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오형모 교수의 특강: 한국인의 마음의 변화를 위하여'의 전문(全文)

“존경하는 깊은숲학교의 학부모님 여러분. 제가 몇 해 전인가 서울역 앞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열 살 쯤 먹은 사내애를 데리고 가던 아이 엄마가 그곳의 노숙자를 가리키며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얘, 너도 공부 열심히 안하면 커서 저 사람처럼 된다.’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헌데, 경제적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아주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의 논리인데, 이제는 그런 시절보다는 꽤 먹고 살만해졌는데도 그 논리를 그대로 고수해야만 할까요? 살아남는 그 자체만을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논리보다는, 좀 더 잘 살기(well-being)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논리가 이 시대에 적합한 것 아닐까요? 생존 그 자체보다는 삶의 질이 관건인 시대가 아닌가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녀가 공부 잘 해서, 그저 살아남기보다는 아주 잘 살아주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저의 의문은,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오늘 날 우리의 2세들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을 제공해주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1960~70년대처럼 먹고 사는 것을 보장받는 데 급급한 정도의 교육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만 할 시점입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현재 실행되고 있는 교육 실태의 문제점들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진단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찰을 실현 가능한 실천으로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위한 말씀을 드리려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지금 우리의 세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음을 증언해왔습니다. 그러한 다양한 변화들 중에서 특히 ‘지식기반경제의 도래’라는 추세에 주목한 교육 전문가들이 많은데, 그들은 새로이 도래하는 ‘지식 사회’에서는 재래식의 학벌위주 교육의 구도가 와해되고, 새롭고도 다양한 방식의 인재 양성 방식이 강력하게 요청될 것이며, 실은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전문가들의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에 의하면, 이른바 S.K.Y.를 목표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결코 미래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한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변화된 미래 사회에서는 학벌이 아니라 개인의 ‘진짜 실력’ 즉, 사고력, 창의성, 의사소통력 등이 한 사람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합리적인 예측을 경청한 세계의 교육자들과 교육 당국들은 그러한 실력과 창의력 등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자국의 교육제도를 뜯어고치기 시작했고, 이러한 교육개혁은 대체로 세계인들의 공감을 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글로벌’한 현상이 대한민국에서는 예외인 듯 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당국과 교육학자들이 세계적 조류에 발맞추어 우리의 구태의연한 교육 체제의 개혁을 주창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러한 ‘교육 공급자,’ 즉 교육부와 교육자들의 ‘계몽’에 우리의 국민이 쉽사리 설득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국민은 지식사회의 도래에 대비해 자신의 자녀들을 새롭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양육시키기 보다는, 그러한 새로운 환경의 도래가 당연히 수반할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하여 더욱 방어적으로 재래식 양육 방식, 교육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어차피 어찌 대비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안전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방식에 더더욱 집착하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요.1)

미래에 대한 정보 부족에 대한 이러한 대응 방식은 실은 대단히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례 없는 새 시대에 대하여 용감한 도전 정신으로 부딪쳐보는 것도 물론 매력적인 정신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특히 자식을 둔 부모들은 자신의 귀한 자식들을 담보로 그러한 모험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전인미답의 황무지로 자식의 등을 떠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합리적’이고, ‘안전한’ 태도가 아무리 자식 사랑에 터하고 있다 하여도,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대단한 사랑이 못됩니다, 보호 정신이라고 하면 모를까. 그래서 나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심쩍은 새로운 방식에 자식을 맡길 수 없는 이 땅의 학부모님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한 합리적이고 안전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교육받은 부모들 당신은 그럼 현재 얼마나 잘 살고 있느냐고. 도전과 모험과 새로운 시도를 거의 완전히 도외시하고, 전통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진 명문대 진학이라는 길만을 거의 유일한 목표로 삼은 교육적 실천의 산물인 현재의 부모들은, 그 결과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알지 못하는 앞길에 대한 두려움이 큰 존재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깊은 본질일 것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길을 뚫고 나아가 온 것 또한 인간입니다. 도전과 모험 정신 역시 우리 존재의 깊은 본질일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적 본질 중 어느 한 쪽에만 집착할 때 우리가 온전한 존재의 성숙을 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습니다. 자,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지나치게 두려움에만 집착한 나머지 모험정신을 압살시켜버림으로써,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긴다는 자식들의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직 안전만을 위해서 일류대 진학이라는 구태의연한 목표만을 줄기차게 고수함으로써, 소중한 자식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역량을 발휘하고, 또 그럼으로써 쬐그맣게 오그라들어 있는 우리 기성세대 보다 더 확장된 삶을 구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막아버릴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요?

세상이 변하고 있는 만큼, 그 변화에 맞게 교육의 방식이 변화해야 함은 지당한 일입니다. 조선시대가 근대로 바뀌었을 때에는 교육 방식도 그에 걸맞게 바뀌었어야 했고, 근대가 후기 산업사회로 바뀌었을 때에는 또 다시 교육 방식이 바뀌었어야 했죠. 교육의 방식이 변하기 위해서는 현 교육 체제를 지지하고 있는 기성세대인 교육자와 학부모들의 의식이 변화해야만 합니다. 교육자와 학부모의 의식의 변화 없이는 어떤 교육 개혁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의식 변화를 돕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한 의식변화는 교육자와 학부모 모두의 깊은 성찰을 요청합니다. 저 자신, 교육자이자 학부모로서 이러한 성찰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자식들과, 그리고 너무도 소중한 우리 자식들이 장차 일하고 살아가야 할 우리 사회를 위해서 깊은 성찰이 필요함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한국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저는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Are You Happy? - 잘 사는 사람의 수가 적은 사회


“여러분은 지금 잘 살고 있습니까? ‘잘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물론 단순히 잘 먹고 산다는 의미를 넘어서, 정신적으로도 만족하며 사는 것까지 포함하겠죠. ‘잘 산다’는 것을 정의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잠시 후에 좀 더 상세하게 다뤄보겠습니다. 일단, 여러분께서는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하여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외형적이고 내면적인 지금의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각자는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믿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자식도 자신 정도로 ‘잘’ 살 수 있다면 만족하겠습니까?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현재의 세태에 대한 다수의 관찰에 근거해 볼 때, 저는 이 질문에 대하여 확고하게 ‘그렇다, 나는 잘 살고 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성인의 수가 우리나라에 그다지 많지 않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경제 수준이나 직업과 같은 외형적인 삶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도 그리 많지 않으며, 더구나 마음의 평화나 삶의 의미 등을 포함하는 내면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더더욱 적은 것 같습니다 - 물론 마음이 편해야 일도 잘 하고 밥도 잘 먹듯이, 삶의 외형과 내면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 터이구요. 우선, 우리나라의 평균적 성인의 직장 및 가정생활을 스케치해봄으로써 제가 왜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잘 살고 있노라고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적다고 믿는지 근거를 대보겠습니다.”



