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o3

아님 말고 (2006/7/30)

만약 조금이라도 자기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그것은 반드시 <힘>에 대한 고집이 되고, 그 고집은 필연적으로 <싸움>을 부른다.

가령 자신을 부드러우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최악의 경우,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경우, 그에게 <당신은 전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해보라. 그것도 도저히 반론을 펴지 못할 상황,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는 현장에서 말이다. 그는 흥분하여 노여움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풀이 죽어 움츠러들 것이다.

이것이 에고가 움직이는 현상이다. 그런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것에 대해 자기의 <힘>을 넣고 만다. 이런 일은 거의 모든 사람, 특히 여성에게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최악의 에고이다. 세상은 그걸 에고라고 하지 않고 칭찬을 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붓다들의 관점에서 이것은 완전한 에고이다. 자신이 <마음이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자기 본위인 사람은 없다.

또 남성은 <나약하다> <무기력하다>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낸다. 특히 경영자의 위치에 서 있거나 어떤 힘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경우라면 더욱 뚜렷해진다 ....

많은 붓다들은 사회 상식이나 정치적 탄압과 싸우고, 또 세간의 상식과 싸워왔다. 그런데 그것은 언동(言動)에서만 싸우는 것으로 보일 뿐, 실제 그들의 내면에는 싸움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한다. "나는 온갖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

붓다의 내면, 심리적 차원에서는 아무 것도 싸울 것이 없다. 그들은 보통 화가 날 상황에서도, 관찰하고, 바라보고, 혹은 무시하고, 그저 느긋하게 그 순간 지금 여기의 존재를 음미한다.

만약 현상을 자기 생각대로 어떻게 <해보자>거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힘에 고집하고 있다면 사람은 항상 자기가 나설 차례, 그 힘을 발휘할 차례를 기다리고, 언제나 자기를 선전할 수 있을까에 집착하며, 결국 거기에 사로잡힌다.

- 폐허의 붓다, pp. 40-42

지난 학기, 논술지도에 관한 수업 도중에 '상상력'이라는 저의 글을 학생들로 하여금 읽고 비평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글의 말미에 "아님 할 수 없고"라는 표현을 적어 놓은 것이 학생들로선 수긍하기 어려웟던가 봅니다. 한참 자기 주장 다 펼쳐놓고선 끝에 가서 그렇게 (무책임하게!) 뒤집어 버리면 어쩌냐는 것이었지요. 그들 말이 맞습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변을 풀어놓았습니다: "딱 한 가지 변명을 대자면, 끝의 "아님 할 수 없고"라는 무책임한 문장이 저 자신의 나름의 우주관을 담고 있다는 점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우주관과 같다고 할까요, 허무를 인정하는 낙관주의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쉽게 언어의 그물로 잡아낼 수 없는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제가 무책임한 인간임을 고백하는 문장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둡니다. 못 믿겠으면 할 수 없고."

끝까지 무책임한 선생일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절실한 자신의 주장이라 하여도 그것에 에고의 힘을 실어줄 경우, 그 힘에 집착하게 된다는 위의 에오의 말씀과 제 입장이 비슷한 듯 합니다. 결국 저는 에오와 같이 붓다적인 태도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온갖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붓다적 태도를 지지한다는 것일 뿐, 붓다의 경지에 근접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폐허의 붓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