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욕

색욕(色慾) (2003/4/19)

<Confession, or a Progress Report>

얼마 전에 읽은 어떤 책에는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도의 요부에게 유혹당해 비참한 꼴을 보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 정설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인도 여인의 성적인 노예가 되어 모든 기품을 다 상실한 채 헐떡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질색을 하자, 노철학자는 제자 대왕에게 경고를 했답니다: 나 같은 노인네도 이 꼴을 만들 정도의 미색이니 젊고 혈기 왕성한 대왕이 이 여인에게 빠지면 어떻게 되겠냐고.

참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남자는 미색(美色) 앞에서 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언 플레밍이 - 아니,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가 - 현대인의 이성적 능력과 폭력성을 최고 수준으로 결합하여 빚어낸 무적의 007 제임스 본드에게도 단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미색이었습니다. 일상의 신앙수행을 내 삶의 길로 결정한 내가 이러한 나의 남성性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모른 체하고 살기에는 너무도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의 '자유'라는 화두에 쎅스를 포함시켰고, 그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이룬 저의 진전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저는 '진전'이 일직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간디가 말했죠: "나는 길을 압니다. 그 길은 곧고 좁습니다. 그 길은 마치 칼의 날과도 같습니다. 나는 그 칼날 위를 기쁜 마음으로 걷습니다. 거기에서 미끄러질 때면 나는 웁니다." 진전을 이루다 미끄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간디처럼 신의 약속을 믿고 다시 일어나 갈 뿐입니다.)

다음은 디즈니 버젼의 '노트르담의 꼽추'에 등장하는 사악한 주교가 집시 미녀 에스메랄다에게 품었던 뒤틀린 음심 - 성직자의 마음에서 나왔기에 더욱더 그로테스크하게 뒤틀린 - 을 연상시키는 글로, 남자의 이런 허약함을 극단적이긴 하나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것을 눈치 챈 적이 있나요?: 수 많은 디즈니 만화 중에서 기독교적 문화 유산을 다루고 있는 작품은 단 한 편도 없고, '이교도'의 종교적 유산에 등장하는 설화는 많이 다루어지고 있으며, 어쩌다 만화 속에 기독교 관련 내용이 등장하는 노트르담의 꼽추 같은 경우에도 기독교 사제가 사악하고 비뚤어진 인간으로 등장한다는 사실; 이것도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집단과 디즈니 사이의 관계가 매우 나쁜 이유 중의 하나일런지도...)

[카톨릭 사제들의 정예 조직인 예수회의 강직한 총장인 로댕이라는 자가 한 미녀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는 장면.]
로댕은 헐떡거린다. 권력에의 의지에 사로잡혀 오래 금욕해 온 그에게 욕정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악마의 눈 만큼이나 검은 눈, 부드럽고 탐스러운 어깨, 향내 나는 머리카락, 희고 부드러운 살갗.... 아름다우면서도 후안무치한 이 여왕 앞에서 로댕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애무,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열락의 가능성을 꿈꾼다. 그의 육신은, 수면에 비친 발가벗은 요정을 내려다보는 목양신(牧羊神)의 육신처럼 욕정의 불길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불길이 어떤 불길이던가? 일찍이 나르시서스를 태운 불길이 아니던가. 달빛 아래로, 메두사의 눈빛에 석화(石化)하듯이 굳어져 가는 로댕을 본다. 사양길에 접어들도록 억제되어 있던 사나이의 욕망에 온몸이 굳어진 로댕을 본다. 억누를 길 없는 욕정이 그의 몸을 태운다. 흡사 과녁을 겨냥하는 화살, 부러지기 직전까지 당겨진 활 같다.

로댕은 바닥으로 무너지면서 이 허깨비 앞에 무릎을 꿇고는, 한 방울 향유를 구걸하듯이 두 손을 벌린다. "아,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고?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벌릴 때마다 하얗게 빛나는 가지런한 그 암여우의 이빨 하며.... 빛을 뿜는가 하면 거두고 거두는가 하면 또 뿜는, 그 큰 에메랄드 눈 하며.... 오, 욕정의 악마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대는 청바지에 가려진 엉덩이를 움직여, 사타구니로 이 늙은 얼뜨기에게 회전 당구공을 쳐보낸다. 로댕이 끔벅 죽는다.

