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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천박성, 종교의 깊이 (2011/3/20)

일본의 대지진 참사 소식에 인간 삶의 유한성을 절감하게 된다. 충격적인 재난 앞에, 뿌리깊은 반일 정서를 희석시킬 정도로 강한 연민이 대중 속에서 솟아오른다. 우리 시민들이 인정 많은 사람들임을 목도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이른바 '한류 스타' 들이 붐을 일으키고 '공영 방송'이 촉진시키고 있는 일본을 위한 성금 모으기 운동에 나는 동참할 생각이 없다. 허나 이런 나의 태도가 편협한 반일감정 따위가 아닌 이성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성금 운동에서 '나는 빠지겠음'의 의사를 구태여 자랑스럽게 밝힐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만큼 이번의 대지진은 대참사였고, 이에 대해 솟아오른 우리의 측은지심은 그 상태로 가치있는 현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웃나라의 재앙은 아이티의 대지진보다 훨씬 덜 추상적이고, 피부에 와닿을 듯이 구체적인 참상이다―일본에 유학중인 제자도 걱정된다.

헌데 이러한 대참사에 대해 몇몇 개신교 목회자라는 이들은 내 귀를 의심케 하는 망언들을 쏟아냈다. 수만의 목숨이 스러지고 숨어버린 비극 앞에서 '하나님'의 징벌을 운운하는 이들의 마음 안에는 과연 기독교적인 숭고한 사랑은 고사하고라도, 민초들이 감정적으로 쏟아내는 동정심이나마 들어있는 것일까? 만약에 그 정도의 동정심도 없다면 그들은 싸이코패스적 내면의 소유자들은 아닐까? 아니, 그런 말을 한 목사들은 실제로 자신의 그 주장들을 믿고나 있는 것일까? 그들의 비즈니스 수완과 지능을 볼 때, 그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실제로 믿는다기보다는, 그런 주장 따위 어떻게 하든 간에 어차피 영혼 따위는 없으니 아무 상관없다는 철저한 무신론적 자존의식의 소유자들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무신론자들을 욕되게 하고자 함은 아니다. 망언으로 세상에 상처를 입히는 목사들의 영혼의 안위에 대해서 나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그들이 수장으로 있는 대형 교회들의 수많은 신도들을 떠올려보면 깊은 우려가 일어난다. 그들끼리 뭘 믿든 말든 상관할 바 없지 않느냐 할지도 모르나,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우리 시민 전체의 큰 덩어리이고, 전체 사회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미 현 정권 출범 이후에 개신교 집단의 배타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다양한 사회집단들과 갈등이 표출돼왔고, 불교계도 이 싸움에 끌려들어와 불건전한 마찰의 정도가 심화되지 않았는가.

모처럼 시간이 난 3월의 토요일 오후, 스승님처럼 여기는 원로 학자분을 몇 해만에 뵐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뵌 것만으로도 참 반가웠는데, 선생님께서는 새로 출간하신 저서 한 권을 내게 주셨고, 나도 내 책 '유진의 학교'를 선생님께 드렸다. 공부와 종교와 영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선생님께서는 한국 사회의 종교적 천박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기복신앙을 넘어서 깊이를 갖추게 된 종교신도들에 비해, 종교의 상징 체계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맹신을 강요하는 천박한 종교의 신도들 수가 이 땅에 너무 많다는 점에 대해 선생님과 나는 견해를 같이 했다. 선생님께서는, 깊은 종교를 추구하는 이들은 타 종파들과 잘 소통하는 데 반해, 천박한 수준의 종파들은 자신들끼리도 싸운다고 하셨다. 그것이 맞는 말씀이다. 지진이 신의 징벌이라는 수준의 인식을 가진 지도자를 섬기는 무리와 같이 천박한 인식의 수준에 함몰돼있는 종교집단은 그들끼리의 영업권 분쟁 이외에도 여타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악영향 때문에도 우려를 일으키는 집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향력 있는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는 바로 이같은 집단에 정면으로 맞서 '호전적인 무신론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치기까지 한다(허나 선생님과 나는 도킨스가 깊은 수준의 종교에 대한 이해는 거의 없다는 점에도 동의했다).

