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뭘 할랬더라? (2007/7/29)
©
Suk Hoon Han
[원고
발췌 3]
대학의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N이 석사 논문에 대해 상의할 것이 있어서 지도
교수를 만나러 학교에 왔는데, 그날 이 여교수는 계절 학기 강의 중이었다.
사전 약속을 하지 않고 온 것이 불찰이었다. N은 이왕이면 오늘 교수를
만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그녀가 수업중인 강의실로 찾아갔다. 수업
시작 직전에 강의실로 찾아온 N을 본 지도 교수는, 마침 잘 왔다며 N에게
청을 하나 했다. 수업용 자료 파일을 준비해두기로 한 조교가 급한 일로
결근했는데, 자신의 연구실 컴퓨터에 저장돼있는 그 파일을 프린터로
출력하여 가져다 달라는 청이었다. 바쁘지도 않은 터에 지도 교수의
어렵지 않은 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는 N은 흔쾌히 열쇠를 받아들고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교수의 연구실은 다른 건물에 위치해 있는데,
N이 그 건물로 들어가려 하니 출입문이 잠겨져 있는 것이었다. 방학이라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열어놓지 않은 탓이었다. N은 건물 입구의 경비실
창문을 두드렸으나, 경비원은 출타 중. 별 수 없이 건물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경비원을 발견하여 출입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긋한
연세의 경비원이 느릿느릿 경비실로 되돌아가서 열쇠 꾸러미를 찾아
문을 열어주기까지 꽤 시간이 흘렀다. 건물로 들어온 N은 3층의 연구실로
걸어 올라갔다. 헌데 교수에게서 받은 열쇠를 연구실의 열쇠구멍에 넣고
돌렸으나, 열쇠가 반쯤만 돌아가다 뭔가에 걸린 듯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낑낑대며 열쇠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바로 그
걸린 부분을 넘어가지를 못했다. 이게 제 열쇠이긴 한지 의심이 들었지만,
N은 다시금 열쇠를 뺐다 끼웠다를 반복해봤다. 몇 분을 그렇게 씨름하던
중에 열쇠를 살짝 위로 들어올리며 돌려봤더니 그제사 제대로 한 바퀴가
돌아가며 문이 열리는 것이었다. 유서 깊은 건물의 낡은 자물쇠는 고집스런
노인처럼 쉽게 열려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연구실 들어가기도
간단하지가 않군.’ 별 것도 아닌 심부름 이행의 각 단계에 도사리고
있는 예상 밖의 장애물들에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연구실에
들어온 N은 얼른 컴퓨터를 켰다. 윈도우 시작 화면이 뜨더니만 로그인
암호를 입력하라는 지시가 나타났다. ‘Enter' 키를 쳤으나 다시금 똑같은
지시가 나타났다. 지도 교수가 별도 로그인 설정을 해둔 것임에 틀림없었다.
갑자기 암호를 어디서 찾는담, 수업중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도 없고. 혹시 책상 위에 암호를 메모해둔 것이라도 없을지 여기저기를
한참 둘러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지도 교수였다. 암호를 알려줘야
하는 것을 깜빡했다는 전화였다. ‘휴우, 단 번에 되는 게 하나도 없군.’
전달받은
대로 암호를 입력하여 컴퓨터의 부팅이 완료됐다. 해당 폴더를 찾아
파일을 열고, 인쇄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프린터가 연결돼있지 않다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었다. N은 살짝 머리에서 열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옆에 있는 낡아빠진 프린터를 살펴보니 전원이 들어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도대체 전원 버튼이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책과 서류 더미가 쌓여있는 프린터 주변을 빙빙 돌며 구석구석을
더듬은 끝에야 한쪽 귀퉁이에서 자그마한 전원 버튼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이 기계 만든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만든 거야?’
프린터를
켰다. 잠시 후 프린터가 연결됐다는 메시지가 컴퓨터 모니터에 떴다.
드디어 인쇄 버튼을 마우스로 클릭 했다. 프린터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모니터에 인쇄용지가 없다는 메시지가 떴다. N의 머리 윗부분의
열은 더욱 뜨거워진 느낌이었다. 책상 서랍을 다 열어보고, 프린터 주변을
다 뒤져보고 난 다음에야 바로 곁의 책장 선반에 인쇄용지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종이 몇 장을 프린터에 집어넣고 다시 인쇄
버튼을 클릭 했다. 잠시 후 프린터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휴-우,
이제야 되는군.’ 위-잉 하는 인쇄기 소리가 잠시 나더니, 그만 멈춰버렸다.
인쇄용지는 출력돼 나오지 않고, 또 다른 메시지만 모니터에 떴다. 종이가
프린터 안에 걸렸다는 것이다. N의 머리 위로는 고열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푹푹 한숨을 내쉼으로써 약간이나마 열을 방출한
N은 팔을 걷고 낯 설은 프린터기의 뚜껑을 열어 제꼈다. 그리고 내부에
끼어있는 종이를 두 손으로 꽉 쥐고는 거칠게 잡아당겼다. 낡은 프린터기는
저항하는 듯 했지만, 분노에 찬 N의 팔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걸려있던
종이는 처절한 모습으로 뽑혀져 나왔다.