스트레스 많은 직장


“우리나라의 성인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성과 객관성을 지닌 대규모 조사를 벌여야 할 필요성은 그다지 크지 않을 성 싶습니다. 인터넷이나 매스컴을 통하여 직장인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를 살펴보아도, 성인이 경제적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수준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수위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례로 성인 인구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도시 직장인들의 경우를 살펴보죠. 2001년에 한국직무스트레스학회가 실행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직장인의 95%가 스트레스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40%), 일본(61%)의 수준을 크게 상회하며, 한국 직장인들의 22%는 고 위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찍이 한국의 40대 남성의 사망률이 세계최고 수준을 차지한 이래로, 외환 위기 이후의 구조조정을 겪고 ‘글로벌 경쟁시대’에 진입한 한국 기업체의 수많은 샐러리맨들, 그들이 겪는 스트레스의 수준은 가히 살인적입니다 - 실제로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로 인하여 사망하고 있으며 자살을 택하는 이들의 수도 꾸준합니다. 중년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용케 회사에 몸을 담고 있을 수 있는 직장인들에게는 이미 무너져 버린 평생고용의 꿈을 대체할 새로운 노후대책 계획이 절실히 필요하고, 평생일터인줄로 믿었던 직장을 나와야 했던 수많은 ‘젊은’ 은퇴자들은 평균적으로 삼십 년은 족히 될 여생을 무얼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한 형편입니다.

오늘 날 기업체 근무 샐러리맨들은 극소수의 성공적인 예를 제외하고는 30대 후반부터 언제 ‘구조 조정’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전전긍긍하면서, 살아남기 위하여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 하에 외국어 학원 등을 전전하며 그렇지 않아도 빡빡한 직장생활 속에서 한층 증폭된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과 같은 ‘글로벌리제이션’ 열풍이 밀어닥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온, 직장 내의 인간관계 등과 관련된 직무 스트레스 위에 더해진 추가적 스트레스 사항입니다. 퇴근 시간에 저자 거리의 선술집들을 찾아보십시오, 수많은 샐러리맨들이 직장 상사에 대한 비난을 안주 삼아 술잔을 꺾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는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보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지만요.

한편, 일자리를 잃고 ‘조기 퇴직’한 중년의 남성들은 기나긴 여생 동안 무슨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노후 생활을 대비할지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벌이는 새로운 ‘사업’의 성공률은 매우 낮은 것으로 미디어에 보고되고 있으며, 사업이 그럭저럭 유지된다 하여도 새 사업에 만족하는 예를 찾기는 어려운 듯 합니다. 한 때는 대기업이나 금융기관과 같은 조직의 보호 아래, 거래처 등에 위세를 행사하기도 했던 잘 나가던 화이트 칼라였던 이들이 이제는 치킨 집이다 피자 집 등의 사업에 뛰어들어 때로는 손수 배달도 나서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이러한 서비스 업종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주변에만도 과거 대기업과 금융 기관에 몸담고 있던 이들이 느닷없이 요식 배달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경우를 여럿 볼 수가 있습니다. 명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유수한 대기업의 중진이던 사람도 퇴직 후에는 피자집을 차린 뒤, 배달원이 결근하는 날에는 직접 스쿠터 몰고 아파트 단지로 피자 배달을 나섭니다. 직업에 귀천은 없습니다. 그러나 피자 배달은 이 사람들의 인생 계획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었고, 스스로 준비되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 요인입니다. 이런 ‘명퇴자용’ 프랜차이즈 사업에서마저 실패한 중년 남성들 중에는 택배업으로, 공사판으로 발길을 돌리는 이들의 수 또한 적지 않습니다. 직업에 귀천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된 육체노동은 이 사람들이 예상해보지 못했던 일이고, ‘그 나이에’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심한 스트레스 요인입니다. 삶에서 행복감을 맛보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적성이나 재능과 무관한 직업


“헌데, 구조조정이라는 문제와 관련된 직장생활의 고충 사항들보다 더욱 기본적인 문제가 우리의 직업생활에 내재되어있다고 저는 봅니다. 바로, 직업과 자신의 적성이나 재능 사이의 상관성이 매우 작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적성에도 맞지 않고, 자신의 참된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업체든 아니면 그 밖의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 사회의 성인들 중에서, 자신의 직업이 진정으로 자신의 적성과 재능에 부합되고, 따라서 ‘직업의 장이 효과적인 자아실현의 장’이라는 교과서적이고 이상적인 명제를 실제로 구현하고 있는 이의 수는 얼마나 될까요? 혹시 이와 같은 명제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몽상적이어서 현실적으로 그 실현을 기대하기는 지극히 어렵다고 우리들 스스로가 일찌감치 단정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물론 그렇게 단정해버리는 심리가 전 세계의 산업화된 사회에 보편적으로 만연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위 ‘선진’ 산업사회에서는 적성이나 재능을 직업 생활에서 구현하려는 ‘이상’을 비현실적인 바람이라고 포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서구의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들에서는 그러한 이상의 달성을 위해 많은 이들이 심각하게 연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즉, 그 ‘이상’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현실’인 것입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한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비관적인 우리 사회의 심리가 지나치게 우울한 것이 아닐까요? 왜 우리는 그 이상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래로 우리 사회의 학교교육은 대학 입학이라는 정점을 그 유일한 목표로 삼는 통일된 구조를 유지해왔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개인의 적성과 재능에 대한 논의는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모든 노력과 자원이 사회경제적 지위의 상승을 보장해주는 대학 전공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특이한 현상은 오늘 날까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문과생은 법대와 경상계열, 이과생은 의대로 집중화되어 있는 이러한 진학 구도 속에서 개인의 적성과 재능을 살리는 직업의 모색이 마치 일종의 사치와도 같이 여겨져 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성인이 자신의 적성이나 재능과는 무관한 직종에 종사하며, 자신의 직업생활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이 배태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타고난 성향과 재능은 엄청나게 다양한 것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법관이나 재정 전문가, 또는 의사로 만들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학교교육 체제라는 것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일까요? 그러한 소수의 전문직종들이 개인에게 나름의 보람과 보상을 제공해줄 것으로 예상되기는 하지만,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무시한 선택이 과연 궁극적인 보람을 주고 있을까요?

다수의 학부모가 자신의 2세의 장래 희망 직종으로 꼽고 있는 법관이나 의사와 같은 최고의 사회경제적 엘리트 집단의 뒤를 대기업체 샐러리맨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앞에서 관찰된 바에 의하면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인간적으로 만족과 보람을 맛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체 근무 샐러리맨들, 특히 그중에서도 이른바 대기업의 종사자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상당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인중의 대표군이라 하겠습니다. 이 말은 대기업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회사’라는 모델 이외에는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바람직한 직종의 모델이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삼성’이나 ‘현대’에 입사하는 것이 수많은 청소년과 그들의 가정에서 동경하는 직업적 선택이고, 그밖에 전문직종과 공무원 등을 제외하고 나면, 젊은이가 선택할 만한 직종을 상상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 세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직종들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물론 그들이 보장해주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안정 때문이라 하겠으며, 자신의 딸, 아들이 장차 안정된 사회경제적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인지상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이렇듯 제한된 시각으로만 자녀의 미래를 예정해버렸을 때, 그 자녀들은 자연스러운 존재인 자신을 제한되고 인위적인 그 시각에 억지로 끼워 맞출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우리 사회에는 자연스러운 자신을 드러내고 발휘하는 직업인의 수가 너무도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자신의 직업이 자신의 적성에 맞으며, 그 직업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잘 발휘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운 좋은 소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목적을 위해서만 직업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인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니까요.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직장생활, 그 속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한 소망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그 속에서 자아실현을 이룬다는 것은 수도승의 고행 길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보람, 행복, 자아실현, 이런 것들과 무관한 직업생활이란 것, 저에게는 굉장히 불행하게 들립니다.”



