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 시리즈 (2006/10/22)

모처럼 맡은 계절학기도 끝나고 웹싸이트도 실종되어 버린 8월 중순 이후부터 10월 초의 추석 연휴에 이르기까지, 나는 여러 번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모두 1, 2박의 소박한 여행이었지만, 가족을 이끌고 짐을 꾸려 한 번 길을 떠난다는 것이 생활의 리듬이라든가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할 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짬만 나면 여행을 떠난다. 다음 학기부터는 출강하는 학교 수를 줄이든지 해서라도 한 일주일씩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어떤 이는 이 좁아터진 땅덩어리에 갈만 한 곳은 다 가봤지 않냐고 묻건만, 나에게는 여전히 아이들 데리고 가보고 싶은 곳들이 수두룩하다.

모든 여행이 똑같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여행은 더 기억에 남고, 어떤 여행은 고생이 심하기도 하다. 여동생네 식구와 떠난 오대산 여행길에는 줄곳 비가 내린 덕택에, 아이들은 오대산 관광호텔이라는 곳의 실내 수영장에서 내내 물놀이하며 즐거워 했지만, 나는 그 녀석들 관리하느라 수영장 의자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다 왔다. 그나마 돌아오는 날에는 비가 걷혀, 월정사 입구의 나무와 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오대산에서 돌아온지 1주일만에, 이웃사촌들과 작년에 다녀왔던 양평의 펜션을 재방문하였다. 이런저런 일로 작년의 멤버들이 다 참여하지는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이번에 처음 합류한 한 집을 포함하여 네 집이 또 하루 잘 놀다 왔다. 아이들은 개울가에서 고기잡이와 물놀이하느라 자연에 푹 빠져 지냈고, 어른들은 심야에 급습한 폭우 속에서도, 꿋꿋하게 마당의 바베큐 불판 앞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이젠 그만 놀고 신학기 준비도 좀 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한 번 발동이 걸린 방랑기를 잠재울 길 없어, 내설악 백담계곡으로, 동해안으로 2박2일을 돌아다니다 왔다. 금요일 오후 늦게, 온 식구가 한 주일의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떠나기로 일정을 잡았더랬는데, 떠나기 전날 집앞에서 마주친 이웃사촌 한 집과 의기투합, 전격적으로 내 차에 모두 함께 타고 떠나버리기로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언제나 둘째 나나의 차멀미가 신경이 쓰이는 나는, 금요일 오후의 교통 정체를 뚫고,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에 다다르고자, 세심하게 경로를 결정하여 8인이 탑승한 내 차를 고속질주한 결과, 백담사 입구인 용대리까지 약 세 시간에 주파할 수 있었다. 그 옛날, 친구들과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터덜거리는 버스타고 찾아갈 때엔 하루 종일 걸리는 코스였는데, 격세지감을 느꼈다. 컴컴한 밤에 도착한 펜션 닮은 저렴한 민박집에 여장을 푼 뒤, 산채음식 내주는 정겨운 식당에서 향긋한 저녁 식사 마치고, 어른들은 맥주 한 잔 걸친 뒤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두가 무사하고 평온한 하루를 보냈다. 다만 나는 다음 날, 근래에 경험해보지 못한 꽤 심한 고생을 하게 될 것임음을 미리 알 도리가 없었을 뿐.

