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
 

 © Suk Hoon Han                                                                                                                                                                                      

샤만이 자연의 정령과 소통하는 민초의 삶의 영역을 벗어나 사대부들이 도를 논하는 서원으로 향했다. 이번 여정의 첫 번째 목적지로 삼은 소수서원은 주변의 죽계구곡의 수려한 풍경 속에서 고즈넉한 분위기에 잠겨있는 곳이었다. 서원 앞 계곡에는 경자(敬字)바위라는 것이 있다. 물가의 바위에 붉은 색의 '경'자를 새겨놓은 것이다. 조선 세조3년에 단종복위 거사의 가담자인 이 고을 순흥의 주민들이 학살을 당하여 수장당했는데, 이곳에서 밤마다 원혼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자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한 뒤 위령제를 지내자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경'은 성리학의 주된 수양 방법론으로, 나는 이를 '한 번에 하나에 완전히 몰입하여 나와 타인의 최상의 본질을 깨닫기'라고 학생들에게 풀이해준다. 신성을 품은 존재로서 나를 보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경은 평소 나의 일상에서 종종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성리학의 고수 도인이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을 새겼다는 의미심장한 사건에 대해 생각해본다.

현세의 원한을 떨치지 못하여 서러운 기(氣)에 얽매어있는 영혼들에게 우주 생명의 본질을 회상시켜 주려는 의도에서 '경'을 새긴 것일까? 한 맺힌 영혼도 자기의 본질을 보면 지상의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퇴계가 인간의 본연지성이라 일컬었던 우리 안의 리(理)를 영혼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영적인 본질이란 융의 개념을 빌면 인간 내면의 신성(神性)의 원형(archetype)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본질 따위는 없다는 게 본질이라는 관점도 있기는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