흔들리는 가정


“기업의 구조조정의 횡포 앞에 무기력하게 놓여있고, 치열한 경쟁 사회 속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동시에, 자신의 적성이나 재능과는 무관한 직종에 종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비단 한국의 성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어쩌면 21세기 초의 산업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보편화 되어버린 환경에 속해있는 한국의 직장인들이, 자신의 직업적 삶뿐만 아니라 그 밖의 중요한 삶의 영역에서도 잘 살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즉, 다수의 한국의 직장인들은 가정생활이라는 영역에서도 충만한 삶을 일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물론 스트레스 많은 직장 생활을 영위하는 부모가 가정에서 이해심 많고 자애로운 엄마, 아빠 역할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생활의 스트레스가 그대로 가정으로 전이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저 자신, 과거에 적성에도 안 맞고 스트레스 받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집 밖의 스트레스가 여과장치 없이 고스란히 집안으로 전달되었음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깨달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피해자는 물론 제 처자식이었지요. 어린 딸아이의 대단치도 않은 잘못에 대해 고함을 지르며 야단을 쳤더랬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럽고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하에 못난 인간이 밖에서 당한 분풀이를 연약한 어린애에게 해댄 것입니다. 사회생활의 스트레스를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발길질함으로써 풀었다는 한 독일 철학자의 자조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라는 브라질 소설에서는 실직으로 낙담한 애비가 어린 아들의 사소한 잘못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들 비슷하게 못난 남자들입니다.

직장생활의 불만족이 가정생활로 전이되는 경우는 저 같은 인간을 닮은 소수 못난 애비들의 경우에 국한될 것이라고 보지만, 직장과 가정이라는 양대 축 사이의 상관관계의 유무와는 별도로, 일단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이 가정생활에서도 그다지 충만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정생활의 불충실함은 단적으로, 높은 이혼율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2005년에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90년대 후반 이후 급격히 높아져 2004년도 한해에만 거의 14만 쌍이 이혼했으며, 이러한 수치는 전 세계적으로 3위, 아시아에서는 1위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이혼하지 않고 살고 있는 부부들 대부분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가정의 핵인 부부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아내들 중의 적지 않은 수가 우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03년에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한국 주부의 우울증 유병률은 45%로, 이는 전 세계 평균의 2배에 달하는 것이며, 이들 중의 12.3%는 자살충동을 경험했고, 중등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30대 주부의 6.4%가 우울증을 겪었다고 합니다. 부부의 나머지 절반인 남편들은 과연 어떠할까요?

굳이 통계 수치를 찾기보다는 한국 남편들의 직장 밖 삶에 대한 저의 개인적 관찰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밤 11시경 서울 시 외곽의 한 간선도로를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중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낮 시간에 몇 차례 오갔던 길이었건만 심야가 되고 보니 그 거리가 화려 찬란한 네온사인 불빛에 영 딴 세상이 되어 있더군요. 헌데 불을 밝힌 업소들이란 것이 거의 다 이른바 ‘퇴폐유흥업소’들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도대체 이 넓은 수도권 지역에 이러한 거리가 얼마나 많을 것이며, 저 수많은 ‘업소’들 속에는 얼마나 많은 객들이 들어가 있을 것인가? 상식적으로 볼 때 그 객들은 대개 기혼자들일 테고(기혼한 성인이 미혼 성인보다 훨씬 수가 많을 것이며, 유흥비를 댈 능력이 있는 연령대에는 기혼자가 대다수일 것이므로), 엄연히 제 처가 있는 자들이 저런 곳에서 이 시각에 놀고 있구나. 아, 물론 내가 순진한 소년도 아니고, 세상 남자들이 다 저런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 정도야 인정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수의 유부남들이, 아버지들이 저러고 있다는 것이 놀라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그 스케일을 놓고 볼 때,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시아의 몇몇 나라에도 이런 환락가가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구의 경우 퇴근 시간이 지나면 상가들은 철시해버리고, 유흥업소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말씀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유부남들이 접대 여성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업소에 어떤 연유에서건 출입하는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은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값비싼 ‘룸싸롱’은 차치하더라도, ‘노래방’이라는 곳에서 ‘도우미’ 여성을 동반하여 ‘즐기는’ 것을 문제 삼는 직장인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사회 부적응자로 왕따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 정도의 유흥은 성인 사회에서 거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 수준을 넘어선 향락과 외도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다양한 ‘인프라’에 의해 지원받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수도권 근교에, 아니 전국의 군소 도시의 외곽에는 어디에든 형성되어 있는 상당한 규모의 러브호텔 업계의 주된 수입 원천이 유부남(녀) 인구임은 숱한 언론 매체를 통해서 확인돼온 바입니다. 아름다운 북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있는 대규모 모텔 군락은 바로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부적절한 남녀 관계’가 배출한 에너지를 그 생존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화려한 불야성을 이루는 ‘미사리 까페촌’이라는 곳도 ‘작업성 장소’로써 수도권 시민에게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요. 저는 이러한 현상 그 자체에 대하여 일종의 청교도적 윤리관의 잣대를 들이대자는 것이 아니라 - 저 자신 청교도적 도덕군자가 전혀 아니구요 -, 이러한 현상의 규모가 유독 한국 사회라는 곳에서 지나치게 크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흥과 향락을 위한 산업은 지구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사회적으로 의문 없이 수용되고 당연시되고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울한 아내들과 밖으로 도는 남편들’이라는 현상이 인류 보편적 현상일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을 문제 삼고자 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의 노부부들은 삶의 동반자로서 함께 여행 다니며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한국부부들의 분리 현상은 부부의 연령이 높아지면서 해소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더군요. 우리나라에는 부부동반의 문화가 자발적인 수준에서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자식들 다 키운 부부가 노년에 여가를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 특히 서구 사회들과 비교해볼 때에는요. 한국의 나이 든 부부들은 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주말이 되면 아빠는 등산가고, 낚시가고, 골프 치러 가고, 엄마는 따로 곗돈 부어서 동창들과 여행가고. 여행 떠나는 아내가 한 솥 그득 고아놓은 곰탕이 늙은 남편에게 공포심을 안겨준다는 우스개 소리는 우리나라의 부부생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젊은 시절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자신들의 고유 활동 영역이 ‘밖’과 ‘안’으로 고착되어버린 것의 필연적인 귀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부가 늘 따로 놀았으니 나이 들어서도 함께 논다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말씀입니다.”



자녀교육 집착


“우리 사회의 이런 현상을 지적하는 것은, 이를 근거로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상태를 진단해보고자 함입니다. 아마도 지난 시대의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사회문화적 변화 속에서 남편들은 일벌레가 되지 않고서는 먹고 살기 힘들었고, 그런 남편들로부터 소외된 아내들만의 힘으로는 건전한 부부생활을 주축으로 삼는 가정을 꾸리기가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정생활이라는 것이 살벌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부과하는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해소시켜주고, 보듬어주고, 완화시켜주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정의 핵인 부부 관계가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에 기초해있지 못할 경우, 전업주부인 아내는 삶의 보람을 남편과의 관계가 아닌 자식과의 관계에서 추구하게 되는 것은 인류학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아내에게는 자식의 성공적인 양육이 최고의 삶의 목표가 돼버리는 것이죠. 이는 이미 일본에서는 오래 전에 대두된 현상으로, 일본의 경우, 자녀 교육에 헌신하는 엄마를 ‘교육엄마(敎育ママ)’로 부릅니다. 한국에서도 실제로 그러한 예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중고생인 아이가 시험 기간에 접어들면, 아이의 시험공부를 위해서 아버지는 집안에서 자신의 행동거지를 삼가야 할 요구를 받게 됩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 과거의 ‘가부장적’ 가장의 행세 따위를 하려드는 간 큰 아버지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이미 가정의 ‘장’은 어머니이고, 아버지는 교육비를 포함하여 돈이나 열심히 벌어다주면 되는 것이죠. 개중에는 자식의 교육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서 엄마와 아이가 외국으로 떠나버리고, 기러기 아빠는 홀로 남아 집을 지키며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는 경우 또한 다반사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상당히 보편화된, 자녀 교육을 지상목표로 삼는 가정의 모습은 과연 당연한 것이며,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일까요?