둘째 날 오전, 나의 안내하에 - 최근까지 십수 차례 내설악을 다녀온 적이 있는 내가 당연히 셸파역를 맡을 밖에 - 우리 팀은 버스를 타고 백담사로 향했다. 웅장한 계곡 옆 절벽 길의 버스 라이드는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못지 않은 스릴을 맛보게 해줬다. 나로선 하도 여러 번 와봐서 굳이 들를 마음도 안드는 곳이지만, 초행길 팀원들에게는 백담사도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특히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전두환 '기념실'은 방문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볼거리였다. 우리는 애초에 백담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 수렴동 계곡 부근까지 산행을 하기로 계획을 하고 왔기에 발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도 계곡 옆으로 나있던 길이 요 며칠 새의 큰 비로 물에 잠겨버려서, 산 위로 우회통과하게 되는 돌발사태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에이 귀찮게 됐네, 산 좀 타야겠구만' 정도의 생각으로 접어든 '우회 탐방로.' 오르다 보니 웬걸, 경사는 갈수록 가파라지고 길은 험하기 그지없어서, 일행중 가장 꼬마인 일곱 살 짜리 나나를 나는 거의 안고 올라가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안고 숨이 턱에 차서 오르다보니, 어느덧 발 아래로는 저~ 밑의 아득한 계곡에 이르는 천길 낭떠러지! 나 혼자 왔더래도 넘기가 만만치 않았을 험로. 급기야 우회 탐방로의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는데, 앞서 가던 큰 애들이 밧줄을 잡고 질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 앞에 가고 있던 이웃집 Y아빠는 예상밖의 위험을 감지하고, 계속 전진해야 할지 내 의견을 물었다. 허나 한 사람이 통과하기에도 비좁은 험로의 경사진 굽이에서 발길을 되돌린다는 것 자체가 위험해보였고, 진퇴양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안전지대까지 전진하기로 했다. 나는 나나를 마치 타잔에게 매달린 침팬지처럼 내 가슴에 매달리게 했다: "꽉 잡아, 나나야!" 나나는 조금도 겁없이 내 가슴에 찰떡처럼 매달렸다. 나는 한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나나의 등을 감싸안은 채, 미끄러운 급경사 길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눈을 부라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온 몸의 근육과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 내려갔다. 다행히 다른 아이들과 어른들은 큰 어려움 없이 내려가고 있었으나, 유독 나나를 가슴에 매단 나만이 바짝 쫄아 산을 내려갔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우회 탐방로로 접어든 나를 뒤따라 오던 노스님과 노파 한 분도 간신히 산을 내려갔다. 마침내 계곡 옆의 평지까지 무사히 내려왔다. 나나가 내 가슴에서 원숭이처럼 폴짝 뛰어내리더니 퐁퐁 뛰며 앞으로 나아갔다. "재밌어!" 그 모습을 보고 긴장이 확 풀려버렸다. 한 발자국을 내딛다 고꾸라질 뻔 했다. 다리의 힘이 좍 빠려버린 것이었다.

위기를 벗어난 우리 팀은 숨을 돌리고 땀을 닦으며 평지와 합류한 지점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비오듯 땀을 쏟고 있었고. 뒤따라 온 두 노인도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저 뒤의 계곡 쪽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걸어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갈 수 없으리라 판단하여 포기했던 계곡 옆 길이 어렵사리 통과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우회 탐방' 하느라 죽을 고생한 우리 팀. 우회로로 나를 따라오느라 기진맥진한 노파는 내게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할머니께 뭐라 대꾸를 하겠는가, 그저 '죄송합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렸는데, 우리보다 앞서 그곳에 도착해서 쉬고 있던 한 여승께서 나를 편들어주며 나섰다. "보살님, 그래도 이분 따라오시느라 위험한 계곡길 피하고 안전하게 넘어오실 수 있었잖아요, 좀 힘들긴 했어도." 여승의 참견에 노파가 좀 머쓱해졌고, 여승은 이번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띄며 나를 격려해주었다. "딸 자식 매달고 저기를 넘느라고, 저 땀 쏟고 있는 것좀 봐, 쯧쯧."

