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2

성리학 (2) (2007/10/15)

[원고 발췌 11]
* 다음의 ‘귤 까먹기’의 예화는 베트남 출신 승려인 틱낫한의 일화에서 전적으로 빌려온 것입니다 - 즉, 등장인물만 바꾼 똑같은 이야기를 한석훈이 각색-확장했다는 말이지요. 출처를 명기하므로 무단전재가 아니겠습니다.

....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송주황은 N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N은 송주황의 아내가 내준 귤을 먹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귤 한 쪽을 먹다가 그 귤 먹기를 다 마치기도 전에 무심코 그 다음 귤 하나를 또 입에 집어넣곤 했다. 송주황이 N에게 말했다.

“밀감 다 자시고 나서 이야기 들으시이소.”

그 말을 들은 N이 당황했다. 귀한 가르침을 들으며 불손하게 귤이나 우적우적 씹고 있었던 것에 대해 이 엄격한 유학자가 화가 났는가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송주황은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밀감을 자시면 어디 밀감 맛을 느끼겠소?”

송주황은 인자하게 웃음 지으며 그리 말하는 것이었다.

“밀감 먹을 때는 밀감 먹는 데만 집중해야 내가 밀감과 나눌 수 있는 경험의 최대치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자, 어디 한 번 밀감 먹기에만 자신을 완전히 바쳐보소.”

그러면서 송주황은 자신도 귤 한 쪽을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듯 씹어서 삼켰다.

"자, 이게 제대로 밀감을 먹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입니다.“

N은 그제야 송주황의 의도를 이해하였다. ‘성리학에서 그토록 강조한다는 ‘경’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N은 자신도 따라서 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음미해봤다. 귤이 혀에 닿는 촉감, 한 번 씹었을 때 배어나오는 풍부한 즙의 느낌과 맛, 입안에서 흐트러져 퍼지는 알갱이와 조금 질긴 듯한 섬유질의 미끈거림..... 확실히 아까 이야기를 들으며 무심코 먹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귤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단순히 귤의 맛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감각적인 체험의 최대치를 맛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귤을 씹고 있는 N의 입에 슬며시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송주황도 미소지었다.

“금세 아시네. 과연 저 오만한 오형모 교수가 추천한 인재답구먼.”

이런 것을 불교에서 말하는 염화시중의 미소라 할 수 있을까. 귤 하나를 나눠먹으며 N과 송주황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상의 활동이 선사할 수 있는 심오한 이해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 이 밀감 다 먹고 나서 또 이야기합시다. 그러면 이야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은혜의 최대치를 또 경험할 수 있을 것이오, 허허허.”

“네, 선생님, 세상의 온갖 일에 ‘경’ 할 수가 있는 거로군요. 귤 먹기에 ‘경’하고, 대화에 ‘경’하고, 공부에 ‘경’하고..... 그렇게 모든 일에 ‘경’할 수만 있다면 정말 최고의 삶을 누릴 수 있겠네요.”

“맞습니다. 단, 우리가 복잡한 기의 통합체인지라, 툭하면 ‘경’을 까먹어버린다 이 말 아닙니까.”

생각해보니,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 이 시대의 대세인 것 같았다. 엘리트일수록 할 일들이 많아서, 한 번에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하는 멀티태스킹(multi-tasking) 능력을 요구받는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전화를 받고, 회의 중에 토의하면서 서류들을 검토하고, 음악을 들으며 조깅을 하고, 밥을 먹으며 신문을 읽는다. 과연 이런 멀티태스킹을 통해 해낸 일들의 성과가 만족할 만 할 까? N은 의심이 일었다. 오히려 한 번에 하나씩 집중해서 할 때 짧은 시간 안에 더 높은 질의 산출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느긋한 자세로 살기는 어렵다. ‘경’을 실천하려면 대단한 의지가 필요하겠다.

