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의 부녀(父女)
 

우도의 산 꼭대기 등대에서 다시 내려오는 길에 말과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초원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 그래서 현실적 영민함이 현저하게 처지는 - 첫째와 달리 둘째는 두뇌 회전이 빠르고 냉정합니다. 어떨 때는 공주 옷입히기와 같은 전형적인 '계집애 놀이'에 몰두하다가도, 금세 칼과 활을 집어들고는 왕자놀이를 하며 '태권도'로 애비를 마구 폭행하는 난폭함마저 지니고 있습니다. 집앞의 개미떼를 밟아 죽이고, 평소 폭력 영화를 즐겨보며, 때로는 밤에 왕자님의 검을 품에 껴안고 잠을 자기도 합니다. 맺고 끝는 게 확실하고, 누구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주지 않는 쌀쌀함도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미 이 아이가 세 살 때부터 친지들에게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나중에 얘한테 빠질 사내녀석들이 걱정된다."

계산이 빠른 둘째 나나는 집안에서는 엄마 쪽에 붙어 있다가도, 야외에 나와서는 아빠만 따라다닙니다. 그건, 다니다 좀 힘들면 아빠는 자신을 안고 가준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지요.

저는 우리 딸 자매를 바라보며 이러한 미래의 꿈을 꿔봅니다. '첫째는 창작 예술 활동에 몰입하고, 둘째는 그 예술적 자산을 이용하여 비즈니스를 벌이는 매니저가 된다.' 여기서 첫째는 재주 부리는 곰일 테고, 둘째는 돈 받는 서커스 주인이겠지요. 어쨌든 그와 유사한 구도로 번창하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자의 타고난 재능과 적성을 잘 살려주는 교육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합니다. 첫째는 되도록 제약이 없이, 하고 싶은 창작 활동에 마음껏 빠져 있을 수 있도록 해주고, 둘째는 지적(知的)으로 어느 정도 챌린징한 소재들을 접하게 해주려 합니다. 실제로 첫째는 그냥 놓아두면 하루 종일이라도 집앞 화단에서 흙과 돌과 나뭇잎 따위를 가지고 쉬지 않고 놉니다. 둘째는 그런 것은 조금 하다 말고 좀 더 '머리 쓰는' 종류의 놀이를 찾아 나서구요.

첫째도 그랬지만, 둘째도 음악적 재능이 다분해서, 벌써 '이 나이에' 원령공주 주제곡을 귀로만 듣고 실로폰으로 쳐댑니다.

제 자식 자랑 하는 놈도 팔푼이 중의 하나라지요, 아마.

멋적어서 평소 제가 줄기차게 외치는 구호나 한 번 더 외쳐보겠습니다: "귀한 내 자식만큼이나 남의 자식도 다 똑같이 귀한 줄 알자!"

이 날은 우도를 한 바퀴 돈 다음 해변에서 아이들 풀어놓고 놀게 한 후에, 다시 페리에 차를 싣고 성산포로 돌아와서 곧장 서귀포로 향했습니다. 친지로부터 강력 추천 받은 서귀포의 한 펜션을 찾아가서 1박하였습니다. 콘도보다 비용은 다소 더 들었지만, 해변의 절벽 위에 잔디가 곱게 깔린 정원을 품고 있는 그림같은 곳이었고, 바다를 바라보며 잔디밭 위 테이블에서 저녁 식사를 한 것도 멋졌습니다. 저는 제주도에 와서 처음으로 생선회를 안주 삼아 소주 한 잔 걸칠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여행을 다니면 술친구가 없는 게 좀 아쉽습니다만, 혼자 밤에 술 한 잔 걸치면, 특히 아름다운 자연의 품안에서는, 혼자서 신께 투정을 부리는 불경스러운 망발을 저지르곤 합니다. 그러나, 늘 감사한다는 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