자녀 교육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가정생활에 있어서 자녀 교육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상식입니다. 엄마의 삶도 보람 있어야 하고, 아빠의 삶도 그러해야 하며, 자식의 성장도 건강해야 하고, 그리고 그들 모두가 모여서 함께 이루는 공동의 삶이 보람 있고 건강해야 합니다. 이런 뻔한 상식이 철저히 망각된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가정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자녀 교육은 가정생활 전체의 중요한 일부분으로써 여타 영역들과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지, 여타 영역들의 전적인 희생이라는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주장은, 첫째, 자녀 교육이 가족 구성원 전체의 삶에 대한 모든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둘째, 가족 모두의 관심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고, 그들의 욕망이 과도하게 투사되어 있는 교육이라는 것은 자녀에게 지나친 부담을 부과할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논리에 터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관심과 열망은 현명한 판단의 장애 요인이고, 그 폐단에 대해서는 이따가 상술하겠습니다.

요약하자면, 한국 가정의 자녀 교육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열정은 가정 그 자체의 견실치 못함에서 기인하고 있는 바 적지 않으며, 부실한 가정생활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성인들의 삶의 총체적 만족도를 저하시키는 요소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우리 사회의 많은 성인들이 ‘잘’ 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잘 살고 있는 분이 많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변에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저의 개인적 관찰이 물론 우리 사회의 대다수 성인이 잘 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는 주장을 지지해줄 수 있는 타당성을 지니지는 못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마주치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냐고. 아직까지 ‘그렇다’고 답한 사람의 수는 극히 적더군요. 이 사회의 소위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말이죠.”



내 자식은 나보다는 잘 살아야 돼


“이처럼 우리 사회에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적다고 본다면, 많은 부모들이 자식은 자신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다고 추론할 수가 있겠습니다.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당연히 칭송받아야 할 우리 사회의 - 아니, 실로 인류의 - 미덕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신의 경제적, 지성적, 정서적, 도덕적 등등의 수준을 자식이 뛰어넘어서 더욱 풍요롭고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자라나는 새싹들 개개인을 위해서나,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서나 바람직한 요소일 것입니다. 기성세대의 그러한 에너지는 후대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식 위하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이겠으나, 현재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품고 있는 자식 위하는 마음은 실제적으로 오도되고 있는 측면이 많이 엿보입니다. 흔히들 ‘오도된 교육열’이라고 전문가들이 칭하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바로 부모들 자신이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요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부모가 자신의 직업생활과 가정생활에서 이룰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하여 자긍심을 가지고 있고, 사랑하는 자식이 그러한 부모의 성취를 뛰어넘는 삶을 일구기를 바란다고 한다면, 이는 매우 긍정적인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부모가 자신이 인생에서 이룬 것들에 대하여 자긍심도 적고, 그보다는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이 많기 때문에, 자기 자식만은 부모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앞의 예에 비할 때 부정적인 욕구해소 측면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즉, 자기 세대의 부정적인 것을 해소, 또는 대리만족 해보려는 욕구를 자식들의 세대에 투사하고 있는 측면이 다분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내가 못 따먹은 탐스러운 열매를 사랑하는 내 자식들이 따먹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자신의 삶과 그 삶의 성과에 대해 만족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삶의 성취를 자식에게 소망하는 부모에 비하여,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만한 것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믿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열망은 이미 그 자체로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며, 자식의 삶의 전진을 위한 온전한 방향을 제시해주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후자의 부모는 스스로 잘 살아보지 못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잘 산다는 것이 뭔지를 잘 모릅니다. 잘 사는 것에 대한 선망만 품고 있는데, 선망이라는 것은 정확한 실체 파악과는 매우 거리가 많은 눈가리개입니다. 더욱이 그런 선망이 피해의식에서 초래된 일종의 한풀이에 대한 기도를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을 때, 잘 사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워지죠. 아니, 한풀이를 바라는 부모에게 있어서 ‘잘 사는 것의 진정한 의미’ 같은 것은 중요한 문제가 못 됩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감정에 터한 선망은 맹목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부모가 잘 사는 삶으로 이끌어주는 방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턱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많은 학부모들은 현 사회의 통념을 충실히 따라 무작위적으로 손에 쥐게 된 양육과 교육의 방법이 자식의 성공 - 잘 사는 것 - 을 위한 유일무이한 방법인 줄로 철저히 믿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이 사회에 만연된 방법이 그릇되었음을 지적하고 있을 때에도 말입니다.

돈도 써본 사람이 쓸 줄 알고, 산해진미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 법, 자신의 직업과 가정의 삶에서 만족하고 행복해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자식에게 행복한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과연 만족하고 행복한 삶, 잘 사는 삶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걸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 자식에게 그 방법을 제시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잘 산다는 것의 의미


“여러분은 잘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아십니까? 진실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잘 살도록 도와줄 수 있는 교육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건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입니다. 잘 산다는 건, 몸 건강하고, 마음 편하고, 주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좋아하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하며, 따라서 삶이 지겹거나, 허무하거나, 무의미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돈벌이 또한 잘 하는 것이겠죠. 이것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들 전부가 잘 살기 위해서 필요한 요건들이라는 것을 마치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자녀 교육을 대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것들 중에서 오직 ‘돈벌이’만이, 그리고 하나 더 붙이자면 사회적 인정이 잘 살기 위한 절대적 요건인 양 자식교육을 추진하고 있다 이 말씀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건강과, 마음의 평화와, 자신의 꿈과, 삶의 목적성을 희생하면서까지 오직 부와 명예에만 온 정신을 다 쏟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경우, 잘 살기 위해서 필수적인 나머지 요건들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잘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단순한 논리입니다. 이 단순한 논리의 지당함을 여기에서 역설하고자 함은, 그 지당함을 수시로 망각하는 증세가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고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라는 사회심리학자의 유명한 욕구계층이론이란 게 있죠. 인간이 삶에서 추구하는 바를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정리한 이론입니다. 그 이론은 쉽게 말하자면, ‘넌 밥만 먹고 사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이론입니다. (아, 물론 이 불만 섞인 질문은 밥 먹는 것만큼이나 절실한 또 다른 본능적 욕구도 해소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세간에서 통용되고는 있지만요.) 이 이론은 본능적, 동물적 욕구 말고도 인간에게 중요한 정신적 욕구들이 많으며, 그 정신적 욕구들을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사회적 소속감과 연대감, 자아존중감, 자기실현, 심지어 자기 초월과 같은 정신적 욕구를 채워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행복할 수가 없는 존재가 우리들 인간이니까요.

