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물 자연휴양림
 

셋째 날은 산에도 가보자는 제 주장이 아이들에게 먹혀들어, 숙소 주변의 절물 자연휴양림으로 먼저 향했습니다. 실은 이 휴양림 산막을 숙소로 잡을까 하다가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콘도가 쾌적할 듯하여 그리 하지는 않았지만, 울창한 삼나무 숲과 한라산 정상이 보이는 오름, 또 예쁜 연꽃이 가득 핀 연못 등을 품고 있어 들러볼 만한 곳이었습니다.

헌데, 이 절물에 유명한 도인이신 대각심 스님이라는 분이 기거하신다는 글을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조용헌 교수가 쓴 그 글을 읽고 호기심이 동했으나, 놀러온 숏팬츠 차림의 관광객 주제에 불쑥 그런 도인의 거처에 쳐들어가 도 닦는 법 좀 알려달라고 청하기도 몹시 쑥스러운 일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런 도사님의 지독하게 철저한 수행과 서릿발 같은 정신을 대면하기가 움찔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분의 암자 문 앞에까지 가서도 휘이 한 번 돌아보기만 한 것을 보면. 아니, 아니, 그보다도, 조용헌 교수가 들었다는 그 살벌한 꾸지람을 저도 들을까봐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저도 도를 닦아보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기도를 해도 잘 안 됩니다. 왜 그런 겁니까?” “구멍 때문이지!” “구멍이 뭡니까?” “여자지, 여자에 대한 생각을 끊어야 해!”) 조교수처럼 저도 여전히 "예쁜 여자만 보면 가슴이 울렁"거립니다(진솔한 조교수의 표현을 인용하여 씀으로써 자신의 몰골을 가리고자 하는 이 비열함...).

가만 있어보자... 지금 내가 뭐하자는 수작인가? 수행이 장난이냐?

문득 기억났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는 없다는 절박함으로 시작한 이 길, 그리고 그때의 초심. 스스로에게 기가 막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습니다. 아, 나는 완전 논다리가 되버린 건 아닐까...

대각심 스님의 암자 앞의 연꽃 가득 핀 연못가에 저는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동시에 응가 의사를 피력한 두 따님들을 데리고 아내는 저 멀리 떨어진 화장실에 가고 없었습니다. 연꽃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습니다. 그렇게 연꽃을 바라보며 앉은 채, 헤집어진 내 마음의 치유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한 사, 오 미터 떨어진 연못의 저쪽 기슭에 회색 승복을 입은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은 연못가의 돌에 걸터앉으시더니 주위의 뛰어노는 어린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더군요. 그때에는 그분의 매우 평범한 외양을 보고는 그냥 암자의 보살님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나중에 회상해보니 사진으로 본 그 대각심 스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조교수가 인터뷰해 쓴 글에 나타나는 서릿발 같은 기상의 도사의 모습은 좀체로 느껴지지가 않았고, 인생의 황혼에 이른 인자한 할머니로만 보였습니다. 그분과 저는 똑같이 연못가의 돌에 걸터앉아 그렇게 물끄러미 연꽃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혹시 대각심 스님의 깊은 내면의 평화가 주변에 잔잔히 퍼진 탓일까요, 그렇게 앉아 연꽃을 바라만 보고 있던 제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았습니다. 잠시 후 일어나서 암자 쪽으로 걸어가시는 그분을 저는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도사님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를 또 다시 있는 그대로 끌어 안고, 그냥 그대로 용서해주고, 그냥 그 상태로 데리고 사는 것이 전부 축복으로 주어졌음을 믿습니다. 혹시 도사님 같은 분은 주변 반경 몇 미터 이내의 공간을 치유해주는 초능력이라도 보유하고 계신 건 아닐까요.

다음 번에도 예쁜 여자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나의 증상이 도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나까지도 내가 사랑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이날 우리 가족은 꾸려간 도시락을 절물에서 맛나게 먹은 뒤 제주시 주변 북서쪽 해안으로 드라이브를 떠났습니다. 용두암 해안도로에서부터 이호 해수욕장과 애월을 통과하여 곽지 해수욕장까지 드문드문 이어지는 해안도로 역시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드는 절경이었습니다. 곽지 해안에서 모래 파고 한참 논 뒤에 차 속에서 곯아 떨어진 아이들을 싣고 제주시내로 들어가서, 아내는 저녁 거리 장을 볼 동안 저는 차 속에 앉아 한가한 휴일 저녁의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주의 여인들 중에는 미인도 많더군요. '예쁜 여자'들이 차창 밖으로 흘러 지나갔습니다. 바람처럼, 그렇게 흘러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