나는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선생님께 여쭸다: 그렇다면 그 천박한 수준의 종교에 미혹돼있는 이들이 어떻게 깊은 수준의 종교적 인식과 수행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그들이 깨쳐야 한다고 하셨다. 깨침이란, 앎일 테고, 나는 이를 불교의 유식학적 견지에서 강조하는 무지의 타파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했다. 나는 또 여쭸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칠 수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 본인 스스로의 발심(發心)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무지를 넘어설 수 있겠는가. 나는 또 여쭸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력할 마음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어떻게 그들이 무지를 넘어설 노력을 할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울 수라도 있겠습니까?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는 선생님께서는 내게 단순한 확답을 주지는 않으셨다. 그래, 이런 게 어디 하나의 정답이 있을 법한 문제이겠는가, 만약 내가 진실로 타인의 무지가 애처롭다면 나 스스로 그를 도울 나만의 방법을 평생 궁구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선생님께서도 평생 지속해오신 학문과 저술을 통해 그들이 무지를 벗아날 수 있도록 도와오신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무지를 깨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을 나는 불교의 심우도 앞 편의 소의 뒷 모습을 얼핏 포착하는 단계로써 표현했다. 헌데 선생님께서는 먼저 집 떠나는 일이 선행돼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래, 집을 떠나고 나서야 소의 꽁무니를 어디선가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집을 떠날 마음은, 즉 자신의 비좁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날 마음은 어떻게 먹게 되는 건가? 아마도 인생에서 무수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사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혼 한 귀퉁이에 점화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점화를 '나'가 하는 것일까? 신비주의자인 나는 그 점화를 신께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지로써 불을 붙인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내 경우에는 신께서 불을 붙여주신다는 생각이 든다. '부름받은 이는 많으나 선택받은 이는 적다'는 기독교 경전의 말처럼, 일단 신께서 영혼의 구석에 불을 붙여주는 이들의 수는 많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깨달음을 향해 가겠다는 그 시발점에는 에고로서의 '나'의 의지가 아니라 신적인 '자기' 또는 신의 손길이 다가와줘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부름을 받은 이후에도 발심하여 깨침에 이르는 이들의 수는 적다는 데 있겠으나... 아무튼 결론적으로 무지를 뛰어넘어 깨침을 얻는 일은 한 개인의 표층 의식 수준의 의지만으로 진행될 일이 아니고, 에고를 뛰어넘는 깊은 '자기(Self)'나 신의 의지의 행사가 필요할 터인 즉, 어떤 이의 종교성이 천박하다고 해서 제3자가 그의 표층 의식을 설득하여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성질의 사안은 아닌 듯 싶다. 단, '신의 부름' 또는 내면의 자기의 깊은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을, 그래서 깨침을 희구할 수 있을 내적 성향을 계발하는 일에는 혹여 교육이 영향끼칠 수 있을 여지가 있지 않을까? 나는 대단히 소심하게 묻고 있다. 나의 가설에 확고부동한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신께서 부르지 않는다면, 자기 안의 깊은 음성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러면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거리에서 전단 나눠주고 확성기에 대고 '불신 지옥' 외치는 식의 외래적(exogenous) 개심(改心)의 시도는 다 헛되고 쓸데없는 짓들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 사회의 많은 이들이 깊은 종교적―아니, 무종교적이라도 좋다―추구심을 갖기를 바라는 나는 교육자나 스승들이 어떤 시도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왜냐하면 어차피 신께서 알아서 부르실 테니까. 그러나 혹시 신이 너무 적은 수의 사람들만 부르시면 어떻게 하지? 에이, 그건 정말 어리석은 걱정이다.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부름을 받는다고 믿는다, 단 그들이 들을 귀가 없을 뿐이지. 결정적인 부름은 신이나 신적인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치자. 속세의 보살들이나, 외람되지만 스스로 교육자를 자처하는 나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얼까? 그저 그들이 부름을 알아챌 수 있는 내적 성향을 계발하는 데 뭔가 도움을 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한 내적 성향의 계발에는 이성적 역량, 지성의 성숙이 꼭 포함될 것 같다. 또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도 들어갈 것 같다. 나는 교육이 이런 영역에서 선한 영향을 끼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내가 수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행하는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그들로 하여금 자그마한 에고를 뛰어넘는 성숙하고도 커다란 인식의 가능성을 눈치챌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는 점을 내 학생들은 아마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전도도 아니고, 선교도 아니며, 방향 제시도 아니고, 교화(敎化)는 더더욱 아니다. 내 목적은 내 학생들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가 되도록 돕는 데 있지 않다. 유신론자가 됐든, 무신론자가 됐든, 유심론자가 됐든, 유물론자가 됐든 아무 상관 없다. 단지 그들이 표층의 천박한 지능 수준을 넘어서서 보다 고귀한 자기 인식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기를 희망할 뿐이다.

나는 왜 그들이 깨침을 겪고 깊은 인식, 또는 깊은 종교성에 도달하기를 바라는가? 그게 내가 신께 받은 소명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래야 이 세상이 좀더 살 만 한 곳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뵌 선생님께서는 깊이 있는 종교성을 수용한 신도의 수가 많은 사회가 사회경제적으로도 발전한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그래, 19세기와 20세기에는 막스 베버의 설명대로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특이한 종교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회들이 자본주의적 발달의 상승세를 잘 탈 수 있었겠듯이, 21세기를 전후한 이 시대에는 원시종교적 표층성, 기복신앙의 천박성을 초월한 깊은 종교성을 수용할 만큼 사회·문화·교육의 차원에서 성숙한 사회들이 경제적 발전의 상층에 자리잡고 있다는 주장을 충분히 할 법 하다고 본다. 나는 깊은 종교성을 사회경제적 발전의 성과물로 간주해왔건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오히려 후자가 깊은 종교성 덕분에 이루어진 성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덕성, 사회적 자본으로써의 신뢰도, 투명성 등등이 정치와 경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은 도처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회적 통념은 종교를 예배당이나 절간에서만 통용되는 특수 문화처럼 간주해왔다. 그러나 종파성을 뛰어넘은 영성에 대한 추구, 혹은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한 모색은 특정 '성소'를 뛰어넘어 인간의 모든 일상에서 그 의미와 유용성이 밝혀져야 할 중대한 가치가 있는 이슈이다. 나는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실용성' 옹호와 영성의 수행을 분리하여 보지 않는다. 인간과 삶은 너무도 복잡하여, 철학이든 영성이든, 인간과 삶을 이해해보려는 나름의 강점을 지닌 제한된 시도에 불과하겠으나, 그런 시도를 통하여 우리의 성장과 개선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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