학부모님 여러분, 우리 기성세대들이야 이제 인생 황혼 길로 향하고 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말이죠, 우리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식들은 이 귀중한 인생 속에서 이왕이면 한 번 아주 잘 살다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밥만 먹고 산다고 잘 사는 건 아니죠. 사회적 소속감, 사회적 명예도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죠. 우리의 자식들은 자아실현이란 걸 해서 행복하게, 진짜로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의 수많은 학부모들은 매슬로우 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하위의 욕구들만을 충족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위 욕구들을 무시하고, 아니, 상위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싹을 아예 잘라가면서까지 말입니다. 물론, 두려워서 그렇겠죠. 사랑하는 소중한 내 자식이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고 사회에서 천대받는 하류인생이나 살까봐 두려워서 그렇겠죠. 하지만 부모들은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그 소중한 자식의 상위 욕구 추구 가능성을 사전에 압살해버리고 있다는 점을 철저하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밥 잘 먹고 존중받으며 살게 하려고 죽어라 공부시키는 것이 어찌 해서 고차원적 욕구를 충족시킬 가능성의 싹을 짓밟는 것이라고 주장하느냐구요?”



입시경쟁의 댓가


“우리의 교육이 대학입시에서의 성공을 겨냥한 치열한 경쟁 속의 조련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는, 입시에서의 고득점을 목표로 삼는 조련이 대다수 학습자의 경우, 진정한 ‘실력’을 키워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학습능력에 입힐 소지 또한 크다고 믿습니다. 자,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교육적 위험의 도가니 속에 갇혀있는지 제가 한 번 읊어볼까요?

요즘은 아이가 걸음마도 떼기 전부터 ‘교육’이 시작되는 것 같더군요. 아동정신의학자들은 조기교육 광풍에서 드러나는 검증도 되지 않은 ‘영재학습’ 등등의 방법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에게 영어 학습을 강요하는 신풍속도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입니다. 극소수의 이른바 ‘언어 영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모국어를 ‘마스터’함으로써 비로소 언어의 구조에 대한 인지적 파악을 마치고, 따라서 모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외국어 또한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마스터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에게 틈만 나면 영어 단어를 물어보고, 영어 유치원을 보내는 학부모들의 수는 너무도 많아서, 이제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한국말로 가르치는 유치원에 보내는 부모들이 제 자식을 홀대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지경이 돼버렸습니다. 또 많은 부모들이 한글과 영어의 문자 학습을 너무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강요합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각 연령대에 적합하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에 대해 배웁니다. 어른이 문자로 밖에 세상을 인식하지 못한다 해서,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들을 문자라는 틀 안에 일찍 가둬버리면 그 애들은 자신의 연령대에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하고도 풍성한 방식의 비문자적인 인식과정을 놓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냥 세상을, 자연을, 주변 환경을 보고, 듣고, 만지고, 빨아보고, 킁킁대도록 내버려 두어야 인간 고유의 방식으로 학습하는 기초를 닦게 됩니다. 글자는 학교 가서 배워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학원을 전전하며 ‘선행학습’이라는 굴레를 쓰게 되더군요. 결국 학교 선생님들조차 모든 아이들이 미리 학원에서 교과내용을 다 배워온 것으로 간주하여 교실에서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선행학습이란 게 장기적으로 아이들의 학교 공부 의욕을 꺾고, 나아가서 배움 그 자체에 대한 태도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국내의 주요 연구들이 수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일 것입니다 - 배움 그 자체를 멀리하게 만든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아요, 시험 성적만 높게 나오는 한은 말이죠. 점수가 높아서 서울대만 간다면 배움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은 있거나 말거나 중요한 게 아닌 것이죠. 헌데 시험 성적이 진짜 ‘실력’일까요? 교육학적으로 말씀드려서, 최상의 시험이 진짜 실력을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시험은 그저 학생의 시험문제 맞추는 능력을 측정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험 문제 맞추는 능력과 진짜 실력은 다릅니다. 시험 문제 맞추는 능력은 시험 문제 맞추는 집중 훈련에 의해서 강화될 수 있는데, 이 시험 문제 맞추는 집중 훈련이란 것은 진짜 실력에 아무런 도움을 못 주고, 때로는 진짜 실력을 약화시키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실력이란 학습 내용에 대한 깊은 관심과 흥미에 터해 있어서 정형화된 기존의 정답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죠.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학원과 과외 등을 통해서 아이들을 ‘잡는’ 아이 장악 교육은 의존형, 출세지향적 인간을 양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아이를 풀어주는 교육이 자아실현을 지향하는 독립적 정신을 가진 인간을 양성할 가능성이 높고요. 이치는 간단합니다. 아이들은 자율적인 행동 속에서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자기정체성을 확립해 가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강점들마저 아는 인간으로 성숙하게 되지만, 부모가 꽉 잡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할 때 그 아이는 스스로 제대로 성숙할 기회를 잃게 되고 말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은 항상 아이에게 학습적으로 무언가 해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가 잠시도 멍청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을 틈을 주지 못하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인위적으로라도 두뇌를 계발해주려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이 또한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부모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일주일 내내 정규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그 외에 7~8개, 아니 그 이상의 과외 학습 활동을 한다면, 그 뇌의 느낌이 어떨 것 같습니까? 부모는 그렇게 해서 그 많은 것들을 다 학습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도 못하는 걸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강요할 수 있지요?

아이들은 항상 학습만 하고 있어야 하는 학습기계가 아닙니다. 아이들도 제 시간이 필요합니다. 멍청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게 인간이기 때문이죠. 어른들은 안 그렇습니까? 텔레비전 리모콘이나 만지작거리며 빈둥거리는 일 없습니까? 그런 빈둥거림이 삶에서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대한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면 모를까, 초등학생, 중학생들에게는 당연히 아무 학습도 안하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그 시간을 통해 스스로 뭔가를 시도할 수 있고, 자신을 알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죠. ‘스스로’가 중요합니다! 스스로 해야 진짜 자기 것이 되고, 스스로 얻은 자기 것이야 말로 진짜 ‘실력’이니까요. 부모가 항상 모니터링하고 있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성장시킬 필수적인 기회를 사전에 차단당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출세지향적인 것이 굳이 무슨 문제가 될까 의문을 품으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왕이면 출세하는 게 좋을 텐데 말이죠. 그런데 자아실현의 부산물로 출세라는 상이 주어지는 것과 오로지 출세만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진정한 실력을 갖춘 성공인의 케이스인데 반해, 후자는 타인들의 표면적 인정에 목을 매고 사는 허영의 껍데기 인생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죠. 또는 허영 때문이 아니라 돈과 명예라는 안전한 생존보장 장치의 획득을 위해 출세지향적인 삶을 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저는 개인적으로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출세가 과연 안전을 보장해줄까요? 반대로 출세와 무관하게 묵묵히 자아실현의 길을 가는 것은 위험한 것일까요? 저는 출세하고도 위험을 겪는 이들도 굉장히 많이 봤고, 출세에는 등 돌리고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면서도 안전하고도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이들도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명문대 졸업해서 일류기업 임원까지 했지만 명예퇴직 당한 뒤에 투자한 돈 다 날리고 가정까지 해체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학벌도 재산도 없지만 소시적부터 장인적 자세로 자신의 일에 전념하며 살아온 끝에 결국에는 사회적 인정과 존경도 받고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사는 이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출세지향이 위험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자아실현 지향이 안전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던 간에 인생의 위험을 사전에 완전히 예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위험을 제거하려는 헛된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식들의 미래의 위험을 제거해주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그런 위험에 직면했을 때 현명하게 대응하고 극복해낼 수 있는 역량을 키우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믿습니다. 표면적 인정을 추구하는 출세지향적 삶의 경우보다, 자아실현 지향적 삶의 경우에 그 역량이 더 탄탄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족입니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자식 교육시키며 추구하는 S.K.Y., 그리고 그 명문대를 나온 뒤에 되기를 바라는 법관, 의사, 전문인, 뭐 이런 직종에 근무하는 소위 엘리트 대부분이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며 살고 있을지, 저는 회의합니다. 엘리트 계층에 진입하는 것은 확실히 에고에 만족감을 주겠죠. 허욕을 만족시켜준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허욕’에 불과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엘리트들의 삶 그 자체도 결코 편하고, 쉽고, 행복한 삶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의사가 되고 나서 스트레스 받고, 재정적, 전문적, 인간적 번민에 시달리는 편이 빈곤한 노동자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바로 그런 생각이 틀에 박힌 시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엘리트 아니면 실패한 삶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은 지나치게 경직돼있다는 말씀입니다. 굳이 엘리트가 되지 않더라도 비엘리트적인 직종에 종사하면서도 충분히 자아실현 추구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길들이 세상에는 널려 있거늘, 국민 대다수가 S.K.Y.와 엘리트에만 집착하느라 그 길들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도 안 해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사회를 위해 큰 공헌을 하고 자아실현을 성취하는 훌륭한 엘리트가 되겠다는 청년을 말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만, 억지로 자신에게 적합하지도 않은 엘리트가 돼서 스트레스 받으며 불행하게 사는 편 보다는 사회적으로 소박한 일을 하더라도 - 그래서 허욕은 채워주지 못할지라도 -, 만족하고 보람을 느끼며 사는 편이 낫지는 않을까요? 물론 그렇게 허욕을 떨어낼 수 있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한 인식의 큰 전환이 전제돼야 하기는 하지만요.

