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실체

악의 실체성 (2008/8/4)

우리가 일체의 것, 일체의 인간의 실상을 보는 일에 마음의 눈이 익숙해지면 마주 대하는 세계가 아름답고 빛나는 세계로 변모해 갈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

실상만 보고 있으면 현상을 보는 날카로운 비평의 눈이 멀어 버려, 현실의 현상계에 잘 대처하는 실제적인 지혜를 잃어 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세상 일들을 대처해 나가는 데는 이면의 어두운 곳까지도 생각을 하여 거기에 선처하는 방책을 세워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잔재주가 능한 처세인은 한 때는 성공한다 할지라도 오래지 않아 인격의 빛을 잃고 위대함을 잃어 버려,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인격의 힘이 없어지니 대성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당장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의 나쁜 면 어두운 면만을 찾아내어 의기양양하고 있다면 자기 자신의 인격이 저속해지고 오무라들고 추해져서 마침내는 자기 자신의 인격의 빛이 꺼지고 마는 것이, 마치 남편의 어두운 면만을 보는 아내가 히스테리로 쓰러지고 마는 것과 같은 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이 세계에서, 가정에서, 남편에게서, 자식에게서, 여러 가지 악이 나타남을 보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불완전이 나타나 있음을 보게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을 고치고 그 불완전을 바로잡고 싶다고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불완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참으로 개선할 수는 없습니다. 환경은 오직 내 마음의 전개입니다.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실상의 선을 보는 마음이 되어야만 비로소 주위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좋게 다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심리학을 연구한 사람이면, 악을 정복하는 데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과 맞붙어 싸우기보다는 악은 없다고 자르고 오직 선만을 마음에 그리어 그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살고 행위해 나갈 때 오히려 선이 실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생명의 실상, pp. 111-113

예전에 다니구치 선생의 글에 대한 제 평을 읽고 한 방문객께서 말씀을 건네오셨는데, 제가 무심코 그분께, 일본인인 다니구치 선생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보시는가 여쭸더랬습니다. 헌데 바로 그 질문 하나 때문에 그 방문객께서는 저를 반일감정에 속박되어 '세속의' 잣대를 버리지 못하는 인간으로 평가하시고 더 이상의 대화를 접어 버리시더군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한국 땅에서 저처럼 일본 옹호하고 '친일적(?)' 언설을 일삼는 지식인을 보기도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가 한국인에게는 축복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종군위안부의 역사적 실체를 부정하는 '뉴라이트' 쪽은 제외하구요. 전 그쪽은 되게 싫어합니다.) 저는 일본의 과거의 역사적 죄과와는 무관하게 현재의 일인들과 교류합니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인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 한국인이 됐든, 일본인이 됐든 간에. 저의 일본에 대한 자세는 남이 보기에는 매우 복잡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제 자세의 모든 부분에 대해 당당하게 변론할 논거들이 있습니다.

저는 일제 때의 친일파 절반 이상을 '민족 반역자'라고 싸잡아 비난하지 않고, 꽤 유보적이면서도 동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만, 친일파로 확인된 이들중의 상당수에 대해서는 후세대가 엄정하고도 명확한 기록을 보전해야 한다고 믿으며,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지성적 비판은 지당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일제가 한반도에 끼친 영향 중의 경제적, 물질적 부분들이 한국 근대화에 큰 자취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만 - 긍정적이 됐든, 부정적이 됐든 간에 -, 일제 강점기는 한국인 대다수에게 재앙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저는 일본과의 우호선린 관계 지속을 강력하게 희망합니다만, 자국내의 우익세력을 끈질기게 증식시키는 일본인들의 정치·사회·문화적 역동성에 대한 우려를 버릴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자행한 반인간적 만행들에 대한 역사적 물증이 무수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국민들의 의식에서 삭제해 버리려고만 기를 쓰는 정치권 안에는 전체주의의 위험 요소가 다분히 내재돼있죠. 전체주의가 군국주의적 팽창주의로 기화할 소지는 매우 풍부하구요.

이런 제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구도자라 할지라도 그 인물의 사상이 배태된 역사적 맥락과, 또 그 맥락에 대한 그 인물의 입장에 대해 분석해보는 것은 상식적인 지적 활동일 뿐입니다. 저는 많은 일본 문인, 사상가, 종교가들을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분들이 '일본인성(性)'을 훌쩍 뛰어넘어 인류보편성을 획득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모든 일본 사상가들이 그러하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저는 일본 문화를 애호하는 그만큼 일본 문명을 경계합니다. 한국인으로서.

어찌됐든 간에, 다니구치 선생의 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인용문 끝 부분의 "악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과 맞붙어 싸우기보다는 악은 없다고 자르고..." 라는 대목은 얼핏 봐서 제가 교육철학 시간에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루소의 '내면의 화해'라는 개념과 정반대인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 말씀과 루소 말씀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독도 문제로 신경을 많이 쓴 탓에, 일본의 영성가에 대한 제 입장을 좀 주절거려봤습니다.

'생명의 실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