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신성한 진화 (2009/2/26)

2009년은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자, 그의 기념비적 저서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가 그를 기념할 많은 행사들을 기획하고 있으며, 그의 일대기를 다룬 'Creation'이라는 영화도 개봉한다고 한다. 생물학과는 거리가 먼 내가 갑자기 왜 다윈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다윈이 제기한 방식으로 우주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도를 한 번 해볼 때 과학과 상식에 터한 인간 의식이 향상될 가능성이 많은 반면에, 우리가 그가 제기한 방식을 오해하고 무시할 때 과학과 상식이 거부되고 인간 의식이 퇴보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초등 3학년이 되는 내 둘째 딸 나나가 그러하듯, 나는 어렸을 때 생물에 관심이 지대했다. 동식물 백과사전을 거의 외울 정도로 탐독했고, 실제로 동물과 접촉하는 일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올라갈 때 '생물' 과목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러나 나는 생물 시간에 개구리 배를 가르는 실험을 강요당하며 생물 수업 자체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져버린데다가, 생물 선생과 뭔가 코드가 맞지 않아 괜한 일로 꾸중을 자주 들으며 아예 그 과목을 멀리하게 돼버렸다. 참으로 한 사람의 교사가 학생들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간과할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때 이후로는 생물을 그저 '암기 과목'으로만 대했고, 따라서 아동기에 일구었던 풍부한 생물학적 관심은 사장돼버렸다 하겠다. 게다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교양 과정에서 들었던 생물학 강의에서 D를 받았는데, 늘 장학생 수준의 평균 학점을 받던 나에게 생물학 D는 영구적인 대미지로 남게 됐다.

그러나 이같은 '학교'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의 생물학에 대한 원초적 관심의 불꽃이 다시 지펴지게 된 것이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이니, 인생이란 걸 함부로 평가할 일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초월 체험을 통해 종교와 영성에 눈 떴던 37세 이후에 나는 20년 넘게 쥐고 있던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게 됐고, 철학을 다시 공부하며 과학이 제공하는 광명을 좇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생물학을 통합적 우주관의 필수적 부분으로 여기게 됐다. 즉, 영성에 눈 뜬 뒤에야 비로소 과학의 가치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진화론에 대한 책들을 읽고 정보를 입수하면서 내가 존경하는 철인들인 칼 막스와 존 듀이 또한 당대에 발흥하던 진화론에 심취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나는 그 철인들이 일반적으로 신앙을 경원시하는 인물들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조금도 불합리성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막스적 사회경제관을 옹호하고, 듀이적 교육관을 지지하기 때문에, 내가 공감하는 철인들도 진화론에 심취했다는 사실에 안도감마저 느꼈다.

미국에서는 중등학교 생물학 수업에 진화론과 이른바 '창조론(인간은 약 4천 년 전에 조물주가 하루만에 창조해낸 피조물이라는 신화가 '사실'이라는 믿음)'을 함께 다뤄야 하느냐 하는 이슈가 법정에까지 올라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온 바 있는데, 이때 생물학자 진영을 대변하는 한 과학자가 배심원들에게 제공한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그 과학자에 따르면 진화론이란 결코 절대적 진리(THE Truth)가 아니고, 단지 세계를 설명해주는 현재까지 나온 '이론'들 중에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창조론자'들이야 말로 자신들의 검증되지 않고, 또 검증 불가능한(바로 과학의 영역에 진입할 수 없는 결격 사유) 믿음을 종교적 도그마와 같이 신봉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나는 진화론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과학자의 설명에 동감하고, 그의 설명이 전문가가 제공해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서비스였다고 평가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여전히 논란 거리를 많이 갖고 있으며, 절대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제기하는 창조론자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과학의 본질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과학 이론은 많은 논란 거리를 갖고 있으며 완벽하게 검증되지 못한다. 과학은 전술한 바와 같이, 세계를 설명해주는 (반복적으로 검증 가능한) 이론들의 종합체일 뿐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의 계몽 이후에도 여전히 과학을 절대 진리로 신봉하는 지식인은 아마 없을 것이라 짐작하는데, 학계와 거리가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과학을 절대적 진리체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진화론 역시 '절대성'이 결여돼있으므로 오류라고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런 오류의 연장선 상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특히 진화론을 비난하는데, 진화론이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라고 주장해왔다는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실제로 진화론을 공부해본 적이 없음을 공표하는 목회자들과, 획득형질이 유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진화론이 잘못됐다는 엉뚱한(irrelevant and misplaced) 비판을 어린 학생들에게 배포함으로써 '창조론'을 억지 교화시키는 '창조과학회' 회원 등이 우리나라의 경우 두드러진 예인 것 같다. 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도들의 이같은 진화론 비난이 '잘못됐다(wrong)'고 평하지 아니한다. 나는 단지 그들의 비난이 과학과 이성과 상식의 거부라고 평가할 따름이다. 생물학자, 지질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들이 과학적 방법으로 수집한 자료에 의해 지속적으로 검증되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 유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실제로 의약품 개발과 임상을 통해 우리 실생활에서 검증되고 있는 진화 이론의 설명의 힘을 종교적 도그마에 맞지 않는다 하여 애써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상식이 통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은 예견 가능한 일이다. 하여, 우리 사회의 몰상식화를 조금이나마 막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내 학생들이 과학과 상식을 존중하는 건전한 이성을 함양하도록 돕기 위해 그들에게 진화론적 시각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이는 진화론에 대한 거부감을 마치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앙의 심오한 회의와도 같이 내세우기도 한다. 나는 과학과 합리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에 매우 동조하지만(웬델 베리가 잘 설명해주듯이), 이는 이를테면 진화론적 우주 설명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에서 기인한 것일 뿐, 진화론이 제시하는 우주에 대한 부분적 설명 그 자체의 가치를 무작정 거부하자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나는 신앙, 또는 영성은 과학을 포함한 보다 큰 우주 인식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나의 신앙과 영성에는 도그마나 독트린이 없으며, '절대적 진리'라고 내세울 진술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사랑이 신의 본질이라는 믿음 외에는..... 나의 신앙은 열려 있고, 과학의 (제한된) 힘을 인정하며, 이성을 포괄한다. 나는 오도된 신앙보다는 차라리 과학적 이성의 함양이 훨씬 덜 파괴적이라고 믿는다. 광신도 보다는 리차드 도킨스 쪽이 인류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¹