"환영(幻影)이라도 좋소. 내것이 되어 주오. 질투하는 신을 섬기며 힘겹게 산 인생을 불쌍하게 여겨, 잠깐이라도 좋으니 쾌락의 왕관을 내 머리에 쓰게 해주오. 그대 미끄러운 한번의 포옹으로 나를 위로해 준다면, 그대가 나를 밀어 넣는 영원한 지옥 불도 두렵지 않고. 바라건대 그대의 입술이 내 얼굴을 지나게 하오. 나의 안티네아여, 나의 막달라 마리아여. 성자의 법열(法悅) 앞에서도 내가 욕망하여 마지 않던 그대여, 외식(外飾)으로 동정녀를 섬기면서도 탐내어 마지 않던 그대여. 오, 여인이여. 태양처럼 밝고, 달처럼 흰 여인이여. 그대 앞에서는 하느님도, 열성(列聖)도, 로마의 교황도 부정하겠소. 아니, 부정할 것이 또 있소. 로욜라[예수회 창시자]도, 내 인생을 이 교단에다 묶어 놓은 저 더러운 서원(誓願)도 내 부정하리다. 입맞춤, 단 한 번의 입만춤이면 되오. 연후에는 죽어도 좋소!"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번역, 푸코의 진자, 열린 책들, 2001, pp. 934-935)

작년에 수행일상에서 말한 바 있던, 황진이에게 유혹당한 도사의 이야기와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남자인 나는 의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예수회 총장이나(물론 가상이지만) 도사님도 거부하지 못한 미색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남자가(물론 나를 포함해서) 세상에 존재할까? - 동성애자와 해탈한 자 빼놓고. '수행'과 '구도'를 한답시고 삶을 바치고 있는 나의 이성적인 선택은, 그래서 '해탈' 쪽일 수밖에 없는가? 그런데 그 놈의 해탈이란 건 과연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기나 한 건가? ... 이 문제를 당장 해결을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정리하거나 발전적으로 진전시키지 않고서는 나의 '수행'이나 '구도'가 사상누각일 수 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현자의 조언을 들어봅니다.

신이 그대에게 성욕을 주었다면 그것은 성욕을 통해 배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의 창조적 에너지다. 그것을 억누르지 말라. 그것을 다듬어 가능한 한 순수하게 하라.

왜냐하면 삶에서 많은 것을 창조해내는 것은 그대의 성적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의 성욕을 받아들이고, 성욕이 신의 선물이므로 거기에는 발견되어야 할 무엇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서, 신을 향한 깊은 사랑과 감사로 그것을 포용한다면, 그것은 거부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탐욕을 부린다거나,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지 말라.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인생에는 더 많은 것이 무수하게 존재한다. 섹스는 다만 기초일 뿐이며 전체가 아니다.…

다만 그대의 성적인 순간들을 순수한 기쁨과 행복과 평화로움으로 삼도록 하라. 섹스는 기쁨이며 슬픔이고 황홀경이면서도 고뇌이기도 하다. 그대는 이 역설을 이해하여야 한다. 잠시 동안 그대는 다른 사람 속으로 녹아들며 그러한 순간에는 에고(EGO)도 없다. 그리하여 커다란 기쁨이, 오르가즘의 기쁨이 있다.…

오쇼 라즈니쉬는 성적 억압이 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성에 강박되도록 만들었으며, 심한 경우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섹스는 고대인도 전통에 따르면 강력한 생명력이자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는 억압되거나 반대로 낭비되는 대신 올바른 통로를 열어주면 깨달음과 사랑으로 성화(聖化)될 수 있다고 한다.

('깊은 참회' 싸이트에서 퍼옴.)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색욕 그 자체라기 보다는 색욕을 내가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3중의 딜레마인 다음의 논제와 씨름한 적이 있습니다.

(1) 이성(異性)을 못 느낀다면 그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백기완 선생의 이와 같은 토로에 동감하며).
(2) 살아 있으면 당연히 느끼는 이성에 대한 끌림을 초월한 척 하는 것은 위선이다.
(3) 그렇다고, 이성에게 끌린다 하여 끌리는 대로 몸을 내던지는 것은 개(dog; 멍멍이)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 3중 딜레마를 해결할 비책을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일단 각개격파를 해봤습니다.