엘리트 만들기 교육의 일환으로 어린 나이에 ‘조기유학’을 보내서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와 고향과 떨어져서 살도록 강요하는 부모들의 수도 대단히 많습니다. 이 현상 역시 대단히 우려스럽습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 속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하는 아이들로서는 표현도 못한 채 내상(內傷)을 입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급격한 환경 변화가 사실 얼마나 큰 스트레스 요인인지 어른들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 변화를 탄탄한 가정이 곁에서 지원해주고 적응에 도움을 줘야 할 텐데, 조기유학의 경우 부모와 가정 전체가 함께 외국으로 이주해서 생활하는 경우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해체된 반쪽짜리 가정으로서는 그 같은 변화에 아이가 적응할 수 있도록 적절한 힘을 주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그토록 동경하는 하버드법대를 졸업한 뒤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교육활동에 투신한 한 젊은 리더(leader)의 말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2) 그는, 누가 자신에게 하버드와 아버지 둘 중에서 한 가지만 택하라고 한다면 아버지를 택할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의 삶에서 최고의 학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인성의 원천인 아버지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참 훌륭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버지를 당연히 버려서 기러기로 만들어버리고, ‘하버드’를 좇아 미국으로 떠나버리는 엄마와 아이들의 수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성장 과정 속에서 아버지를 잃고, 가족애의 경험이 반감된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행복할까요? 하버드가 과연 행복을 약속할까요?

그리고 일류학벌을 고집하는 부모의 과욕이 때로는 아이의 개성에 반하는 파괴적인 욕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나 한국 아동의 정신의학적 상담 케이스들 중에는 부모의 과욕에 억눌려 희생양이 돼버린 아동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합니다. 아이의 적성이나 개성과는 무관하게 오직 부모가 바라는 바만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태로운 모험입니다. 물론 아이가 엘리트 지향적 적합성을 갖고 있고 충분히 자발적으로 동기부여도 돼있는 경우, 또는 그럴 잠재성이 많은 경우, 아이에게 일류대 진학을 종용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 엘리트 진입에 성공해서 자신과 사회에 다 보탬을 주는 전문가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최대의 성공이란, 아이가 불만에 차서 싫어하는 일을 하고 사는 엘리트가 되는 경우이겠죠. 성공적이지 못할 경우에는 내적으로 심각한 좌절감과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비엘리트가 될 것이구요.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자신의 개성과 적성에 적합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세상을 주름잡는 거부로 키워줬지만, 다른 제자는 안빈낙도하는 가난한 선비로 키워줬습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만의 길이 있다는 것을 공자가 알았기 때문이었겠죠. 자신만의 길은 자신의 개성과 적성과 재능에 부합하는 길입니다. 자신의 개성과 적성과 재능에 부합하는 길을 가며 살 때,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공자와 같은 위대한 스승의 역할이었구요. 부모가 바라는 길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은 공자와는 정반대의 행동으로, 부모의 욕망의 투사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길이 아닌 부모의 길을 강요당한 아이가 행복한 성인으로 자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성현들은 아이들 각각에게 자기 나름의 독특한 성장 프로그램이 있다는 점을 갈파했습니다. 교육은 그 프로그램을 북돋워줘야지, 그 프로그램을 억누르고 방해해서는 안 되겠죠.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성장 프로그램을 도와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방해하고 있을까요? 후자일 경우 우리가 제공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써비스는 교육이 아니라, 실로 반(反)교육이 되죠. 존 듀이가 ‘mis-education'이라고 지적했듯이요.

저도 이 같은 아이들 각각에게 내재돼있는 고유하고도 독특한 성장 프로그램을 젊을 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 딸이 갓난아기였을 때 주치의였던 소아과 의사분이 그것을 깨닫게 해주셨었죠. 하루는 제 딸의 신체발육 정도가 정상 분포도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근심 섞인 질문을 그분께 했더랬습니다. 제 눈동자를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시던 그 연로한 의사는 제게 이렇게 말씀해주시더군요: ‘내가 사십 년 넘게 아이들을 보고 공부해왔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들 한 명, 한 명마다 자기만의 독특한 성장 곡선이 내재돼 있다는 사실이랍니다. 따라서 당신의 아이도 잘 먹이고 사랑해주는 한, 제가 알아서 스스로 잘 자라날 것입니다. 부모가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저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깨우친 바가 있었습니다. 아! 내 딸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부모로서 방해하지나 말아야 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지요. 제가 만약에 제 딸의 고유한 성장 곡선을 무시하고 어떤 정형의 틀에 맞춰 그 아이의 성장을 조정하고자 했다면, 늘 어떤 스탠더드에 맞도록 억지로 키워주려 했다면, 그건 어리석은 과욕이었겠죠. 이는 육체적 발육에만 해당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아동의 심신 전체의 성장에도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아이들 각각은 자신에게 적합한 독특한 심신의 발달 곡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곡선을 죄다 한 방향, S.K.Y.를 겨냥한 한 방향으로만 억지로 모으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아이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고유한 성장 곡선은 왜곡되고 뒤틀립니다. 아이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최상의 삶을 살아볼 기회를 빼앗겨버리는 셈입니다.



