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곤란

멍청한 이의 어려운 결정 (2005/12/20)

지난 주 수행일상에 황우석 교수 편을 들었다가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꼴이 되었다. 이제는 한 때의 민족적 영웅이 희대의 사기꾼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역시 나는 판사 같은 일을 하기에는 이성적 역량이 현저히 못 미치는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하고 이성적인 숱한 사람들도 황교수를 전적으로 신뢰했었으니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할 일도 아니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다 정확한 실상이 드러나겠지.

그렇다 하여도, 세계 최고 수준의 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심각하게 조작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나같은 하빠리(영남지역에서는 '시다바리'로 칭함) 학자도 연구의 진실성 유지를 위해 벌벌 기었던 기억이 있는데... 박사 논문 쓸 때, 어느 시대의 어떤 현상의 존재 유무에 관해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현상이 '매우' 강했는지, 아니면 '약간' 있었는지, 도무지 기존의 자료만을 가지고는 확인이 불가능하였다. 몇 일을 헤매고도 입증 자료를 못 찾은 나는, 시간도 촉박하고 하여, 그냥 그 현상이 '상당히' 강했다는 기술(記述)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고 말았다. 그 후로는 나의 이러한 기술의 근거 불충분함이 탄로날까봐 노심초사했다. 물론 나의 논문 따위는 눈 여겨 보는 이 몇 되지도 않는 변방의 자료에 불과하므로, 그깟 것을 가지고 '폭로'하였노라 외칠, 할 일 없는 이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에 대충 얼버무리는 문장을 써내려갈 때의 정신적 압박감과 죄의식이다. 자신의 논문이 만천하에 낱낱이 공개될 폭발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 이성적인 과학자가 그런 갈등을 겪으면서도 자료를 조작하리라는 것을 여전히 믿기가 어렵다.

허나, 세상 일은 알 수 없는 것, 나의 상상력이나 순진한 믿음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세상사가 돌아가는 경우는 비일비재한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그냥 신뢰하기로 결정해야 하는 것, 그런 것이 세상사 속에서 내려야 할 어려운 결정일 것이다. 그런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똑똑하고도 현명해야 할 것인데, 아무래도 나는 별로 똑똑하거나 현명하지는 못한 인물이고, 나처럼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늘 일상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릴 것을 종용받고 있는 것이 인생살이일 것이다. 역량을 넘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스트레스 발생 요인이다.

첫째 딸 시시가 학교에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모은다 하길래, 제 용돈 모아둔 것을 갖다 내라 하였다. 얼마나 모았나 보았더니 2천원이 조금 넘는 것이었다. 역시 제 애비 닮아 재테크에 소질이 없음을 내심 한탄하고, 애비가 특별 헌금을 보태주겠다며 그 2천원을 내가 갖고 만원 짜리 한 장을 주었다. 그리고는 노파심에 당부한다고 해준 말이, '네가 만원이나 낸 걸 알면 천원밖에 못 내는 아이들은 창피해 할지 모르니 절대로 자랑하지 말고 내라'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의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라는 것이 고사리손으로 모은 동전 더미 정도 아니겠나 하는 것이 나의 예상이었기에.

시시가 집에 와서 보고했다. "만원은 많은 것도 아니야, 5만원 낸 애도 있고, 10만원 낸 애도 있어!" 멍청한 나는 또 한 방 먹었다.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는 그것 참 잘된 일이라 말했다, 덕분에 불우이웃들이 많은 도움을 받게 된 것 아니냐며. 아내의 후속 보고에 의하면, 그런 성금 내는 것도 학생별로 기록이 되어서 졸업할 때 무슨무슨 공로상 같은 것 수여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많은 학부모들이 경쟁적으로 고액의 성금을 기부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설마...' 했지만, 그러는 내가 매우 멍청한 인간인 것 같다.

동네의 번화가에서 구세군 자선냄비 소리가 딸랑거리고 있기에 아이들에게 아빠가 특별히 돈을 줄테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 냄비에 갖다 넣겠느냐고 물었다. 애비 닮아 멍청한 시시는 당장 입이 쭉 찢어져서 "응, 그럴래!" 외치건만, 유치원을 1년 더 다녀야 하는 둘째 나나는 대답이 없다. 의아해진 내가 나나에게 물었다, 넌 자선냄비에 아빠가 준 돈 갖다 넣지 않을 거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나나가 답했다. "난 돈 갖다주기 싫어, 그러면 우리 돈이 없어지잖아." 땅꼬마의 너무도 냉정한 판단에 놀란 나는, 뭐라 대꾸를 못하다가 주저리주저리 이런 저런 이유를 주워섬기며, 그래도 좀 주는 게 좋은 일이라 말해주었다. 허나 아이는 설득당하지 않았다. 아이의 냉철한 계산의 배후가 되는 이유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 아내와의 대화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나의 눈에는 자신의 집이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갖다줘도 좋을만큼 부자라는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늘 자신이 부자라고 (주관적으로, 또는 마음만은) 믿고 살고 있던 애비보다 훨씬 똑똑한 판단임에 틀림없다. 최근들어 아이들과 함께 방문한 주변의 일가친척 집들은 전부 우리 집보다 크고 고급스러웠다. 나는 그런 것에 완전히 무신경했지만, 다섯 살 짜리 아이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정도면 더 바랄 게 없지만, 나나는 세상에 - 아니, 바로 가까운 주변에 - 훨씬 더 크고 좋은 집들이 있다는 것을, 따라서 우리 집이 전혀 부자가 아니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사람보는 눈도, 세상 물정도, 이재에 관한 안목도 다 현저히 처지는 애비. 나처럼 세상살이에서 별로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도 세상엔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똑똑하지 못한 걸 알면서도 별로 그것에 대한 개선의 의지마저도 없는 이들. 그냥 자기가 좀 손해보고, 믿어주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속 편한 이들. 이런 이들이 '착하니까' 존중받아야 한다는,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패배주의적 논리를 대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나는 내가 그런 이들 중의 하나임이 부끄럽지 않다. 그 이유는, 내가 평생에 걸쳐서 추구하는 바가 일종의 '천국에 보물을 쌓는' 성격의 일이며 - 또는, 영적인 차원에서의 성숙을 기하는 성격의 일이며 -, 스스로 그 일에 매진하여 만족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나의 딸에게 애비의 현실적 멍청함이 조금도 자랑할 만한 부모로서의 덕목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현실적으로 '멍청함'으로써 얻게 된 것은 내면의 평화이다. 그래서 잡다한 세상사에 마음 쓰지 않으면서 내 능력의 대부분을 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내 좋은 방식대로만은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일 것이다. 나도 살다보면 사람에 대해서, 돈이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경우에 부닥친다 - 자의든, 타의든. 그래서 예를 들어 돈이 결부된 손익 계산과 그에 따른 제반 활동에 큰 신경을 써야 할 때, 아무래도 나의 내면의 평화는 장애물과 맞닥뜨리게 되고, 나의 본업의 생산성은 저하된다("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는 예수님의 꾸지람이 들리는 듯...).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의 현실적인 멍청함과는 별도로, 나는 내가 하기로 작정한 일을 할 도리밖에 없다. 내면의 평화에 대한 장애 요소가 발생할 경우 내게 필요한 것은 의연함이다. 그간의 수행을 통해서 나의 의연함은 얼마나 자랐는지 앞으로 테스트해 볼 일이다. 물론 그 의연함의 에너지원은 얄팍한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의연함을 구하는 이는 그 힘을 자아보다 훨씬 큰 원천으로부터 스스로 구해야 할 것이다. 내 경우에는 그 쏘스(source)는 신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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