 빈곤 속에서 문화적 주변(periphery)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수많은 나의 동포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은, 완도행 페리의 객실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연상 '氏發, 氏發' 해대시는 농어촌 분들의 거친 입담에, 딸내미를 데리고 앉아 있는 저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나 그 쌍욕 속에 담겨있는 그네들의 좌절감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국가'를 위하여 '삼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힘없는 그네들이 희생양이 되어야만 한다는 '조국'의 논리 앞에 어떻게 점잖 빼고 온순히 앉아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나와 그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분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를 동등하게 마주보며 미소를 나누기 위해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을까? 이것도 또한 나의 탐욕을 줄이고 없애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릴 적에는 혼자 신나게 여기저기를 싸돌아 다니며, 주로 멋진 자연에 감탄하고 그속에 홀로 있다는 고독감을 즐기는데 빠져 있었습니다만, 이즈음은 지방에 다닐수록 내 동포들의 빈곤을 보며 스스로가 부끄러워 지고는 합니다.

이번에 제주도를 다녀오면서도 나 자신의 경박함, 비좁음, 위선 등을 간헐적으로 목격하곤 했습니다. 늘 말하듯이, 그런 것이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나도 몸뚱아리 가진 사람이니까요. 그 따위 것들을 계속 갖고 있기 때문에 수행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해탈했다면 수행은 뭣하러 하겠습니까. 나는 나의 소중함을 믿습니다. 그래서 '남'도 나처럼 소중함을 믿습니다. 형편없는 구석 많이 가지고 살고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이런 나를 사랑하는 나는 이 몸뚱아리와 마음에 지배받는 나가 아닙니다. 그러한 진짜 나를 오늘도 찾을 것을 허락해주시는 자비로우신 신께 또 다시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저 자신이 부족해도 그대로 사랑하며 이대로 행복하겠습니다. 불행보다는 행복을 퍼뜨리는 것이 더 낫겠죠. 제주의 푸른 바다를 보며 그리워한 님을 지금 이 순간도 저는 그리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