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에서 제주로
 

작년과는 달리 올해에는 저 혼자 아침 일찍 차를 몰아 길을 떠나고, 아내는 학교와 유치원을 마친 두 아이를 데리고 오후 늦게 항공편으로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물론 제 차의 트렁크와 뒷열 좌석에는 여행용 짐이 잔뜩 채워진 채였습니다. 지난 해 여행의 경험에 비추어, 잠자리에 대한 지출을 늘이는 대신에 식비를 줄이기로 방향을 잡고, 아이 엄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주로 펜션에서 밥을 해먹으며 다니기로 작정했기에, 그에 따른 추가 짐이 더 생겼습니다. 게다가 해변에서 놀 때 필요한 그늘막에, 아이들 태워줄 고무 보트 등도 추가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놀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된 것입니다.

바로 전 날까지 기말성적 처리 등의 쌓인 일들 하느라 늦게 잠자리에 든 탓에 오전의 드라이브 내내 졸음과 싸웠습니다. 전라도 고창에나 닿아서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 숨 돌렸는데, 비수기, 평일의 텅 빈 휴게소는 한적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길, 남도의 서해안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 목포를 거치고 나니 예정 시간보다 꽤 앞서 있음을 알게 되어, 해남 못 미친 곳의 영암 방조제에 내려 사람과 물길과 갈대 등을 유유히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방조제 단장을 위하여 동원된 인력은 모두 시골의 할머니들이었고, 그분들은 뙤약볕 아래 쭈그리고 앉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러가면서 냉방이 잘 된 차를 몰고 가고 있던 저는 그분들 가까이 다가가기가 미안했습니다. 그제서야, 서울에는 여전히 나의 이웃과 벗들이 스트레스 받으며 일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놀러가면서 이 웬 궁상, 이왕 한 번 가는 것 신나게 가야지. 늘 지고 있는 마음의 빚 - 나 혼자 너무 제 멋대로 잘 살고 있다는 - 그냥 떨궈버리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일 년만에 다시 와본 완도에는 입구서부터 도로변에 '해신 장보고'의 화려한 깃발이 이열종대로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왜 나는 이런 것을 보는 시각이 삐딱해야만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게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보다 완도 그 자체가 비교도 할 수 없이 위대합니다. 더 큰 것을 훨씬 작은 것으로 광고한다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 그저 새로운 관광명소가 생겼다는 길 안내 표지나 몇 장 붙여두면 될 것을. 드라마 촬영 현장에는 평일인데도 대형 관광 버스들이 여러 대 오가고 있었습니다. 하긴, 이런 식으로라도 완도 주민들 수입이 좀 올라간다면 좋은 일이겠지... 저는 그 촬영장에 들르지 않고 완도항으로 향했습니다.

배에 차를 싣기 전에 농협에 들러 수박을 한 통 샀습니다. 제주의 물가가 높은 것을 고려해 웬만한 것은 다 뭍에서 장만해가려는 심사에서였습니다. 수박 열 개 정도를 일일이 손가락으로 두드려본 끝에 가장 소리의 공명이 빼어난 놈으로 골랐습니다. 저의 수박 고르는 방법은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내가 첫 애를 가졌을 때 입덧이 심해 매일 수박만 찾았기 때문에, 직접 장에서 단 수박을 고르는 과정에서 터득한 방법입니다. 그 때문인지 첫째 시시는 과일류 중에서 수박을 제일 좋아합니다. 제주에 도착해서 잘라보니 역시 잘 익은 수박이었습니다.

승선하기 전에 점심을 때우려 눈에 띄는 돌솥밥 집에 들어갔습니다. 6천원이라는 밥값이 점심 한 끼 값으로 저렴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 상 그득 차려내오는 남도의 음식 인심은 접할 때마다 경이롭습니다. 도저히 다 먹어치울 수 없어 많은 양의 반찬을 남겨야만 하는 것이 큰 아쉬움입니다. 서울에서는 만2천원을 받아도 비싸다 하기 어려울 정도의 한 상 차림이었습니다.

차를 카페리선에 싣고 갑판으로 올라갔습니다. 작년보다 운임이 오히려 인하되었더군요. 이재에 밝지 못하여 돈 모으는 재주가 없는 저로서는 이런 작은 이득이 큰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배가 출항하여 연안의 섬들을 다 빠져나와 사방이 트인 바다에 이를 때까지 갑판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출항 할 때의 묘한 설레임을 갑판 위에서 즐기고 있던 이들은 전부 남자들이었습니다. 배가 속력을 내서 물살을 헤치고 나갈 때에도 갑판에서 세찬 바닷 바람을 즐거운 듯이 맞고 서있던 이들도 전부 남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여자들은 세찬 바람을 안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남자에게는 '길 떠나는 유전자' 같은 것이 더 많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세상 구경 떠나기'의 주체도 거의 대부분 남자들입니다. 저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를 트롯 장르의 한 획을 긋는 명곡으로 여기는데, 어쩌면 그 노랫말이 생물학적 차원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귀소본능이 작동하는 바로 그 시점에 오히려 길을 떠나고 싶어하는 남자의 방랑기는 생물학적인 것일까요, 영적인 것일까요? 남자인 저는 모든 남자들이 다 갑판을 떠난 다음에도 한참을 바닷 바람 맞으며 서있었습니다. 바닷 바람이 전해주는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세찬 해풍 맞으며 갑판 위에 서있는 재미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푸른 바다, 푸른 하늘, '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의식조차도 깡그리 잊어버린 채.

위의 사진 속에는 저 멀리 완도가 보입니다. 완도에서부터 배까지 이어지고 있는 뱃길의 자취는 예상과 달리 꽤 구불구불합니다. 허나 그 구불구불한 길이 궁극적으로는 직선을 만들고 있음은 당연합니다. 나 자신도 단기적으로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걷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똑바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제주항에 도착하여 차를 배에서 끌어낸 후 곧 바로 이마트로 향했습니다. 이미 거기에 도착해서 식량과 음료 등을 사고 있던 처자식과 합류한 후, 우리는 함덕으로 떠났습니다. 두 번째 방문일 뿐인데도 제주시 외곽의 지리가 친숙합니다. 제주의 도로는 서울 쪽에 비해 매우 단순한 편입니다. 생활이 단순한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졌습니다. 함덕에 도착해서는 작년 여행 도중에 아내가 눈여겨 보아둔 근사한 펜션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이번 제주 여행 동안 가장 고가의 숙박비를 지불하게 된 곳입니다. 여행의 첫날은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매일 보는 애비를 하루 만에 다시 만났다고 반가워 하는 딸들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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