(1) 이성에 대한 매력을 느끼며 살아라(산 송장이 될 수는 없으니까).
(2)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 자체를 부정하지 말고 그 마음을 끌어 안아라(아니면 위선자가 되니까).
(3)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 딱 거기까지만 즐겨라('개'가 될 순 없으니까); 당당하게 즐겨라.

각각에 대한 응답은 그럴 듯 하다 하여도, 3중 딜레마 전체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의 문제는 그대로 있으니까. 그래서 이런 생각이 났지요: '사람은 이래서 '원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보다' 하는. 왜 칸트도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라는 원칙들을 제시하지 않았던가요? 특히 저 자신 젊은 시절부터 고수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을 목적으로 대해야만 하며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칸트의 정언 명령도 있고. 그러니까 저도 '색욕'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굳은 원칙을 세우고 이에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원칙을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불개입 감상'의 원칙이라고나 할까요...

웬지 떫떠름했습니다. '원칙'이라는 것이. 그런 것을 준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저는 마음에 들지가 않았습니다. 아직 저의 내면에서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이 안되고 있음이 명백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원칙에 의해 나 스스로를 속박하기에 앞서, 위의 3중 딜레마에 대하여 직관적으로 나온 각개 대응 방안이 해탈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합리적인 결론일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이는, '느껴서 받아들이고 즐기되 빠져서는 안된다'는 삶 전반에 대한 평소의 저의 결론 - '원칙'이 아니라 관찰의 결론 - 과 합치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런 결론의 배후에는 삶의 모든 것을 현상계의 가짜로 믿고, '참된 나'는 그 가짜 현상계를 만들어내고 조정하는 '플레이어'라는 존재론이 자리잡고 있지요.

4년 수행 끝에 나온 '색욕'에 대한 저의 중간 결론은 기껏해야 요 정도였습니다(다음의 표현에 여성에 대한 비하 의도 전혀 없음): 모든 꽃은 아름답다;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여 즐기되, 감상으로 끝낸다; 꽃과 '나'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요 정도의 결론을 저는 몇 주 동안 화두 삼아 숙고하였습니다. 그러던 하루, 마침내 - 그러나 참으로 자연스럽게도 - 제가 이 결론을 저의 내면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허락하자, 저의 평화가 전보다 한층 커졌습니다. 그리고 '색욕'이라는 측면에서, 사는 것이 훨씬 편하고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신께. 이것은 어떤 논리적인 해결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마음'이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자유롭게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참 나'의 차원에서 변화를 주동할 때만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위의 결론을 내면화하기로 '마음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무책임하게도 저에게는 그 신비를 설명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제가 온 마음을 다해서 색욕이라는 문제와 맞장을 뜨겠다고 결심을 했으며, 그에 따라 화두를 들고 살았다는 사실이지요; 전에는 사실 한 번도 그런 결심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조언: 화두를 절대 놓지 마시오!) 이런 점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과 스스로 만드는 원칙이라는 속박 사이의 긴장 관계 그 자체가 저의 수행 과정에서 주어졌던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언제나 이렇듯 저 편할대로 해석하고 속 편하게 살 뿐이지요. 일단, 이 결론대로 현실의 플레이어로 살아보자. 이보다 더 그럴 듯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삶의 매 순간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萬行.

몇년 전, 백화점에서 였던가, 매장의 의자에 아버지와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늘씬한 미인이 제 앞을 지나갔습니다. '와 이쁘다' 생각하며 저는 물끄러미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그때 옆의 느낌이 이상하여 아버지를 힐끔 봤더니, 아버지께서도 저만큼 열심히 그 여자를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삼십여년간 외도 따위 조금도 없는 소문난 애처가셨으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주위의 숱한 강압과 권고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거부하시고, 십여년 넘게 꿋꿋하게 홀로 노년을 보내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쭉빵 미녀를 저처럼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래, 이건 DNA야, 어떤 남자라도 다 갖고 있는 DNA! ..... 속 편히 생각해야지.

'수행일상 2003'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