여승과도, 노승과 노파와도 작별을 하고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던 일행을 따라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데, 허벅지와 장딴지에 마치 체력장 다음 날 느꼈던 것같은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도 '한 등산' 하고, 평소에 산악 자전거도 타는 등, 나름대로 다리 힘이 좋은 편이어서, 운동 후에 다리가 아파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헌데 이번에는 한 삼십 분 산을 탄 것 때문에 다리가 휘청일 정도로 무리가 온 것이다. 짐작컨대, 밧줄을 잡고, 나나를 매달고 내려오는 위기 속에서 내 근육 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에너지 전부를 끄집어내서 소진시켜버렸던 것 같다. 평소에는 끄집어낼 수 없는 일종의 수퍼-에너지를 발휘했던 셈이다. 온몸은 땀으로 젖고, 다리 힘은 쭉 빠져서, 그 다음부터는 겨우 딸내미들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은 수렴동 계곡에 접어드는 그곳에서 경치좋은 물가에 자리잡고 앉아, 준비해온 도시락 까먹고 잘 놀 수 있었다. 아이들이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신나게 노는 동안 나는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체력회복을 도모했다. 정말 십년은 감수했다. 오후에 발길을 돌려 다시 백담사로 향해 하산할 때에는 그 '우회 탐방로' 대신 물이 찰랑이는 계곡 옆 길을 택해 내려갔다. 이번에도 내가 나나를 거의 안고 전진할 수밖에 없는 꽤 험한 길이었지만, 그 거리가 한 30미터 밖에 안됐다. 고만큼을 우회하느라 아까 30여분을 생고생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사히 하산하여 다시 차에 몸을 싣고는, 미시령을 넘어 속초로, 주문진으로 유유히 드라이브를 즐겼으며, 동해안 어시장에서 저녁거리로 횟감도 한 뭉테기 사다가 저녁에 도착한 평창의 콘도에서 안락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우회 탐방로 사건이 강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그것은 내게는 하나의 위기였다. 나나가 팔 힘이 빠져 나를 끌어안은 손을 놓는다면... 그것은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었다. 겁도 났다. 나의 정신력의 한계였다. 그때, 아이를 끌어 안은 내 팔과, 우리 둘의 몸통을 지탱하고 있는 내 두 다리에는 온 몸의 힘이 다 집중되어 있었다. 적절히 동기유발이 되면 사람의 몸이라는 것, 평소에는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자식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적절한 동기유발'의 요건이 될 수 있을 게다. 이건 좀 단순무식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이 사건 이후로 나는 몸의 근육의 힘을 키우는 운동을 시작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힘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 결코 아니다. 나의 육체적 역량(capacity)을 그냥 놀리고 있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렇게 약 한 달 이상 운동을 하고 난 뒤 최근에 자전거로 서울 한강변로를 일주했다. 과거에 비해 일주 시간이 10%이상 단축되었다. 과거보다 훨씬 치솟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나는 이번 '우회 탐방로' 사건에 어떤 교훈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그저 그 사건 자체를 대단히 즐겼을 뿐이다. 위험도, 아찔함도, 허벅지의 통증도, 다 즐겼을 뿐이다. 내가 바랬던 기회를 설악산 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 신께서 친절히도 마련해주신 것으로 믿는다. 내가 바랬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 정말 어리석기 짝이없는 질문 같지만, 사람은 대개 자신이 진정코 (즉,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는 것이 무언지를 잘 모른 채로 살아가지 않는가?

아마도 내가 바랬던 것은 '한계와 극복'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육체적인 한계와 그 극복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한계와 극복도 포함해서. 내가 나의 한계라고 믿는 것들은 대개 나의 표면적 자아가 규정한 것들이리라 본다. 에고의 그러한 규정이 타당한가 알아보기 위해서 - 즉, 나의 한계라고 믿고 살아온 것들의 극복 가능성을 탐지해보기 위해서,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해주는 '위기'가 주어진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추석 연휴 때 장인, 장모 모시고 경주 여행 다녀온 것까지, 두 달여 '휴가' 기간 동안에 많이도 싸돌아다녔다. 경주 보문단지에서는 3인용 자전거에 시시와 나나까지 태우고 달렸는데, 혼자 타는 젊은이들도 다 추월해서 아이들이 꺅꺅거리며 신이 났었다. 육체적 능력은 더욱 업그레이드된 것이 분명하다. 내적인 역량의 업그레이드도 기하여 외화내빈(外華內貧)을 타개하여야 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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