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2008/9/8)
©
Sukhoon Han
9월의
첫주 어느 날 아침, 몇 주 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운동량이 부족하다보니
야금야금 불어나 버린 배둘레햄을 단 칼에 제거하고자, 홀연히 일어나 '수도권
남부 자전거 일주'를
나섰다. 과천-잠실-한강변-여의도-광명-안양을 일주하는 코스로 일년에
한 두 번씩은 잊지 않고 밟아준다.
기분좋게 출발해서 잠실종합운동장까지는
단숨에 주파했지만, 그간 체력이 녹슨 탓에 서서히 스피드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작년 이맘 때부터 맛이 가기 시작했던 무릎 관절도 예전의
상태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폐차 직전에 이른 일전의
삼천리 자전거로는 더 이상 근거리의 출퇴근도 무리라 여겨, 지난
봄에 명목상으로는 '온
가족 용'으로 국산 미니 벨로를 한 대 사서 실질적으로는 내가
독점적으로 사용해오고 있는데, 이 놈은 바퀴가 작은 14단 짜리여서
이전의 자전거만큼도 속력이 나오지 않는다.
나름대로 열심히
페달은 밟지만 별로 속도가 나지 않는 자전거를 몰고 잠실과 청담동
쪽으로 접어들었더니만, 점차 나를 추월해가는 자전거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 돈 주고 사지는 못해도 관심은 많기에 그 자전거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 이건 웹써핑하다가 포르셰나 페라리 사진 나오면 입을 헤벌리고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취미다 -, 거의 죄다 고급 외제들이었다. 정확한
가격은 모르지만 백만 원 아래 짜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눈에 띄는, 내 것과 동일한 '삼천리' 마크를 붙이고 있는 자전거들은
마실 나온 할아버지들이나 타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를 씽씽 추월해가는
번쩍거리는 그 외제 고급 자전거의 레이서들은 하나 같이 최신
유행의 자전거 유니폼과 헬멧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헐렁한 티셔츠와
반 바지 차림으로 미니 벨로를 끌고 있는 내가 그들과 비슷한 스피드를
낸다면 그것이 꼴불견일 듯 싶었다. 그들은 정말 스파이더맨, 엑스맨처럼 멋있었다.
수퍼히로들의 질주에
주눅이 든 나는 길 한 켠에 붙어서 민폐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내
페이스대로 꾸준히 페달을 밟았다.
엑스맨들은 헬멧도 멋지고,
스포츠 고글도 쌈빡하다. 이 더운 날에 스파이더맨처럼 몸에 찰싹 붙는
저런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땀에 쩔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마 그들의 고급 첨단 소재로 만든 유니폼은 나의 면셔츠보다 훨씬
더 기능성이 높아서 땀 정도는 순간적으로 증발시켜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를 추월하던 두 엑스맨들이
나누는 대화가 뒤쳐지는 내쪽으로 흘러내려온다. 투자시장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일억 정도 가지고는 요즘 할 건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다행이다 싶었다. 그에 훨씬 못 미치는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내가 아무런 재테크 투자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엑스맨들은 어느 새 꽁무니도 보이지
않을 만큼 저 멀리 내뺐고, 나는 계속 열심히 한강변 고수부지를 달린다.
성수대교, 동호대교 부근 고수부지에는 역시 외제차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요트들이 정박해있는 바지선 주위에는 플로리다 해변에서 마이애미 바이스가
몰고 나올 성 싶은 번쩍거리는 고속 레이싱보트도 보인다. 멋지다. 강남
사람들이 돈이 많긴 많은가 보구나.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몇 해 동안은 강의하러 갈 때 말고 서울에 가는 일이 통 없다보니,
서울이란 곳의 이런저런 면모에 대해 촌사람처럼 신기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여의도를 지나서 안양천을 끼고 목동을 지나 금천,
광명 쪽으로 오다보면 사람들의 모습과 또 그들이 타고 있는 자전거의
모습이 현저히 달라진다. 나는 더 이상 내 자전거와 내 옷차림에 대해
상대적 초라함을 느끼지 않는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는 내가 기세
등등해서 안양천변의 중년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의 자전거를 씽씽 추월해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세 시간 가까이 달려온 탓에 기력도
쇠진하고 허리와 꼬리뼈의 통증도 가중되어, 중년의 무리에게도 추월당하며
간신히 목적지까지 기어갔다.
