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의 학교'에 대한 변(辯) (2010/6/27)
 



© Suk Hoon Han                                                                                                                                                                                    
 
 

나의 첫 책, '유진의 학교'가 세상에 나온지 일 년이 훌쩍 넘었다. 일반 서점가에서 이 책의 판매실적은 대단히 부진하지만, 내 수업의 교재로 등록했기 때문에 사보는 학생들이 많고, 또 문화체육부에서 우수도서로 선정하면서 대량 구입하여 전국에 뿌려준 덕택에 우연찮게 마주쳐서 읽은 독자들도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학생과 독자, 그리고 벗님들로부터 이런 저런 질문을 받아왔다. 마침 학기말에 수많은 학생들이 제출한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읽고 난 터이고 하여, 저자의 입장에서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한 번 정리해둘까 한다.


질문 1: 주인공 유진은 왜 미녀여야 하는가?

원래 내가 출판사에 보낸 초고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 [이 책이] 이처럼 고귀해 보이는 철학적 목적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에 대한 아부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주인공은 미모의 20대 후반 여성이다. 나의 학생들의 다수가 교직을 희망하는 여성임에도, 남성우월주의 쇼비니스트마냥 여주인공의 외모를 부각시킨 이유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여주인공이 미인이 아닌데도 성공한 소설은 한 권도 없다는 연세대 마광수 교수의 지적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소설이 성공적이지 않기를 바라는 필자가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을 여성들을 위하여 주인공 남자들을 꽃미남으로 설정하는 서비스 정신까지는 발휘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전하는 나 자신의 그릇이 작다고 해서, 독자들의 그릇 역시 그러하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오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에서 윗글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삭제를 요청해와서 조금 실랑이를 하다가 그러기로 했지만, 나는 윗글이 나의 색깔을 잘 드러내준다고 본다. 이같은 나의 개성이 싫으면 안 읽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여주인공이 미녀일 경우 독자들이 더 자기동일시를 하게 된다. 왜? 실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해왔기 때문이다. 실은 누구나 자신을 아름답게 여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해서, 소설의 스토리에 독자가 빠질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로써 '미녀' 팩터를 간과할 수가 없다. 나는 진지하게 마광수 교수를 존경한다.
그의 예찬론을 이 싸이트에 써놓은 적도 있다. (나는 완벽한 인간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은 없기도 하고.)


질문 2: '유진'의 모델이 된 인물은 누구인가?

최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내 수강생들 중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이름이 '유진'이었다. 아마 25년 쯤 전에 자식에게 붙여주는 가장 인기있는 이름이었던가 보다. 또한 기억에 남는 유진이도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 유진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은 없다. 또한 서유진이 나의 이상적 여성상도 전혀 아니다―벗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에 답하자면. 나는 유진과 같은 '쎈' 여성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지만, 그런 여성들에게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지는 못 한다. 그렇기에 이 책 집필 기간 동안에도 유진과 연애도 못해봤는가 보다. 이런 표현은 정신병자의 심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배우가 배역에 몰입하듯, 작가도 자신이 창조해낸 등장인물에 몰입하게 된다. '정상적'인 정신만으로는 창작이 안 될 것 같다. 다음 번 소설에는 내 타입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모셔와볼까 한다.


질문3: 재벌 기업이 자금을 대주는 교육사업을 맡는다는 설정은 로또처럼 비현실적인 행운 아닌가?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다. 내 욕심이 과해 그만 두게 됐지만.


질문4: 무의식에 억압된 기억을 갖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기억을 떠올린다는 설정은 현실에서는 예외적이고 드문 현상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보편적이고 빈번한 현상이라고 본다.


질문5: 주인공들이 술을 너무 자주 마시는 것 아닌가?.

나 자신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설정이다.


질문6: 성폭력 기도가 등장하는데, 말초적 흥미를 유발시키려는 극적 장치인가?

아니다. 직, 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여러 사례들로 인해, 우리 사회 속에 성폭력이 얼마나 만연한지 절감해왔다. 딸 둘 키우는 입장에서 성폭행자들을 화학적으로 거세해버리고 싶지만, 그도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것도 같고, 젊은 여성들에게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나마 심어주고 싶었다.


질문7: 윤아가 학교를 그만 두고 대안학교로 가는 것은 도피 같다. 게다가 그 도피의 원인이 만약에 사모하던 민 선생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면, 여성이 이상주의적 행보를 걷게 되는 것이 고귀한 뜻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남녀과계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가려는 사적인 심리의 결과인 듯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위험이 내재돼있는지 쓸 때는 의식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속의 남성 우월주의가 슬그머니 삐져나온 것일지... 지적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허나 나의 의식은 내가 남성 우월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질문8: 주인공이 결국에 대안학교로 가게 된 것이 불만스럽다. 현실을 저버린 것 아닌가?

아니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아니 이 '신앙수행 싸이트'에서는 그렇지 않겠지), 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홀로 기도하는 수도승이 현실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다고도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톤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문명은 실로 '대안(代案)'이 많이 필요하다. 그 대안들을 시스템 밖에서 다양하게 창출해낼 때 '시스템'도 더불어 생존의 가능성을 일굴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질문9: 저자는 정말 '희망'을 보는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는 것이 공부한 자의 세상에 대한 책무라고 믿는다.


질문10: 속편 제작의 계획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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