열기로 씩씩거리면서도
N은 떨리는 손으로 새 용지를 가지런히 모아 프린터에 집어넣었다. 다시
인쇄 버튼을 클릭 했다. 이번에도 종이가 걸리면 지도 교수의 청이고
나발이고 간에, 이 프린터를 벽에다 집어 던져서 박살내버리고 자신도
장렬하게 이 방을 빠져나가 버리고야 말리라고 중얼거렸다. 기계도 자신의
운명의 절박함을 감지했던 것일까, 다행히도 이번에는 프린터기가 제대로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마침내, 교수가 청했던 석장의 자료가 제대로
출력된 것이다.
N은 헐레벌떡 강의실로 뛰어와서 수업중인 지도
교수에게 석장의 문서를 건네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역경을 딛고 이룩해낸
성취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그녀를
보고 교수는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다. N도 웃음을 지어보려 노력하며,
수업을 방해하게 된 것이 미안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아침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땀 뺀 셈이다. 어쨌든 무사히 임무를 마쳤으니
다행이다. N은 가벼운 마음이 되어 학생회관에 들어가서는 모닝 커피
한 잔을 즐기기 위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녀의 땀을 식혀줬고, 커피 향도 그럴 듯 했다. 몸과 마음이 다시금
쾌적해졌고, 땀도 식었으며 머리끝의 열기도 다 빠져나갔다. 헌데 무언가
알 수 없는 결핍감이 그녀를 휩싸는 것이었다. 뭔가 빼먹은 일이 한
가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무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뭔가 원래 하려던 게 있었는데... 그게 대체 뭐였지?’
N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방금 전에 했던 행위의 목적을
망각했을 경우, 그 기억을 되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전의 행동이
발생한 물리적 공간으로 복귀해보는 것이다. 이 유용한 지혜를 떠올린
N은 바로 이를 실천하였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손에 들고 학생회관을
나서서 천천히 강의실 건물로 발걸음을 향하였다. 걷다보니 오늘 아침에
캠퍼스에 도착해서 자신이 한 일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지도교수가
강의하고 있는 그 건물 앞에 도달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망각했던
그 원래의 목적이 떠올랐다.
‘아, 참! 원래 교수님하고 상담하려던
거였잖아!’
예상지 못했던 지도교수 심부름 때문에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오가며 문을 두 개를 따고, 컴퓨터에 로그인하고, 낡은 인쇄기와
씨름하며 동분서주하다보니, 오늘 학교에 와서 교수를 만나려고 했던
원래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대개 이러한 경우 사람들은
스스로를 심하게 책망하게 된다. N 역시 예외는 아니다. ‘병신, 죽어야
해.’ 괜한 일로 이리저리 날뛰며 정작 해야 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자신이 지극히 저능한 인간인 것만 같았다. 별 수 없이 지도교수의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됐다. 이게 다 더위 탓이라며
자책감을 다소 경감시키고는 나무 그늘 밑의 벤치에 앉는 순간, 불현듯
N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의 질문이 솟아올랐다.
‘원래
하려던 게 뭐였지?’
그것은 N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
같았으나,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의 다른 누군가가 N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과도 같이 느껴졌다. 어찌됐든 그 질문은 N의 정신 깊숙한 곳을 파고
들어왔다. ‘원래 하려던 것?’ 오늘 아침의 경우, 그것은 지도교수와
상담하는 것이었다. 헌데 교수의 심부름하느라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도교수와의 상담이 정말로 ‘원래 하려던 것’이었는가?
N은 자신에게 물었다. 상담은 또 왜 하려 했던가? 논문을 쓰기 위해서?
그렇다면 논문은 또 왜 쓰려 했던가?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 학위는
왜 받지? 몸값 높이려고? 몸값은 왜 높이고? 더 잘 살려고? 왜 더 잘
살려는 거지? 태어난 이상 잘 사는 편이 나으니까? 왜 태어났지? 왜?
대체 내가 원래 하려던 것이 뭐였지?
N의 스스로에 대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갔다. 그 끝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끝이, 그 근원이 있어야만 될 것 같은 강력한 느낌이 일었다. 정말로
‘원래’ 하려던 것이 있어야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그런 것이 정말 있어야만 할까? 최초에 마음의 심연에서
솟아올랐던 그 질문이 N의 온 정신을 사로잡았다.
‘원래 하려던
것이 뭐였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N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
하려던 것이라니, 사람이 다 제 뜻과는 상관없이 생물체로 태어나서
먹고 살고 생존하려 버둥대다가 가는 게 인생일진대, 거기에 무슨 원래
하기로 돼있던 것 따위가 있겠어? 그저 나름대로 만족할 만큼 즐겁게,
고통 없이 살다 가면 되는 거지, 뭐.’ 이렇게 지금껏 견지해온 ‘합리적’
태도로 자신을 질타하였음에도, 그 질문이 후벼대는 힘이 약화되지는
않았다. 아침에 프린터와 씨름하고 문서를 교수에게 전달해주느라 오늘
학교에 왔던 원래의 목적은 까맣게 잊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다니고, 학위를 따고, 돈벌이를 하고,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라
자신이 원래 이곳에 태어난 목적은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이때 N의 머릿속에 B의 글귀가 떠올랐다.
‘진정한 자신의 길’이라..... 혹시 B는 인생에서 자신이 ‘원래 하려던
것’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윗 글은 과거의 저의 '수행 일상' 중 한 편인, '원래
뭘 할랬더라?'를
변주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