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산책' 펜션
 

표선에서 남원으로 향하다 '해안 경승지'라는 경치 좋은 곳 부근의 '파도 마을'이라는 펜션 군락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차 속에서 잠든 나나를 보는 동안, 아내와 시시가 펜션 쇼핑에 나섰습니다. 장고 끝에 결정한 곳이 바로 '바다산책' 펜션; 이번 여행 동안 내린 여러 가지의 매우 성공적인 결정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주에서 첫 이틀 밤을 지낸 고급 펜션이 화려한 실내를 뽐내기는 했지만, 이 바다산책 펜션이야 말로 '하드웨어' 만으로는 다 커버할 수 없는 세심한 영역들을 '소프트웨어'로 완벽하게 관리하여 말 그대로 '고객 감동'을 실천하는 숙박업소였습니다. (상업적 여행정보 싸이트가 아닌 이곳에 이 펜션의 광고와 링크까지 걸어둘 만큼 '강추'할 만한 펜션입니다.)

아내와 시시가 골라온 몇 군데 중에서 이 펜션을 최종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우선 해변을 직면하고 있는 탁월한 조망 때문이었습니다. 펜션 전면에 위의 사진과 같은 잔디밭 정원이 넉넉하게 펼쳐져 있고, 그 앞은 바로 탁 트인 대양입니다(정원에서 바닷가로 곧바로 갈 수는 없고 도로 쪽으로 돌아서 가야 합니다만). 각 객실은 복층 구조로, 2층은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침실이고, 아래층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아름다운 거실과 부엌, 그리고 예외적으로 편리하게 만들어진 욕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저와 아내는 짐을 풀고 나서 실내의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청소가 되고 정돈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한 뒤, 즉시 이 집에서 하루 더 묵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 날 숙소로 예약해둔 한화 콘도보다는 비싼 십만 원의 숙박료(비수기 용)가 아깝지 않다는 판단에서였지요. 일단 하드웨어 측면에서 대만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오히려 소프트웨어 쪽이었습니다. 펜션의 주인인 송사장님이 직접 관리를 하시는데, 이분의 따스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직 발이 낫지를 않아 잠이 깬 후에도 울먹거리고 있던 나나를 치료해주는 모습을 봤을 때였습니다. 발이 아프다는 아이를 본 송사장님은 우리에게 표선에 다녀왔냐고 물은 뒤, 그곳에는 날카로운 '모래 가시' 같은 것이 많아 발바닥이 연약한 어린애들이 곧잘 가시에 찔린다고 하였습니다(실제로 발이 아프다며 투정부리는 어린애들을 몇 더 보았더랬습니다; 허나 어른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단한 굳은 살에는 박히지 않는 '가시'인가 봅니다). 저더러 아이를 안고 밝은 곳으로 나오라 하더니 송사장께선 저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맥가이버 칼)'에 딸린 족집게로 아이 발바닥에 박힌 미세한 '모래 가시'를 하나 하나 정성껏 빼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시력이 부모의 그것보다 훨씬 밝은지, 능숙하게 여러 개를 다 빼내었고, 처음에 겁먹어 울먹이던 나나는 주인 아저씨의 푸근한 음성에 안심한 듯 애비 품에 안겨 발을 아저씨에게 맡긴 뒤 기꺼이 치료에 응했습니다. 덕분에 완치된 나나는 금세 발딱 일어나서 제 언니와 퐁퐁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숙박비를 만원 깎았던 것이 못내 미안했습니다.

다변(多辯)은 아니나 세심하게 필요한 정보들만 우리에게 전해준 주인장께서는, 저녁 식사로는 바베큐 요리를 꼭 한 번 해먹을 것을 권하시더군요. 자신이 직접 고기 구울 준비를 다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료로! (요즘 펜션을 다녀보면 알 수 있지만, 음식물 제외한 바베큐 패키지를 보통 만원 씩에 판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처 마트에 가서 제주 돼지 오겹살과 야채를 사다가 위의 사진에 나온 테이블 위에 저녁상을 차렸고, 바로 옆에서 주인장께서는 귤나무 땔감을 때워서 직접 천연 숯(오리지날!)을 만들어 손수 그릴에 고기를 구워주었습니다. 아마 풍광과 정성에 반한 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먹어본 돼지고기 구이 중에 제일 맛있는 한끼였던 것 같습니다. 주인장은 옆 집의 다른 일행들에게도 일일이 불을 때워 고기를 구워주느라 분주했습니다.

제주 토박이인 송사장님은 워낙엔 귤농사를 지었으나, WTO 사태 등으로 농업이 사양길에 접어듬을 직감하고 과감하게 펜션 사업을 시작했다더군요. 이렇게 일일이 손님들에게 바베큐 차려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객들과도 서로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좋다는 이 분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깊은, 진정으로 삶에서 '성공한' 사업가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 물론 여기서 '성공'의 기준은 단순한 매출액의 증가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보람이나 평화, 마음의 여유, 행복감 등과 더 관련이 있는 개념입니다. 저는 펜션을 경영하는 일이 주인장의 적성에도 매우 잘 맞으시는 일 같고, 농업으로부터 전업하신 것이 참 잘하신 일 같다는 찬사를 전했습니다. 이건 평소에 정리정돈이나 타인 배려 등의 '써비스'에 재능이 있는 저같은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인간적 세심함에 대한 솔직한 평가였습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과 써비스를 베푸는 것, 이 정도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요? 그분의 삶의 내용을 제가 알 수는 없지만, 여유로운 표정과 말씨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내면의 평화였습니다.

근사한 잔디밭 정원 위에서 달빛에 비친 바닷물을 바라보며 저는 또 한 잔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와 아내가 모두 2층 침실에서 잠든 뒤에도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습니다. 이렇게 놀아제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때때로 양심을 건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몇 달도 열심히 일하며 살았고, 제주도로 떠나기 전 날, 기말 리포트를 받기 위해 만난 수강생들 중 연세가 지긋하신 현직 교사분들 두 분이 제 손을 꼭 쥐며 '가르침'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해주신 것을 보면, 이번 학기에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수업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며 자위했습니다. 그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어떤 분은 제가 전생에 수도승이었을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만, 저는 제가 전생에 조선의 한량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합니다. 산 좋고 물 맑은 곳 찾아다니며 술잔 기울이고 시나 읊조리던 한량.