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 저는 제주항에서 아침 8시 20분에 카페리에 차를 싣고 완도로 떠났고, 처자식들은 오전 중에 항공편으로 귀가했습니다. 올해에는 저 혼자 집까지 드라이브하는 기회를 얻었기에 하루를 몽땅 홀로 즐기는 기분으로 귀로에 올랐습니다. 완도 가는 배에서는 또 다시 오랫동안 갑판 위에서 바닷 바람을 즐기다가, 작년과는 달리 꽤 붐비는 객실로 기어들어가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놓고는 제주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등 작업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완도에서 하선하여 섬의 서쪽 일주 도로를 유유히 완상하며 드라이브를 시작했습니다. 늘 동쪽 보다는 서쪽 일주 도로가 한산한 것 같습니다. 완도에서 해남, 해남에서 영암, 나주로 이어지는 국도에는 교통량이 적습니다. 이번에는 하루 종일 혼자 즐기며 드라이브할 요량으로 일부러 목포의 서해안 고속도로 쪽으로 향하지 않고 비잉 돌아가는 국도를 택했습니다. 영암 부근의 국도 휴게소의 기사식당에 들어갔더니 5천 원에 백반을 파는데, 1인분이 역시 한상 가득, 도저히 혼자서 다 먹어치울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식판 반납구에는 '음식을 남기지 마세요'라 적혀 있습니다. 육류 하나, 생선 두 가지, 대여섯 가지의 나물에 서너 가지의 밑반찬과 두세 가지의 김치와 젓갈, 그리고 국과 찌개까지... 음식을 도통 남기지 못하는 습성이 몸에 철저히 밴 저로서는 전라도에서 혼자 다니며 밥 사먹는 것이 늘 딜레마를 안겨주는 체험입니다. 남은 반찬 다 싸가지고 집에 가져가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몰아 나주, 함양, 무안을 거쳐 나머지 구간은 고속도로를 타고 귀가했습니다.

함덕과 금릉의 해변에서 백사장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면서 안락한 그늘막 쳐놓아 제 식솔들의 '구역'을 점령하고는 신나게 논 기억.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공간 속에 가정이라는 안전한 공간을 그대로 옮겨 놓고 싶은 남자의 욕심을 다 부려봤습니다. 여행을 위한 모든 것이 완비되어 아이들은 끊임없이 재미있게 뛰놀기만 하면 되는 지상 낙원을 조성하고, 그 낙원 위에서 행복해 하는 제 새끼들의 모습이 보고 싶은 남자의 욕심을 올해에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경험을 해봤습니다. 이런 경험 한 번도 못해보는 남자들 아주 많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한 욕심이 거대해지고, 가족의 소중함에 과도하게 사로잡히게 될 때, 남자들은 왜소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3의 애너킨 스카이워커의 파멸 배후에는 이와 같은 소중한 가족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라 하여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만 하는 것이 우주의 순리라는 것을 수용하지 못한 미성숙한 천재의 불행한 고뇌를 애너킨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결국 존재의 소명이라는 것은 제 손에 쥐고 있는 소중한 것을 부여안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모든 것의 소중함을 - 동시에 그 모든 것의 허망함도! - 받아들이는 데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전자를 끝없이 지키겠다는 불가능하면서도 어리석은 욕망을 져버리지 못한 상처입은 영혼인 애너킨의 모습을 이 세상 많은 사람들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욕망을 놓아버리고 있는가? 계속 자문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이란 초월적인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여행을 다니다 보니, '그 무엇'에 대한 다채로운 심상들이 문득 문득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 이미지들이 전생의 것들일지, 무의식의 조작일지 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 이미지가 동반하는 매우 생소한 삶 속에서의 실존감이 제 정신을 종종 뒤흔듭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생각도 못해본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내가 그 이미지 속의 주인공이며 그 속에서는 지금과는 영 동 떨어진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여행중에 불현듯 저를 엄습합니다. 이런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지. 그 느낌의 가느다란 끈은 주로 혼자 가는 여정 속에서 의식의 수면 위로 조금씩 떠오릅니다. 그 끈은, 잡으려 하면 의식의 늪 속으로 가라앉아버립니다. 그래서 무심하게 산천을 바라보며 길을 가다가, 그 끈이 저절로 떠오르기를 예상하기만 합니다.

이런 의식의 희미한 끈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불러 일으킵니다. 저는 이 질문을 접은지 꽤 되었습니다. 나는 신의 종임을 안 순간 이후로. 그래도 그 끈의 간헐적인 떠오름을 숨죽이며 기다립니다. 마치 수업 시간에 선생님 눈을 피해 장난 칠 궁리하는 개구장이처럼. 현상계를 넘어선 차원의 신비의 세계는 인간의 두뇌적 역량으로서는 담을 수 없을만큼 깊고도 넓어 사람의 정신을 앗아가버리는 매혹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제주도를 다녀오면서도, 단 몇 초에 불과한 느낌이었건만, 나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실존하고 있는 모습을 느꼈습니다. 그 느낌은 상당히 강렬했고, 저는 그 정체를 줄곳 궁금해 했습니다. 그렇지만 5박6일의 여정을 모두 무사히 마치고 귀가해서는, 오직 온 가족이 편하고 즐겁게 놀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만 감사하였습니다. 알 수 없는 초월과 신비에 관한 일들은 때가 되면 다 높은 곳의 님의 뜻에 의해 밝혀질 것들, 내가 나의 의지로 알아내려 할 일들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주어진 현실에만 감사합니다. 그 감사만으로도 삶이 빼곡하게 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