생전 처음으로 귤을 매우 정성스레 먹으며 N은 문득, 행복하게 아이스크림을 빨아먹고 있던 조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아이스크림 하나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던가. 온 세상에서 그 무엇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최상의 시간을 누리고 있던 어린 아이의 행복한 표정. 아이는 아이스크림에 ‘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의 복잡한 머릿속 보다는 천진한 동심에 가까운 마음 상태가 ‘경’하기를 가능케 하는 조건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의 주일무적(主一無適)이란 개념을 영어로 ‘mindfulness’라 합니다. 한 가지 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일이란 뜻이지요. 우리 삶속에는 우리가 ‘경’할 수 있고, ‘경’해야 할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특히 사소한 일상이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일상의 잡일 중에 설거지나 청소 같은 게 있지요. 만약에 내가 설거지하기를 싫어할 경우, 나는 설거지를 하기 전부터 기분이 나빠질 겁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못해 할 수없이 설거지를 시작하겠지요. 그렇게 설거지를 하는 동안은 내내 이 일 빨리 끝마치고 하게 될 더 재미있는 일거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빨리 하고 텔레비 봐야지 하는 식으로요. 자, 이렇게 설거지를 대할 경우, 우리는 설거지를 하는 시간 동안은 살고 있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그 시간은 우리 삶에서 부정된, 즉 지워진 시간일 뿐이니까. 그렇게 지워진 순간이 우리네 삶속에 얼마나 많은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엄청나게 많죠! 그러니 우리가 그 순간들 하나하나에 ‘경’한다면, 그 모든 순간들을 제대로 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설거지에도 '경‘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번 해보세요. 그럼 설거지가 달라질 겁니다.”

“네에? ‘경’만 하면 설거지도 행복한 일이 될까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N이 물었다.

“한 번 해보소. 자, 이게 손님께 예의가 아니지만, 실습의 차원에서, 이 과일 먹은 식기들 가져다가 한 번 설거지 해보소.”

송주황의 아내도 웃으며 접시와 포크 등을 모아서 안겨주었고, N은 별 수 없이 그것들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는 싱크대의 물을 틀고 그릇들을 씻기 시작했다. 다른 아무 생각도 안하고 오직 설거지만 하기로 했다. 손으로 물의 온도를 느껴봤다. 수도꼭지를 돌려 수온을 조절했다. 이내 따스한 온수가 손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세미에 세제를 약간 묻힌 후 물에 적셨다. 수세미로 접시를 닦으며 거친 수세미의 질감과 미끈거리는 접시의 질감이 교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설거지의 양이 매우 적기는 하였으나, 설거지라는 것이 그다지 싫어해야만 할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만지고, 더러워진 것을 씻어내고, 그래서 반짝거리는 새 접시들을 세워놓는 일이 그다지 혐오스러워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에서 돌아온 N을 바라보며 송주황이 말했다.

“칠, 팔년 전만 해도 온수가 안나왔지요. 그땐 겨울에 설거지하는 게 고역이었습니다. 헌데 이제는 이렇게 편리하게 따뜻한 물이 나와서 설거지를 도와주는군요. 그래서 나는 따뜻한 물로 그릇을 닦는 것이 행복하답니다.”

송주황이 가르쳐준 성리학은 추상적인 주리론과 주기론 사이의 논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의 결정체인 인간이 자신의 매일 매일을 최상의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선한 ‘리’를 밝힐 수 있도록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는 실용적인 학문이요, 수행방법이었다. 우리가 오래도록 잊고 지내온 이 고대의 전통은 ‘경’이라는 탁월한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으니, ‘경’함으로써 ‘리’를 탐구하는 이 자세를 거경궁리(居敬窮理)라 하였다.

송주황은 설거지에 ‘경’함을 통하여 자신 속에 항상 내재돼있었으나 알지 못했던 ‘리’를 깨달은 적이 있다 했다. 그것은 설거지하고 있는 자신 안에 가족에 대한 사랑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본 순간이었다 한다. 참다운 자신은 실은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설거지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의 자아는 그것을 알지 못하여 설거지라는 '잡일'을 싫어하기만 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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