아마도 과학과 신앙의 조화라는 토픽은 과학자와 종교인 양측으로부터 오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읽은 한 미국인 목사의 주장이 나의 입장과 일치하기에 그분의 주장을 번역하여 옮겨본다:

"저는 과학도로서 대학의 학부과정을 시작했다가 나중에야 종교에 귀의했는데요, 저에게 성직 서품을 받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죠. 왜냐하면 제가 과학도였었고, 그래서 제 사고방식이 오염됐다는 거예요. [그러나] 과학과 종교는 실재[reality]에 관해 사고해보는 상이한 방식인 것이고, 양쪽 다 도움을 주고, 또 양쪽 얘기를 다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성직자가 일반인에게 일상의 사건의 의미에 관해 가르침을 줄 경우에]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 가능한 한 아주 조금만 말해주는 것이죠. 성직자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요. 결국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신학적 질문으로 좁혀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간단히 말해서 우리(성직자)는 아는 게 없어요. 왜 신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건지 그 이유를 꼭 제가 알고 싶어하지는 않는다고 봐요. 어쩌면 신은 그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인으로서 제가 이런 일들의 연유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제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힘으로 [일상의 사건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데 있습니다." [Time, 2009.2.23]

이 목사님 말씀대로, 바람직한 종교인, 또는 신앙인의 태도는 신의 의도를 해석하는 일에 대한 독점적 영업권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 각각이 자신의 힘으로 신에게[또는 최상의 자기에게, 또는 우주의 비밀스러운 본질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고 나는 믿는다. 헌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신에 다가가려 할 때, 그가 자신의 이성이라는 역량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은 당연지사고, 따라서 이성의 축적 체계이자 결정체인 과학을 경원시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과학과 상식과 이성, 이 모든 것이 결국 건전한 영적 성숙의 필요불가결한 요소들이라는 말이다. 이런 나의 태도가 특이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미국의 영성 지도자 디팍 쵸프라가 달라이 라마에 대해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때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달라이 라마가 내게 해준 말 중에서도 가장 의식을 고양시켜준 말은, 모든 조직된 신앙 체계들을 무시하고 보다 높은 의식의 길로 매진하라는 말이었다. "종교에 의지하지 않은 채, 우리는 상식과 우리의 경험과 과학이 찾아내준 것들을 통해 이해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뭐 하러 있느냐?

글쎄올시다.....

종교가 왜 있게 됐는지는 알 것 같지만, 종교가 왜 있어야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
¹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관한 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의 차분한 견해, 그리고 회슬레의 다윈에 관한 견해가 이전에 올린 글(길벗과 모은 좋은 글, 2008.2.9)에 담겨 있습니다.

'수행일상 2009'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