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 Suk Hoon Han                                                                                                                                                                                      

퇴계와 같은 고수가 세상의 역설과 모순에 눈길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도산서원에는 이 대스승이 후대에 전해주는 조언이 서려있는지 모른다. 내가 듣고 읽어서 아는 바에 의하면 퇴계는 청빈한 구도적 삶의 실천을 통해서 성리학적 가르침을 세상에 베풀다 갔다. 그것이 그가 세상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최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서원 초입에 정우당(淨友塘)이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아름다운 연잎이 촘촘히 수면을 메우고 있다. 그 앞에 붙은 설명 글이 멋지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다.'

진흙에 뿌리를 내리는 연꽃의 '성향'은 나도 예전부터 신비롭다고 여겼었지만, 연꽃 줄기의 속이 비었다는 사실을 짚어준 것은 생소했다. 그리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데도 향기가 멀리 퍼진다는 것... 바로 에고의 아집을 비운 자기실현한 이의 정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퇴계의 도산십이곡에는 이런 글도 있다: '푸른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아서 언제나 푸르게 살아가리라.'

진흙에 뿌리를 담그고 사는 연꽃과 같이 속세의 모순을 포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점은 영원히 푸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이를 수 없는 경지일런지도 모른다, 퇴계도 다음과 같이 토로했듯이: '몸은 은퇴하여 어리석은 분수에 편안하건만, 학문은 후퇴하니 늘그막에 근심이 되는구나. 시내 위에 비로소 자리 잡고 살면서 흐르는 물에 날마다 돌이켜보네.'

엘리트이건 민초건, 성리학이건 샤마니즘이건, 방황하고 실패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숙명이 자기실현의 길 아니겠나. 허나 하루 벌어먹기가 힘든 민초가 아니라 그 백성들의 노고 덕에 편히 먹고 사는 엘리트라면 세상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 말이다: 21세기 한국의 거대 외래 종교들은 '아편'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사회의 구조적 불의를 은폐하고 결과적으로 지배계층의 정치경제적 독점을 영속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지 않는가?

지천명에 접어들어 마르크시스트 같은 얘기나 하고 있다고 조롱당할지 모르겠지만, 거시적으로 이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아마 세상은 원래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건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그런 구도 속에서라도 세상사의 각 분야가 보다 본질적인 제 몫을 수행하게 개선될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이 자라나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에 유생들이 그러한 이상을 꿈꾸는 동안, 무당들은 흉포한 현실의 압박으로부터 민초를 달래줬다. 우리에겐 이상을 꿈꾸는 것도 필요하고, 위로와 치유도 필요하다.

퇴계와 작별 후 안동시에서 헛제삿밥 한 그릇 사먹고 귀가했다. 남들 땀 뻘뻘 흘리며 일할 때 유람이나 다니는 나는 충분히 위로 받았고 충분히 치유받은 인간이다. 이제 내 생각만 말고 다른 이들을 위로해주고 도와줘야 할 계제에 이르렀음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