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덕에서 온종일 놀기만 하기
 

둘째 날 아침, 엄마가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동안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숙소 앞의 해변을 산책했습니다. 작은 부둣가의 돌로 쌓아 만든 방파제에 다가가니 바위에 달라붙어 사는 갑각류 벌레들 수십 마리가 잽싸게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그 벌레가 무섭다며 방파제로 다가 설 것을 망설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벌레 쫓는 법이라며 '고함 지르기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벌레들 있는 곳에다 대고 '우왁' 소리를 지르면 벌레들이 무서워서 도망친다며 꼬드겼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용기를 내서 방파제로 다가가 "우왁!"하며 둘이 함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만화영화 '이웃집 토토로'에서 주인공 자매가 이사간 집의 다락방에 대고 소리 지르던 모습과 흡사하여 웃음이 흘러나왔습니다. 미지의 공포의 대상을 향한 과장된 호전성의 표출은 어린 아이들의 일종의 자기방어적 자기선언인가 봅니다.

함덕 해수욕장에 미리 한 번 차를 몰아 가보니 오전 중에는 밀물 때여서 백사장이 아주 협소해져 있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썰물 뒤 백사장에서 바다 생물을 채취하는 재미를 맛볼 수 없겠다 싶어 일단 오후까지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작년에 같은 곳에 왔을 때, 바닷물이 빠져나간 다음에 넓게 펼쳐진 모래밭 위에 흩어져 있는 얕은 웅덩이에서 다수의 해양생물들을 포획하는 삼삼한 재미를 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체험에 관한 저의 자랑을 듣고 우리 가족처럼 제주를 찾았던 저의 친구 가족은 밀물 때 함덕 해안에 당도하여 별 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바도 있었고.

오후가 되자 정말로 바닷물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다로 진출하기로 결정하고는 함덕 해수욕장의 바닷가 가장 근접한 곳에 차를 대고 - 우리 일행 외에는 백사장 곁 주차공간에 차를 세워둔 이가 한 명도 없었으므로 -, 배낭 여러 개와 아이스 박스 등등 꽤 많은 짐을 짊어지고 물가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새로 사온 그늘막을 낑낑대며 세우고 그 안에 베이스 캠프를 차렸습니다. 처음 쳐보는 그늘막이 자꾸만 바람에 날려가려 하는 바람에 사방에서 묵직한 암석을 날라다 텐트의 네모퉁이에 박아두었습니다. 아이들은 곧바로 물로 뛰어 들어가 꺅꺅 거리며 쉴새없이 조잘대기 시작했고, 이미 닥치는대로 눈에 띄는 바다생물들을 잡아오고 있었습니다. 주로 쉽게 잡을 수 있는 집게들을 가져왔지만 이내 새끼 게들까지 등장했습니다. 썰물 뒤에 백사장에 고인 웅덩이 속에 갇혀버린 불행한 물고기들이 아주 많았지만, 그놈들도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된 낚시 도구 없이는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그들을 뒤쫓아 날뛰는 자체로 재미있었습니다. 움직이는 생명체를 잡는다는 것은 왜 이렇게도 끝없이 재미있을까요? 우리에겐 수십 만 년전의 수렵채집 경제의 기억이 유전자 차원에서 각인되어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새로 사온 또 하나의 비장의 무기, (아동용) 고무보트를 끄집어냈습니다. 땀빼며 겨우 공기를 채워넣자 아이들이 환호를 지르며 달겨듭니다. 파도도 없는 야트막한 해안에서 두 아이는 꽤 오랫동안 보트타기 놀이를 즐겼습니다 - 배가 고파 오는데 마침 엄마가 밥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변변치 않은 반찬이었지만 아이들은 연상 '맛있다'를 되풀이 하며 도시락을 싹 비워버렸습니다. 작년과 달리 올해에는, 어디 질릴 때까지 놀아보라고 오후 내내 아이들을 해변에 풀어두었습니다. 해가 서녘으로 조금 기울 무렵, 빠져나갔던 바닷물이 다시금 조금씩 백사장 위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할 때까지 저는 아이들과 거의 쉴틈없이 놀았습니다. 수영을 하기에는 약간 서늘하여 물속에 풍덩 들어가지 못한 것만 빼고는 더 바랄 것 없는 해변의 하루였습니다. 숙소로 돌아갈 때가 되어선, 둘째는 체력이 소진하여 애비 팔에 안겨 잠들어버렸고, 첫째 시시는 아빠를 대신해서 잡은 게들을 담은 수조와 잠자리채를 운반해주었습니다.

펜션에 돌아와서도 저녁 때 아이들은 애비가 가져온 노트북 컴퓨터에 쉬렉 DVD를 돌리며 지들끼리 신나게 보는 동안, 부모는 정원의 식탁에 저녁상을 차렸습니다. 저녁 식사 후, 식구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다음에도 저는 또 다시 홀로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음악 소리를 벗삼아 술을 마시며 해변의 밤을 지켰습니다. 자정도 지나 주변 해변을 휘익 한 바퀴 배회하고 돌아와서야 아쉽지만 보름달에 작별을 고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온 종일 철저하게 놀기만 한 하루였습니다. 놀면서 틈틈이 신께 감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