자전거와 스포츠웨어 따위의
외물(外物)로 인해 내가 '강남'에서 사회경제적 열등감을 느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넓디 넓은 서울, 돌아 다니며
보면 아파트와 빌딩은 얼마나 많은가.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큰 아파트나 건물을 꿰차고들 있는데, 자신의 소유인 집 한 채 없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은 과연 어떤 심정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
위에 저토록 많은 벤즈와 비엠따블유들이 굴러다니고 있는데, 엘피지
1톤 트럭 한 대 할부 납입금에도 허덕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서울의 가장들의 심정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쟁체제의 최대한의 가동을 희구하는 이른바 '뉴라이트'가 참치캔의
저지방 성분(light) 광고인지 '신우익(right)'이란 뜻인지 때때로
혼동이 될 정도로 그쪽에 대해 관심도, 호감도 안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 반대 쪽인 사회주의적 공동체 지향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나의 몸에 밴 개인주의적 성향은 '함께 가는 공동체'적 활동에
대해 끈질기게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 꼴린대로, 생겨먹은
대로 알아서 살아가는 자유주의적 '라이프 스타일'을 제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해 한다. 이성적으로는 '뉴라이트'에 반대하면서도 실질적 삶의
태도에 있어서는 저 혼자 속 편하게 살며 '이웃들'에게 인정의 손길을
잘 뻗지 못하는 이기성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것은
위선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좌파적인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홀로 떨어져
나와서 사회경제적 이권 다 누리면서 살고 있다는 것, 이런 것이 아마도
위선일 수 있겠다 - 딱 그렇다고 결론은 짓지 못하겠으나 - 몇
가지 더 검토해봐야 할 면모들도 있기에.
이제는 별 죄책감이나
내적 갈등도 없이 관찰할 수 있게 된 나의 이러한 위선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성찰할 수 있게 해준 이야기를 우연하게 들은 적이 있다. 서울의 한
명문 대학의 구내 식당에서였다. 강의 들어가기 전에 혼자 점심밥을
먹고 있었는데, 교수나 대학원생들 일색인 그 식당에 연세도 지긋하고
옷차림도 귀부인 같은 - 사치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기품이 어린
세련미가 있다는 뜻에서 - 두 아주머니가 들어오시더니 내 앞의 식탁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이었다. 여전히 식비가 3천원인 이 허름한 카페테리아와는
어울리지 않는 외양이어서 한 번 눈여겨 봤는데, 혼자 밥을 먹고 있다보니
그 두 분의 대화 소리가 선명히 들려오는 것을 굳이 막을 도리가 없었다.
대충 듣고 있다보니 그저 기품있는 교수 부인 정도가 아니라, 성북동에
저택을 소유한 상당한 재력가 아주머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 한 분은 요즘 부유층들의 남의 눈 의식하지 않는 소비 행태에 대해 줄곳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냈고, 또 한 분은 '요즘엔 다들 그렇게 산다'며 절충적인 응답을
계속했다. 비판적 견해의 부인이 남긴 이 말이 기억에 남았다.
"요즘
좀 있다 하는 집안 사람들 죄다 최고급 벤즈다 뭐다 뽑아서 몰고
다니는데, 그러면 안되는 거예요. 없는 사람들 생각을 할 줄 알아야지.
요즘같은 형편에 없는 사람들 심정은 어떻겠어요? 고급 외제차 보고
상처받을 사람들도 생각할 줄 알아야지, 원. 예전에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어요."
내가 위선성이 의심되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제몸에 맞는 옷처럼 편하게 입고 살아가는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 아주머니의
이야기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나'라는 개인도 소중하지만,
'나'들이 모인 이 사회라는 집단도 소중한 것이지.' 교육철학 강의하며
한국 교육의 집단주의 현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토론할 때에는 나도 모르게
개인주의 옹호론 쪽으로 흐르곤 했고,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개인들이
모일 때에만 제대로 된 집단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라는 개인주의 우선론을
여전히 고수해오고 있지만, 내 '이웃'들의 집합체인 집단에 대한 나의
마음 씀씀이가 상대적으로 척박했음에 대해 자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멋대로 사는 것, 'My Way' 외치는 것 다 좋긴 한데, 그러나
그것이 타인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경쟁력 우위와 엑설런스(excellence)만 추구해서 세상 사람들
모두 제 발 아래에 놓고 살게 되면 무엇이 그리 좋을 것인가, 세상 사람들과
자신이 인간으로서 소통하고, 나아가 신적 본성의 발현을 평등하게
간구하는 동지가 되지 못하는 한. 시장경쟁체제란 저 혼자 뛰어나서
성공하면 목표달성일지 몰라도, 영성의 추구란 저 혼자 뛰어나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이름 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신학자 송기득 교수의 말씀이 떠올랐다.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며 느낀 열등의식은 실은 오로지 내 자전거의 속력에만 국한돼있었을
따름이다. 내가 비록 내적 집중도가 대단치 못하지만, 후진 자전거, 촌티 패션, 얄팍한 지갑 따위로 주눅들 정도는
아니다. 그런 것들은 신앙인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런 우·열적
상황에 대한 자기 관찰이 내 위선성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진정한 개인주의는 역시 자신이라는 개인 말고도 모든 개인들의 공정한
삶의 기회에 대해서도 연민어린 관심을 가질 때에만 성립될 수
있지 않겠는가.
자신의 위선성을 한 꺼풀 더 벗겨내는 내가
잘났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요즘 벌이가 영 신통치 않아 찌질거리고
있다보니, '성장'이나 발전 보다는 분배정의에 대한 비판감각이 더 예민해졌을 뿐이다.
사회에 불평불만 많은 지식인 놈팽이들 수를 줄이려면 무엇보다도 경제
활성화가 돼야 한다는 것은 역사상의 보편적인 원리다. 전에
벌이가 괜찮을 때엔 남들 생각 하나도 안한 채, 내 새끼들 데리고 해외여행이나
다녀오고 그랬었다. 앞으로도 사정 풀리면 또 그러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