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여정

여름 여정 (2017/9/3)

애들이 다 자라서 예전처럼 여행 데리고 다닐 일이 없어지고 보니 나 혼자 훌쩍 길을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올 여름에는 어쩌다보니 그럴 기회가 더 많았다. 6월에는 제주도 남쪽 바닷가로 내려가 까페를 차리고 인생 2막을 연 친구를 보러 갔다. 분위기 좋고, 커피 맛있고, 희안한 디저트도 나오는 조용한 까페인데, 책이 많아 '북까페' 비슷하고, 무엇보다 바로 앞이 해안도로이자 올레길이어서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여러 길벗님들의 방문을 권한다. (까페 봉봉, 서귀포시 남원읍 남태해안로 101)

밤에는 이런 전경이고, 까페 앞쪽으로는 아래와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멋진 곳에 어렵게 자리 잡은 친구 부부가 노력한만큼 행복한 삶을 일구기를 기원한다.

7월에는 울산으로 파견 근무가있는 외로운 선배를 보러 ktx 타고 가서 울산과 부산을 돌아다녔다. 울산은 초행인데, 선배 덕분에 좋은 곳들 구경할 수 있었다. 아래는 대왕암 가는 산책 길.

방학도 되고, 큰 딸도 기숙사에서 돌아와 있던 어느 날, 대입 수험생으로 학업에 여념이 없는 둘째만 빼고, 아내와 큰 애를 데리고 훌쩍 괴산의 화양9곡에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스무 살 무렵부터 정말 여러 번 갔던 곳인데, 내가 워낙 산과 계곡을 좋아해서 자꾸 또 가게 된다. 계곡 물살을 굽어보는 운영암을 볼 때마다 암자 마루에 걸터앉아 술 한 잔 마셔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더운 8월 내내 자전거를 타고 집 주변을 싸돌아다녔다. 그러다 서울대공원 호숫가에 새롭게 조성된 예쁜 산책길을 발견하기도 했다. 아래는 그 길에서 바라본 호수의 모습.

방학동안 부과된 여러 의무를 완수하고 8월의 마지막 주에는 3박4일 일정으로 혼자 강원도 인제로 갔다. 이제는 서울서 버스 타고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14살 적에 캠핑하러 다닐 때는 하루 종일 걸려서 겨우 도달할 수 있던 오지였다. 그후로 수도 없이 가본 백담계곡, 십이선녀탕 등은 나의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다만 이제는 옛적처럼 푸른 계곡물에 들어가 수영을 하지는 않지만, 청정한 물을 바라보는 것은 나로서는 비길 데 없는 낙이다.

사흘간 묵은 인제 만해마을 '문인의 집' 앞의 해바라기 밭이다. 어느덧 태양 빛이 가을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다. 혼자 '문인의 집'에 들어가 있으면 글을 많이 쓸줄 알았건만, 실은 산과 들만 열나게 쏘다니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인제에 틀어박혀 반 년 쯤 지내보고 싶다.

시외버스 타고 가느라 짐도 무거웠는데 굳이 배낭에 쑤셔넣어 가져간 두꺼운 책 한 권이 헤세의 '유리알 유희'였다. 이십 대에 읽고 뭔 소린지 감이 잘 안잡혔는데 오십대에 다시 읽으니 이해도 되고 공감도 된다. 얼마 전 읽은 최고의 구절을 기록해둔다. 내가 늘 공부하는 분석심리학적 통합, 과학과 영성의 통합, 존재의 궁극적 본질 등이 한데 담겨있는 문장이다.

우리의 유리알 유희는 학문과 미의 예찬과 명상이라는 세 가지 원리를 모두 결합시키고 있어. 따라서 참다운 유리알 유희자는 이 명랑성으로 가득 차 있음에 분명해. 그는 무엇보다도 음악의 명랑성으로 가득 차 있을 거야. 그 명랑성은 다른 것이 아니지. 세계의 두려운 것이나 불길의 한복판을 뚫고 즐겁게 미소 지으면서 춤추며 가는 용감성, 화려하게 희생하는 일이야.

(박성환 옮김, 청목사 1990, p.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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