잘 살기 위해 터득해야 할 능력들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명문대 졸업장이나 엘리트 지위 이외에도 다른 조건들도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면, 저는 시험 잘 보는 능력 이외에 여러 가지의 다른 능력들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싶습니다. 과거에는 I.Q.만 높으면 된다고 여겼지만 요즘에는 E.Q.니 S.Q.니 하는 것들도 함께 높아야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주장이 많이 퍼져있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극히 상식적으로 볼 때, 우리의 아이들이 시험 보는 능력만 높아서는 진짜로 잘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험도 잘 보면 좋겠지만, 실질적인 진짜 실력도 튼튼해야 하겠습니다. 진짜 실력이란 아이가 진정으로 관심과 애정을 품게 되는 어떤 일이나 사물, 대상에 대해 탐구할 때에 최고 수준으로 쌓이게 됩니다. 간단한 예로, 수학에 특별한 흥미는 없어도, 엄청나게 많은 수학 문제집들을 풀어보고 고가의 족집게 과외까지 받은 학생이 수능시험의 수리 영역의 문제의 정답을 백퍼센트 맞추었다 해서, 수학에 커다란 흥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수학 문제들에 대해 끝없이 생각해보고 탐구해서 여러 가지의 엉뚱한 오답을 산출해낸 학생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말씀입니다. 장기적으로 수학의 진짜 실력은 후자의 학생이 훨씬 뛰어나게 되겠죠. 따라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실제 직업 환경에서 진정한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한 목표만 갖고 공부하는 것보다는, 성적은 좀 떨어지더라도 진정으로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일찌감치 개발하는 것이 현명하겠습니다. 그 분야가 무엇이 될지는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발견하도록 부모가 도와줘야 하겠구요.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이 부분이 대단히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만약에 아이의 관심 분야가 부모가 선망하는 엘리트 직종과는 전혀 무관한 쪽이라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를 들어, 부모는 법관이나 학자를 선호하는데 아이는 손재주를 쓰는 기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면? 부모는 의사나 경영인을 선호하는데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만 좋아한다면? 글세요, 저는 부모의 선호와는 상관없이 무엇 하나라도 아이가 큰 관심을 갖는 분야가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왜냐하면 요새 한국에는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말이죠. 어떤 분야건 깊이 몰두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조짐입니다. 그 분야에 몰입함으로써 몰입과 배움의 기술을 터득해낼 수 있고, 그런 기술은 쉽사리 타분야로도 전이 가능하니까요. 그럼에도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선망하는 직종과 관련 있는 분야 쪽으로 아이들을 몰아가죠. 그것이 아이에게 맞는 길이 아닐 경우에 아이의 본질적 성장이 와해됨에도 불구하고 말이예요.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의 고유한 성장을 돕고, 그 아이에게 가장 적합한 길을 찾아가서 자아실현을 달성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는 부모의 시각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시각의 변화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 없이는 한국 교육의 변화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학부모의 인생관


교육에 대한 시각의 변화는 비단 학부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학생들 자신도, 또 교육자들도 이 변화를 숙고해봐야 할 것입니다. 교육에 대한 시각의 변화란 실은, 학부모의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보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구하는 일은 대체 ‘왜 사느냐’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왜 사느냐? 전들 그 답을 알겠습니까마는,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접근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저는 고생을 회피하기 위해서 살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저는 아무런 상처도 안 받고,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고, 아무런 문제도 없고, 아무런 좌절도 경험하지 않은 채로 지극히 안전하게 숨쉬다 죽기 위해서 살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 딸의 성장과 교육을 도와줌에 있어서 저는 아이가 커서 고생 안할 길로, 편하게 안전하게 살 길로만 몰아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고생도 좀 하고, 불편함과 위태로움을 무릅쓰면서도 자신의 길을 개척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적으로 볼 때 어차피 미래의 고생과 스트레스와 위험을 지금 효과적으로 예방할 도리는 없겠구요. 자신의 길을 추구하는 제 딸이 미래에 맞게 될 부정적인 상황들을 의연하고도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역량은 부모가 시시콜콜 다 지도해주는 양육 방식으로는 성취 불가능하죠.

소크라테스는 평탄한 삶은 인간에게 적합한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생을 안 하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좌절 없고, 스트레스 없고, 아무 문제도 없는 상태가 행복이 결코 아닙니다. 실패와 좌절과 고생은 오히려 사람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아이들도 어려움과 아픔과 슬픔을 겪으며 자라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못 겪어보고 자라난 아이들이 진짜로 문제아들이죠. 사람이 고생을 겪고, 고난을 극복하며 성숙해가는 것, 그러한 것이 바로 인간에게 적합한 삶이 아닐까요? 어차피 안전하려고 고치 안에 틀어박혀 살려 해도 그러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일진대,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안전을 책임지고 용감하게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삶의 기회를 마음껏 활용하고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쪽이 더 합리적이지는 않을까요? 인생을 웅크리고 회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용감하게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능해질 때, 소중한 자식의 교육에 대한 시각도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재차 밝힙니다만, 이는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

만약에 ‘왜 사느냐’는 질문에 대해 안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나는 모험을 하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소중한 자식의 인생 모험을 도와주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써 교육을 바라보는 것 역시 가능할 것입니다. 그럴 때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기다림과 여유와 느림의 미덕을 깨달을 수 있겠죠. 아이가 진정으로 자신을 바치고 싶은 일을 찾기를 바란다면, 그 일을 부모가 찾아다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찾는 길을 옆에서 지도편달해줄 수는 있겠지만요. 이때 부모는 과잉보호와 과잉지도를 지양해야만 합니다. 학창시절의 실패는 자기성찰을 위한 귀중한 교육 기회입니다. 부모가 매사에 개입해서 아이를 감싸고 보호만 해준다면 그런 귀한 교육 기회를 날려버리는 셈입니다. 동시에 아이에게 학교 공부만 강요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아이는 기존 학문 분야들을 본 따서 만든 정규 교육의 방식 이외에도, 색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실험해볼 기회를 부여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취미생활도 여러 가지 해보고, 또래 아이들과 열심히 놀기도 해봐야 합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부모가 이루 다 제공해줄 수 없는 다양한 유형의 체험을 해볼 기회를 아이들이 얻게 됩니다. 또한 부수적인 효과이기는 하지만, 만만치 않은 힘이 드는 취미활동은 그 자체로 심신을 단련시켜주고, 스트레스를 치유해주며, 삶의 내용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도록 도와준다면, 그 아이가 흥미를 보이는 분야들에 대한 성인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전에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모든 아이들이 학교 커리큘럼식의 공부에 적합한 종류의 지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되겠습니다. 이 말씀은 학교 공부 이외의 다른 공부에 적합한 지능들이 있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I.Q. 말고도, 시험 고득점 지능 말고도, 수리적 지능과 언어습득 지능 이외에도,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음악적 지능, 신체-운동의 지능, 공간적 지능, 대인관계 지능, 자기이해 지능, 자연탐구 지능 등의 다중지능이 내재돼있다고 미국의 하워드 가드너가 밝혔습니다. 그밖에도 영성의 지능, 도덕적 감수성, 성적(性的)인 관심, 유머, 직관, 창의성, 요리능력, 후각능력 등등의 여타 지능들도 학계에서 제기돼왔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지능들 중에서 각기 다른 조합의 몇몇 지능들이 개인마다 다른 방식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즉, 한 사람이 이 모든 지능들에 있어서 다 뛰어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아이가 특히 뛰어남을 보이는 지능의 영역을 발굴해내는 것이 매우 건설적인 시작일 것입니다. 이들 다중지능은 거의 유전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자신이 높은 수준을 보이는 지능의 영역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영역과 관련된 지식과 직업의 분야들을 찾아내서 그 쪽으로 진출하는 편이 개인에게 매우 적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그 분야가 부모가 동의하고 인정하는 분야가 아닐 경우, 많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지요. 이 같은 선천적 지능의 거부가 미국과 서구 사회라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경우가 훨씬 더 빈번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아주 많은 한국의 청소년들이 자신에게 선천적으로 적합한 커리어 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특히 자식에게 부모가 과중한 기대를 품고, 자식을 어느 한 분야, 그중에서도 예․체능계의 스타로 키움으로써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인생에 대한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이른바 ‘디바 신드롬’에서 잘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한데요, 아이의 스타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 밖의 재능들은 무시하게 됨으로써 아이의 온전한 전인적 성장이 지체되는 경우 또한 드물지 않습니다.

