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스러운 펜션
 

제주의 첫날 밤 함덕의 '팜비치 리조트'라는 멋드러진 펜션의 객실에 처음 들어온 둘째 나나의 반응은 "좋은데 쪼금 좁아"였습니다. 작년만 해도 콘도에만 데려다 놓아도 방문을 처음 여는 순간 '우와~' 외치며 좋아하던 것들이 이제는 마치 고급 와인 감정하는 소멜리에처럼 고급 펜션에 평점을 멕이며 오만스럽게 고개를 까딱댑니다. 그간 '펜션'이라는 곳을 몇 번 다녀본 후유증인 것 같습니다. 이 숙박 시설은 일단 외장이 고급스럽게 지어졌습니다. 집 안팎의 자재가 거의 죄다 미국의 교외 주택가에서 사용되는 고급품들임을 감안하면, 1류 호텔의 반 값이 안되는 숙박비가 과하게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이곳은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싼 금액만큼 내가 돈 더 벌어오겠노라면서 결국엔 저 자신이 고집하여 고른 숙박시설이었습니다. 그것은, 딸내미들이 이 집에 머무르는 2박 동안 예쁘고 고급스러운 집이 선사해주는 즐거움을 향유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저 자신의 욕심에서였습니다. 물론 부모의 욕심은 끝이 없고, 어느 선에서는 절제해야만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 펜션에 대해서는 제가 욕심을 좀 냈습니다.

어렸을 적, 저의 어머니는 저를 동네의 다른 아이들 처럼 '막 굴리지' 않으셨습니다. 흙 속에서 뒹굴며 놀기 보다는 집에서 조용히 책 읽을 것을 부추기셨고, 길에서 파는 '불량식품'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그런 제가 어른이 돼서는 쐬주와 닭똥집을 즐기는 '소탈한' 스타일이 된 데에는, 그러하셨던 어머니의 양육방식에 대한 저항심의 자국도 어느 정도 있었던 듯 합니다). 무역 업무를 하시느라 해외 출입이 잦으셨던 아버지는 종종 저와 여동생을 '양식당'에 데리고 가셨고, 저는 어릴 때부터 '크림 스프'와 '함박스텍'에 입맛이 길들여졌습니다. 철모르는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와 아버지의 회사 차를 운전하던 아저씨와 어딘가를 다녀오던 길에 식당에 들르게 되었는데, 무얼 먹겠냐며 묻던 아버지께 저는 '불고기'라고 대답했고, 이를 본 함께 있던 아저씨는 기가 찬 듯 웃었습니다. 당시는 불고기 같은 것은 우리 집에서도 몇 달에 한 번 정도밖에 먹을 수 없는 고급 음식이었기 때문이지요. 헌데 저는 한식집에 가본 일이 거의 없었던 까닭에, 불고기 외에는 대중식당에서 파는 음식의 이름을 아는 게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한 번은, 몰락하여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시던 외조부께서 저와 여동생을 데리고 극장 구경을 가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 돈을 드리며, 구경 뒤에 애들을 극장 부근의 '양식집'에 데려가서 함박스텍을 사주시라 당부했었습니다. 저와 여동생은 재미나게 만화영화를 본 후 할아버지를 따라 식당엘 갔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어머니가 말해 준 그 양식집이 아니라,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다락방 같은 곳에 올라가 앉아야 하는 후줄근한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대중식당의 메뉴를 전혀 모르는 우리는 '함박스텍'과 오므라이스를 주문하였고, 그 집은 마침 한식과 양식을 겸하는 퓨전 레스토랑이었던지 할아버지의 국밥과 함께 우리의 양식 요리를 내주었습니다. 헌데 그 요리를 한 숟깔 씩 떠먹어본 뒤 저와 여동생은 할아버지께 못 먹겠다며 수저를 놓아버렸습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막돼먹은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처음 맛보는 그 퓨전 요리를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외조부께서는 알겠다 하시며 아무 말씀 없이 우리들의 함박스텍과 오므라이스까지 당신께서 드시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곁에서 바라보았던 외조부의 음식으로 불룩했던 볼은 오랫동안 저의 뇌리에 남았습니다. 외조부께서는 그 맛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당신의 입에 집어넣고 계셨습니다.

훗날 미국에서 살다보니 미국 사람들은 절대로 입안 가득 음식을 채우지 않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음식이든 한 번에 적은 양만을 입안에 넣어 천천히 우물거리며 씹어넘깁니다. 문화적으로 미국화 되어갔던 저 또한 그런 식으로 음식을 먹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린 저의 눈에는 그런 미국인의 식습관이 매우 세련되게 보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입안 가득 음식을 채워넣고 와구와구 씹어대는 한국인의 식습관은 촌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촌스럽게도 그 맛없는 함박스텍을 계란 후라이까지 남김없이 입안 가득 넣어 삼키시던 외조부의 모습이 그래서 기억 속에 더 가슴 아프게 남아 있습니다. 손주들에 대한 사랑과 몸에 배인 검소함과 절약정신이 한 덩어리로 비벼져서 당신의 목구멍 속으로 꿀꺽 넘겨지고 있었습니다. 홀로 말없이 볼데기가 불룩할 정도로 입안 가득 음식을 채워 식사를 하고 있는 나이든 남자들의 모습은 그 때문인지 언제나 서글퍼 보입니다. 지금은 저 자신이 매일 점심을 바로 그런 모습으로 혼자 연구실에서 때우며 살고 있습니다. 찬밥에 고추장을 비벼 김치나 그밖의 반찬 한 가지 정도로.

사랑스러운 딸내미들에게 거친 밥 먹게 해주고 싶은 애비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 자신이 성장기의 언제부터였던가 고급스러운 음식과 옷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처럼, 저의 딸들도 소박하고 조야한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생활 습성을 기를 수 있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고급스러운 펜션으로 딸내미들을 모시고픈 저의 욕심은 모순된 것일지 모르겠군요.

펜션의 바닷가로 향해 난 정원에는 바베큐 해먹을 수 있는 식탁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 둘러 앉아 캄캄한 밤바다를 바라보며 늦은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아이들과 아내는 일찌감치 안락한 침실에서 잠자리에 들었고, 저는 그날 밤부터 혼자 제주도의 달을 보며 술마시는 이태백 스타일 주도(酒道)를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펜션 베란다에 앉아 맥주 캔을 홀짝이며 바라보는 제주의 밤바다는 깊은 밤 시간까지 저를 붙잡아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