아이의 고유한 지능을 찾아내고, 그것을 계발해주기 위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다양한 경험과 충분한 자유시간, 놀이 기회 등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간접 경험으로 독서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지능을 찾아냄에 있어서, 기호와 재능이 공존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아이가 좋아한다고 해서 꼭 그 분야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아이가 재능을 보이는 분야를 꼭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잘 하는 분야를 좋아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지도해주는 것은 부모와 교육자의 몫이겠습니다. 이 지도가 성공적이어서 아이가 그 분야에 흥미와 열정을 품게 된다면, 그 분야에서 자라나며 겪게 될 장애물과 한계 등을 스스로 극복할 잠재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일류대 졸업장보다도 한 가지 분야에 대한 깊은 천착이 장기적으로 성공을 가져다준다고 믿을 수 있다면 - 많은 한국인들이 믿지 못하지만 -, 아이로 하여금 그 분야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도록 내적인 욕구를 북돋워주고 동기부여 해줘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아동발달 전문의인 멜 레빈은 최초의 관심, 오랜 노력, 그리고 완수를 성취의 3단계라고 정의했습니다. 바로 이 ‘오랜 노력’의 단계를 학교의 극기수련과 같은 과정이 아니라 자발적인 열정과 흥미로써 이끌어가는 편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이 오랜 노력의 기간동안 아이는 어떤 학습 분야에도 통용될 수 있는 인식의 도구들을 계발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수리능력이 됐든, 암기·숙지능력이 됐든, 분석·종합능력이 됐든, 그 능력을 스스로 터득했을 때 그것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3) 이런 과정을 거치며 아이가 몰입과 집중을 통한 성취를 체험해보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이 또한 부모와 교사의 몫이 되겠습니다. 결국 한 분야에 정통하게 되는 것은 그 분야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타 분야에서의 새로운 시도를 위한 탄탄한 준비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노파심에 잔소리 하나 덧붙이자면, 아동기의 기호는 지극히 가변적인 것이어서 쾌락추구 원칙에 충실하고, 대중문화라든가 또래의 추종문화 등에 의해 쉽게 자극받고, 늘 새롭고 흥미로운 것만 추구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따라서 아이가 어떤 분야에 대해 흥미를 표명했다고 해서 성급하게 그 분야의 심화 학습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평소의 삶에 대한 욕구불만 정도 등도 세심히 살펴서 신중한 태도로 아이의 관심 분야를 탐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례로 거의 모든 십대 아이들은 대중음악에 빠져 있습니다만, 그렇다 해서 그들 모두가 음악적 지능이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그 연령대가 음악적 자극에 민감할 시기일 뿐인 것이지요.



마음교육 - 성직의 매혹


지금까지 ‘능력’이라는 것을 주로 학습능력, 즉 두뇌의 차원을 중심으로 제가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뇌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두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긍정적이어야 무언가를 배우는 일도 훨씬 효과적으로 진행되겠죠. 사실 마음과 배움이 떨어져 있는 것일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본질적이고 외재적 보상에 치중하는 시험공부 위주의 학습에만 매달려온 나머지, 아이들의 마음은 홀대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마음이 건강치 못하고, 평화롭지 못하고, 부정적이 돼버렸다면, 이는 학습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우리는 아이들의 마음을 잘 돌봐줘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건강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종교적 가르침에 귀 기울여 왔습니다. 저도 그러한 전통을 수긍합니다만, 특정 종교의 종파적 방식을 따르기보다는 당대에 축적된 비종파적 방식을 엿볼까요?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래로 서구의 정신심리학은 무의식의 영역에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삶에서 무의식을 어떻게 잘 다루느냐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을 일찍이 인식한 교육자가 영국의 써머힐 학교의 니일인데요, 그의 사상을 계승해서 학교를 설립해 성공적으로 운영해온 사람이 일본의 호리 신이치로이고, 그의 학교의 이름은 키노쿠니라고 합니다. 호리 선생이 자신의 학교의 주 목적으로 천명하는 것은 지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사회로부터 자유로우며,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로 키워내는 것입니다. 지식과 사회로부터 자유롭다 함은 자신 스스로 세상을 이해해가며, 통념에 휩쓸리지 않는 주체적인 사회인이 된다는 말이겠죠. 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 함은 무의식의 횡포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잘 알고 잘 다스리는,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겠습니다.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문제가 발생하여도 그것을 인정하고, 스트레스를 부정하지 아니하며, 주어진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생에서 문제 자체를 아예 축출한다는 건 불가능하므로 문제에 대응하는 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죠.) 또한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는 힘을 배양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넓은 시각을 향유하며 낙관적인 태도로 자신과 우주에 대한 믿음을 키울 수 있게 됩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적으로 파악하기가 지극히 힘든 마음의 그늘진 어둠 속인데, 자신의 마음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이는 무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의 고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한 이는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용이해지지요. 고요한 마음으로 자신의 배움의 과정에 임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학습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
이 같은 오형모의 견해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미국 사회과학계의 ‘합리적 행위자 이론(the rational actor theory)’의 기본적 시각에 입각해 있다고 할 수 있다.

2) 현재 광운대 교수로 재직중인 조슈아 박을 가리킴.

3) 11~20세까지의 성장기간의 두뇌발달에 관해 레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시기 동안 인간의 두뇌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두뇌의 기능과 구조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변화는 도구 갖추기에 가장 알맞은 성장 기회들을 제공해 준다. 세 가지 변화가 특히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뇌 표면에서의 백질의 확장, 사용하지 않는 신경세포 및 시냅스의 가지치기, 그리고 전두엽의 발달이 그것이다. [중략] 최근에 신경과학자들은 정교한 뇌 영상 기술을 이용해 11~20세 사이에 회백질이 주를 이루던 뇌 표면이 백질이 주를 이루는 쪽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시기 동안 수초(髓焦, myelin)라고 부르는 하얗고 미끈미끈한 물질이 마치 구리선을 감싸는 고무 외피처럼 수많은 신경세포 돌기들을 감싸게 된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렇게 수초에 의해 감싸진 신경세포가 자주 사용되는 세포들이다. 이렇게 해서 자주 사용되는 신경세포는 반영구적인 뇌의 기어로 자리 잡는다. 시골의 흙먼지 길 가운에 하나를 선택해서 포장한다고 생각해 보라. 당연히 가장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뇌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자주 이용되는 경로가 수초로 포장된다. 한편 가지치기 작업도 동시에 진행된다. 사용빈도가 높지 않은 세포들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자주 이용되는 경로의 효율성을 높인다. 이 두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엄청나다. 11~20세 사이에 우리는 아이들이 평생을 두고 사용할 좋은 두뇌 습관, 기술, 도구들을 개발해주고 또 자주 사용하게 해야 한다. 만약 이 시기에 아이들이 중요한 도구들을 쳐박아 두고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가지치기 당하여 제거되고 만다. 이 중요한 시기를 헛되이 낭비하게 되면 나쁜 패턴이 자리 잡게 된다.”; 멜 레빈 著, 이희건 譯, 『내 아이의 스무 살, 학교는 준비해 주지 않는다』 (도서출판 소소, 2005), pp. 25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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